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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라코위츠가 만든 색동 유령들에 관하여

2018년, 트래펄가 광장의 라마수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티스트 마이클 라코위츠는 그 라마수가 유령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라코위츠가 만드는 유령들은 생기가 사라진 기괴한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수혈받은 생생한 색상의 피로 우리가 가진 상실의 상처를 응급처치 하는 힘을 지녔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3.06.25
 
어제 라코위츠 씨와 함께한 작가와의 시간은 정말 행복했어요.(인터뷰 전날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선 강연 및 Q&A로 이뤄진 작가와의 시간이 열렸다) 2004년부터 진행 중인 작품 <리턴>에서 시작해 최근의 작품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소설 같았습니다.  
스토리란 경험이나 사건, 감정과 만남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서로 엮이며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으로 이라크 출신인 제 정체성이 담긴 작품에 대해 생각한 계기는 유대계 이라크 사람인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영위하셨던 이라크 물품 전문 무역회사인 ‘데이비슨 앤 컴퍼니’를 떠올리면서였어요. 먼 과거에 저희 할아버지가 일으켰고 한참 전에 문을 닫은 그 무역회사를 걸프전쟁이 끝나고, 이라크와 관련한 제재가 철회된 미국에 다시 소환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거죠.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2004년, 이라크까지 무료로 소포를 보내주는 서비스를 ‘데이비슨 앤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죠.
인기가 많았다면서요.
맞아요. 이라크 이민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죠. 정말 많은 이라크 이민자가 찾아왔거든요. 이후 프로젝트가 점차 확장되어 2006년 브루클린 애비뉴 529번지에 아예 점포를 차렸으니까요. 이라크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맛이고, 고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인 이라크의 대추야자를 수입해보자는 결심을 한 것 역시 그때쯤이에요.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아주 콘셉추얼한 아트 프로젝트였거든요.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현실의 정보가 드러났고, 이라크의 피난민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됐죠. 일단, 제가 연락했던 바그다드의 회사에서 물건을 보낸 지 3개월이 지난 후에도 대추야자 열매는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이라크에서 대추야자를 저희 쪽으로 보내주는 회사의 이름은 ‘바빌론 데이트 컴퍼니’(대추야자는 영어로 ‘date’다)였는데, 이들이 보낸 우리의 대추야자는 미국식품위생국, 미국국세청 등등 수많은 기관을 난민처럼 돌아다니는 중이었죠. 그러던 중 심지어 이 바빌론 데이트 컴퍼니와 연락이 끊기기도 했어요. 한참 후에야 연락이 다시 왔는데 ‘우리는 지금 바그다드를 떠나 요르단으로 왔다. 내 와이프와 아이들이 어떤 군인이 누군가를 총으로 쏘는 장면을 목격해서 최대한 급히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더군요.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에 올려진 라코위츠의 라마수. 자신의 작품을 이 좌대에 올린 사람은 지금까지 15명뿐이다.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에 올려진 라코위츠의 라마수. 자신의 작품을 이 좌대에 올린 사람은 지금까지 15명뿐이다.

‘이라크에서 대추야자를 수입하려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로 끝나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군요. 그 과정에서 미국의 행정기관들이 이미 제재 조치가 철회된 국가에 대해서도 얼마나 치밀한 유사 제재 조치를 취하는지, 또 현지에서 피난을 가야 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이유가 있는지 등등 수많은 이야기가 드러났어요. (라코위츠가 이라크 전문 수입업체를 세운 이야기는 바라캇 컴템포러리에 전시 중인 영상 작품 <리턴>에 담겼다.)
맞아요. 저는 단지 하나의 열린 시스템을 만들어놓았을 뿐이죠. 저는 그저 질문을 던졌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복잡한 답변들이 돌아오며 다층적인 스토리가 완성된 거죠.
저는 유럽과 영미 모던의 세례를 받은 한국의 미술 교육을 받고 자랐죠. 그래서인지 아트는 이야기에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명령을 정언처럼 여기는 면이 있습니다. 아트는 설명적이지 않아야 한다. 아트는 아트 그 자체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럼에도 당신의 이야기들은 마치 당신의 예술을 완성시키는 느낌이었어요.
저 역시 그렇게 배웠죠. 1990년대 학교에서 아트는 스토리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작가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인간 혹은 인간의 감정과 오브제 사이의 관계성이 사라지는 그런 미니멀리즘적이고 모더니즘적인 것들이야말로 아트라는 얘기였죠. 전 당시에도 어떤 면에서 굉장히 폭력적이라고 느꼈어요. 영미 유럽의 백인 남성을 위주로 하는 폭력적인 아트의 개념인 셈이죠. 전 인간의 이야기와 경험들이 인간이 만든 사물들에서 어떻게 떨어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모더니즘은 아프리카의 원시적이고 관능적인 조각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 조각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온 노예들의 이야기, 아프리카에의 다양한 탄압 이야기는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죠. 전 그런 관점에는 반대합니다.
