FOOD

제로 소주의 진실과 답정너

프로필 by 김현유 2023.03.30
 
“원래 소주는 엄마들이 먹는 거야.” 배우 소이현이 <아는 형님>에 출연해 남긴 명언이다. 워킹맘이 된 후, 나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됐다. 그렇다. 소주는 엄마들의 술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주는 세상 힙한 병에 담긴 증류식 소주가 아니라, 퇴근길에 헐레벌떡 집어 들기 만만한 저렴이 희석식 소주다. 업무와 육아의 끝나지 않는 굴레에서 잠시 숨이라도 쉬려면 소주 한잔은 필수였다. 정신없는 하루 끝에 아이가 잠들 무렵이 되면 아이 할머니 몰래 퇴근길 편의점에서 사온 소주를 얼른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사실 이것도 눈물겨운 일이다. 서른 넘은 나이에, 내 집에서, 내 돈으로 산 술 마시는데 왜 새벽에 몰컴 하는 중학생인 양 엄마의(그렇다. 아이 할머니는 내 엄마이기도 하다.)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어쨌든 한동안은, 몰컴 하다 걸린 중학생처럼 엄마한테 등짝을 맞곤 했다. 아침까지 음주의 여파가 남아 불그스름하게 팅팅 부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전날 밤의 ‘몰술’을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사정이 바뀌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소주계의 트렌드세터 무가당 소주 덕분이다. 21세기 한국 희석식 소주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뒤돌아보면, 아마 2006년 20도 이하 저도주의 등장 이후로는 2022년 무가당 소주의 탄생이 가장 센세이셔널한 일이 아닐까 싶다. 저도주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저도주는, 20도 이하 소주는 제대로 된 맛도 나지 않아 소주라고 부르기 가당치 않다는 21도 위정척사파들의 반대를 사뿐히 이겨내고 승승장구해 이제는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20도는 물론 이제는 감정적 마지노선이라는15도의 벽까지 깨졌지 않은가? 낮은 도수에 당분까지 제거해 ‘더 건강한 소주’를 표방하는 무가당 소주 역시 저도주처럼 스테디셀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출시한 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그건 내 몸이 증명한다. 무가당 소주를 마신 다음 날이면 내 몸은 다른 소주를 마신 날보다 가볍다. 머리도 덜 아프다. 누군가는 무가당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살짝 낮기 때문이라며 ‘당 때문이 아니다’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게 뭔 상관? 어쨌든 무가당 소주를 마시니 머리가 안 아프다고 내가 느낀다는데, 대체 그게 뭔 상관인가? 인터넷을 찾아보라. 온통 ‘몸에 무리가 없다’는 후기가 가득하다.  
뜨거운 반응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청순하게도 투명한 병에 담긴 ‘처음처럼 새로’는 출시 60일 만에 누적 판매량 1000만 병을 기록했다. 경쟁사 하이트진로가 2019년 출시한 인기 제품 ‘진로이즈백’의 72일보다 빠른 속도다. 기세를 몰아 ‘새로’는 지난 1월까지 누적 5000만 병이 팔렸다. 하루에 36만 병이 팔린 셈이다. 이 같은 인기에 하이트진로도 부랴부랴 기존 제품인 진로이즈백의 알코올 도수를 낮추고 과당을 뺀 뒤 핑크색 두꺼비를 붙여 리뉴얼했다.
현상이 일면 분석이 뒤따른다. 또 ‘MZ세대’가 소환됐다. 전문가들은 MZ 세대가 건강도 지키면서 맛도 즐기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를 중시하다 보니 이런 트렌드가 생겨났다고 분석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그런 마음일까. 술은 마시고 싶지만 건강도 지키고 싶어서 칼로리도 낮고 당도 없는 술을 찾는다는 것이다. 몇 년간 돌림노래로 이어져온 MZ 타령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지만, 솔직히 헬시 플레저에 대한 분석은 세대를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가당 소주를 마실 때마다 항상 가슴 한편에 죄책감이 들곤 했으니 말이다. 소주 한 병이 400kcal라는데 안주까지 더하면 대체 이게 열량이 어느 정도야… 소주에 설탕도 많이 들어간다는데 이게 다 배랑 허벅지로 가는 거 아냐…. 그러니 ‘무가당’이라는 라벨은 과학적인 논박을 하라고 달아둔 게 아니다. 배와 허벅지를 배신하는 길티로부터 플레저의 길로 나를 인도하는 표지판일 뿐이다.
난 바보가 아니다. 따지고 들자면 한없이 따지고 들 수 있는 사람이다. ‘새로’의 옆면을 자세히 보면 326kcal라는 숫자를 확인할 수 있다. 식품 겉면에 열량을 표기하는 열량 자율표시제가 올해 들어 주류로까지 확대된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주 한 병의 열량인 400kcal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이 없는데도 열량은 그대로인 이유는 간단하다. 소주의 열량을 결정하는 건 당류가 아니라 알코올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1g당 열량은 7kcal다. 이 때문에 가당이든 무가당이든 칼로리는 크게 다를 수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심지어 ‘진로이즈백’은 가당과 무가당 제품의 열량 차이가 겨우 10kcal에 불과하다. 두 제품의 알코올 도수 차이는 0.5도로, 이 10kcal의 차이가 거기서 왔다고 계산해보면 사실상 당은 소주의 열량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당 대신 넣은 합성감미료가 오히려 몸에 더 안 좋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애초에 당 자체가 이렇게 적게 들어 있었다면 합성감미료 역시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정도로 적게 함유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숙취가 줄어든 이유는 뭘까. 숙취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알코올이지 당이 아니다. 몇몇 소주회사 사장님들은 무가당이 숙취를 없애준다고 주장하지만, 당이 숙취를 강화한다거나 합성감미료가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무가당 소주를 마시면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내 경험을 믿는다. 누군가는 ‘플라시보 효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것은 플라시보 효과다. 술을 마시면 무조건 건강에 해롭다. 당이 얼마나 들었든 도수가 어찌 되었든 간에 알코올을 몸에 들이부으면서 건강을 챙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내가 머리가 아프지 않은 이유는 당이 들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모두 기억하시라. 플라시보도 효과다. 나는 내게 효과가 있는 걸 믿는다. 이런 팩트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소주를 시킬 때 굳이 무가당을 고집하는 이유다. 어차피 마실 거라면, 무가당 소주가 일반 소주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기 위안을 꼭 껴안고서. 손톱만치라도 나은 선택을 했다는 위안으로 내 힘든 삶을 보듬어주겠다는데, 내 몸에 붓는 소주만은 ‘답정너’로 살겠다는데, 우리 엄마 말고 내 등짝을 때릴 사람은 없다.
답정너는 무가당 소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초코우유라도 프로틴이 들어 있다는 제품을 구입하면 괜히 영양소 섭취에 더 신경 쓴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차피 초코우유는 단백질이 좀 더 추가되든 아니든 간에 당류와 지방 덩어리다. 각종 제로 제품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의 과학자들이 합성감미료가 설탕보다 나쁘고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를 냈다지만, 당장 열량이 낮은 제품을 마시는 게 당류 덩어리를 고르는 것보단 나은 선택을 한 것만 같은 게 사람 마음이다.
몇 달 전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 면세점에서 처음으로 아이크림을 샀다. 가지고 있던 그 나라 돈을 털어버리려 했는데, 마땅히 살 만한 게 없던 차에 번쩍이는 조명 아래 깊어진 내 눈주름이 눈에 띄었던 탓이다. 크기도 부피도 작은 주제에 가격은 대용량 수분크림과 맞먹었다. 정작 성분을 살펴보니 매일 바르던 보습 크림과 정말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매일 세안을 마친 뒤 눈가에 살살 문질러 바르고 나면 왠지 고급 제품으로 피부 관리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뿌듯해졌다. 그 어떤 과학적 반박에 직면하더라도, 내 몸을 위한 손톱만큼의 합리적 선택에서 거대한 플라시보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헬시 플레저를 상회하는 ‘답정너 플레저’인 것이다. 어차피 길티할 일 가득한 세상, 약간이라도 길티를 줄여주는 선택지가 늘어난다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김현유는 <에스콰이어 코리아> 피처 에디터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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