당신의 대표 연작인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에 대해 얘기할 때 중요한 메타포는 ‘유령’입니다.
2006년 대추야자를 기다리는 3개월 동안 팔 물건이 없어 손님도 없는 텅 빈 가게에 대추야자 열매가 없어 채워지지 못한 대추야자 상품의 빈 상자들 옆에 혼자 있었어요. 텅 빈 공간에 있다 보니 다른 비어 있는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2003년 4월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 당시 약탈당한 이라크 박물관을 생각하게 됐죠. 약탈당한 것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데이터베이스를 살폈죠. 약탈당한 문화제들이 유령이 되어 박물관에 다시 돌아온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봤어요. 그때 시작된 게 이라크 국립박물관에서 약탈당했거나 전쟁으로 파괴된 7000점 이상의 문화재들을 실제 크기로 표현한 그들의 ‘고스트’를 만드는 작업이에요. 그 작업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연작이고요. 그러나 유령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와선 안 됐죠. 다른 모습이어야 했어요. 이라크 대추야자 열매의 포장지, 시카고나 뉴욕에 떠도는 미국 내 아랍 신문들로 문화재들을 실제 사이즈 조각으로 재현해내기 시작했죠.
지난 2018년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 세워졌던 런던시 주최의 커미션 작품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라마수)> 역시 같은 시리즈 중 하나였죠.
맞아요. 트래펄가 광장 북서쪽에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거대한 좌대가 있습니다. 보통 ‘네 번째 좌대’라 불리는 이것은 원래는 윌리엄 4세의 기마 조각을 올리기 위해 만들었으나 기금이 부족해 빈 채로 남겨졌다고 해요. 런던시는 비정기적인 커미션 프로젝트 형태로 이 좌대 위에 특정 작가들의 조형물을 올리는데, 2018년에는 제가 낸 제안이 채택됐어요. 옛 아시리아 니네베시의 네르갈 게이트 양쪽에 세워져 있던 라마수(날개 달린 황소) 석상은 지난 2015년에 ISIS가  파괴했죠. 이것과 매우 비슷한 다른 라마수를 1889년 영국의 한 고고학자가 발견해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지요. 저와 제 팀은 이 라마수의 유령을 네 번째 좌대 위에 올리는 제안을 런던시에 하기로 결심했어요. 알아보니 좌대의 길이도 14피트고 라마수 원본의 길이도 14피트더군요. 아주 완벽했죠. 우리의 제안이 선택됐고, 이라크 대추야자 시럽을 담는 캔으로 이 라마수를 재현했어요. 보통의 이 연작엔 포장지를 활용한 ‘파피아 마셰’ 방식을 사용했지만, 라마수 작업은 야외인 만큼 물에 강한 재질이 필요했죠. 식료품 포장지들 대신 대추야자 시럽의 캔으로 만든 라마수 상은 2020년까지 네 번째 좌대 위에 전시됐어요. 철거할 당시 저는 제 라마수를 기증할 테니 영국박물관이 소장 중인 라마수 석상의 진본을 이라크에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유령이 새로운 모습으로 진본이 있는 곳에 다시 나타난 거군요.
맞아요. 영국박물관에 있는 진본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유일하게 유령과 진본이 함께 있었던 때인지도 모릅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에 전시 중인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칼후의 북서 궁전, F실(室), 남동쪽 입구; S실, 남서쪽 입구)>(2023)는 무엇이 다시 나타난 건가요?
2015년 ISIS가 신아시리아 왕국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명에 따라 기원전 9세기에 건설된 칼후의 북서 궁전을 파괴했어요. 현재의 이라크 도시인 님루드에 있는 유적지였죠. 전 그들이 파괴한 북서 궁전을 재현하고 싶었어요.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시리즈의 하위 시리즈로 ‘칼후의 북서 궁전’ 연작을 2018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이유죠. 이번에 바라캇에 전시된 것들은 가장 최근인 2023년 작품으로 칼후의 북서 궁전 중 F실 오른쪽 벽면과 남동쪽 입구를 따라 늘어섰던 다섯 개의 석판, 그리고 S실 남서쪽 입구 양쪽 두 개의 석판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궁전이 파괴되기 전의 모습을 담은 평면도에 따라 궁전 공간에서 우리가 재현한 벽의 정확한 위치를 가리키는 부제가 붙었죠.
얘기하다 보니 재현하다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다시 나타나다(reappear)’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겠네요. 그런데 그 재현 과정이 마치 뭔가를 치유하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치유라기보다는 일회성 트리트먼트에 가깝죠. 제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전부 종이라든지, 알루미늄 캔의 겉면 따위예요.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것들로 깊은 상처를 그냥 질끈 동여매는 거죠. 해결이나 치유가 아니라 그냥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데 더 가까워요.
마이클 라코위츠의 어머니 쪽 가족사진. 기사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모두 모계 쪽 할아버지를 뜻한다‘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칼후의 북서 궁전, S실, 패널 S-10)’, 2023‘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칼후의 북서 궁전, F실, 패널 F-11)’, 2023
‘반창고를 붙이는 일’이라는 표현이 재밌네요. 어제 작가와의 만남 때 한 강연 중에 자신의 조각이 컬러를 입고 돌아오는 것을 두고 ‘마치 피가 사라진 몸에 생기를 불어넣듯 색을 입혔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었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나타날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생각해봤어요. 전 사후 세계에서 돌아온 제 유령들이 컬러로 다시 돌아오는 걸 상상했죠. 제가 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좀비의 정반대였는지도 몰라요. 죽은 좀비들은 색이 빠진 채, 해체된 채 살아나지요. 전 ‘언데드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진 클리셰와는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까 말한 응급처치의 재료들이라는 점이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어머니와 할머니가 요리를 할 때 사용한 식료품의 포장지로 응급처치를 한다는 새로운 의미가 생기니까요.
아름다운 코멘트네요. 제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점에서 전 행운아죠. 그러나 방금 얘기한 걸 생각하면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혼을 제 작품에 불러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마음에 들어요.
한 다큐멘터리에서 당신이 오래전 이라크 공습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오, 생각나네요. 1991년이었죠. 당시 전 열일곱 살이었고 기타를 치고, 미대에 가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때였어요. 저희는 식사를 하고 있었고, TV에선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떠나온 이라크가 공습당하는 모습이 방송 중이었죠. 갑자기 어머니가 손가락을 튕기며 ‘헤이’ 하고 저와 형의 주의를 돌리더니 말씀하셨어요. “너희들 그거 아니? 뉴욕에는 이라크 식당이 없는 거?” 당시엔 엄마의 그 말이 참 수수께끼 같았어요. ‘엄마가 이라크 레스토랑을 열려고 하나?’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 깨달았죠. 어머니는 그때 미국에서 이라크의 문화는 ‘석유’와 ‘전쟁’을 제외하면 전부 비가시화되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제가 2003년부터 벌인 ‘Enemy Kitchen’이 바로 이 이야기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예요. 이라크는 석유와 전쟁만 있는 땅이 아니거든요. 어려서부터 제가 조부모님에게 들어왔던 이라크는 마법 같은 곳이었고, 너무도 아름다운 땅이었죠. 그것들이 다 망가지고 사라져버리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와 함께 뉴욕의 중고등학교 아이들에게 바그다드 레시피를 가르치기로 했죠. 제가 만들고자 했던 건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에너미 키친’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벌어지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한국 음식 중에 만두를 만드는 걸 상상해보세요. 이라크에도 그와 비슷한 커바이라는 음식이 있죠.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참을 각자가 맡은 작업에 집중해야 만들 수 있는 음식이죠. 이런 것들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만들더라도 그 식재료들이 뒤섞인 냄새, 그 맛,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들을 경험하며 낯선 문화 그 자체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 공간 자체가 이라크 레스토랑이 되는 거지요. 시카고에서 진행했던 에너미 키친의 푸드트럭 버전도 있었어요. 셰프는 이라크인을, 수셰프와 서버는 파병 경험이 있는 퇴역 군인들을 섭외해 이라크 음식을 팔도록 하는 프로젝트였죠. 서로 적이었던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권력 관계를 뒤집은 거기도 했죠. 미군이었던 사람들이 이라크인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했으니까요. 이 프로젝트는 코로나 때문에 잠시 멈췄는데, 이제 곧 다시 재개할 예정이에요.
할머니가 해준 얘기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아주 재밌는 얘기가 하나 기억나네요. 어릴 적 저는 숫자와 관련된 걸 배우는 데 정말 느렸어요. 심지어 시계도 보지 못했죠. 하루는 엄마가 저를 앉혀놓고 시계 보는 법에 대해 알려주려 하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죠. “그거 아니? 이라크에선 아무도 시계 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단다. 우리에겐 하루에 다섯 번 시간을 노래하는 탑이 있거든.” 그땐 정말 대단한 곳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때 할머니가 얘기한 게 모슬렘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모스크의 미너렛(minaret)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유대계라 모슬렘의 기도 시간을 따르지는 않았죠. 저희 할머니는 종이 치면 ‘오! 종이 치네. 문 닫기 전에 지금 쇼핑하러 가야겠다’라는 식으로 시간을 지켰던 거예요. 그 어려운 시기의 종소리에는 공존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거죠. →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김성룡
  • ASSISTANT 송채연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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