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더 베스트, 레더 팬츠, 송치 부츠, 레더 글러브 모두 굼허.
허 금 연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학부 시절 겐조 파리 맨즈 디자인팀에서 경력을 쌓고 굼허를 론칭했다. 스커트와 과감하게 커팅된 팬츠, 구조적인 부츠. 성별의 경계를 허문 옷으로 남성성, 더 나아가 젠더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브랜드’. 허금연은 굼허를 이렇게 정의한다. 굼허를 입은 사람 굼허의 옷은 사람에서 출발한다. 궁금하고 재미있는, 계속 보고 싶은 사람. ‘나는 왜 옷을 만드는가?’ 최근 들어 반복해서 떠올리는 질문이다.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답은 결국 하나다. 내가 꿈꾸는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옷만큼 쉽고 빠르게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옷을 사랑하게 된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솔직히 어린 시절 꿈꿨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실전이고, 현실이다. 매일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공장을 전전하며 거래처를 설득하는 일. 그 걱정으로 새벽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날도 있다. 그래도 아직은 굼허를 해야 하는 이유가 더 많다. 컬렉션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새롭게 만들고 싶은 옷과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다시금 머릿속을 꽉 채운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굼허의 옷을 입은 사람이 떠오른다.
불안 옷을 디자인하다 보면 확신이 서지 않는 순간도 있다. 이게 맞나 싶은 불안감.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기는 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임에도 그럴 때만큼은 사람을 최대한 많이 만나고 의견을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함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패턴사 마누엘과 인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방향은 없을지, 혹은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혼자서만 보고 듣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만들어 둔 틀에 갇히게 될지 모르니까. 늘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려 한다. 너무 쉽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그게 뭐든 별로 흥미롭지 않다. 학교에서도, 아니 그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배웠다.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 옷을 만드는 일뿐 아니라 삶의 여러 상황에 이 레슨을 적용하려 노력 중이다. 좋은 디자이너를 넘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품앗이 경남 진주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전교생은 50명 남짓, 내가 속한 학급은 여덟 명이 전부일 정도로 작은 학교에 다녔다. 논밭이 넓게 펼쳐진 동네,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작은 것이라도 흔쾌히 내어줬다. 서로 나누며 함께 커가는 기쁨을 그때 배웠다. 품앗이라고 표현하면 비슷할까?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과 영국에 머물 때에도, 그리고 브랜드를 운영하는 지금까지,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을 곁에 두려고 한다. 그게 한국 패션 신의 문화를 더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 거라고 믿는다.
동대문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브랜드를 운영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동대문이다. 런던이 완성도 높은 원단과 부자재, 유연한 문화와 오랜 전통을 잘 갖추고 있다면 동대문은 그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빠르고 강력하게 퍼지는 새 테크닉과 창의력을 자극하는 재료들… 건물 하나를 가득 채운 조그만 가게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언제나 바쁘고 정신없는 동대문만의 에너지에서 때때로 자극을 받기도 한다. 동대문 같은 곳은 전 세계를 다 뒤져봐도 유일무이할 거다. 해외에서 활동하며 서울을 찾는 디자이너 친구들도 정말 많아졌다. 최근엔 키코 코스타디노브 우먼을 이끄는 로라 & 디아나 패닝 자매가 왔는데 둘 다 서울에 완전 매료된 채 한국을 떠났다. 생산을 맡기러 오는 디자이너들도 적지 않고. 지금 패션 신에서 서울은 그야말로 가능성의 도시가 된 것 같다.
마누엘 2017년 학사 졸업 컬렉션을 준비하며 교수님 소개로 마누엘을 처음 만났다. 디올의 패턴사로 일하면서 퇴근 후엔 밤새 내 패턴 커팅을 도와주던 마누엘과 이제는 굼허를 함께 만들고 있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긴 시간을 함께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척 하면 척 하는 관계가 됐다. 마누엘은 1년에 두 번 한국에 온다. 시즌에 맞춰 두 달 정도 머무는데, 이번이 세 번째다. 마누엘 역시 서울을 좋아한다. 밤늦도록 술을 살 수 있는 편의점과 이른 새벽부터 뜨거운 빵을 살 수 있는 곳이라면서. 그와 함께한 지 6년, 내게도 꿈이 생겼다. 언젠가 나는 하우스 브랜드의 디렉터로, 마누엘은 아틀리에의 헤드로 만나는 거다.
다음 비전 지금까지의 컬렉션 피스로 굼허의 비전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제 넥스트 스텝을 내딛을 때다. 굼허만의 특별한 터치가 더해진 데일리 피스들을 준비 중이다. 굼허를 좋아해주는 모든 이들이 보다 쉽게 브랜드의 비전을 입고 즐길 수 있도록. 예술과 상업 사이를 능숙하게 줄타기할 줄 아는 브랜드로 굼허를 키워나가고 싶다. 내가 보고 자란 디자이너들이 그랬듯이.
블리자드와 협업한 윈드브레이커, 바이오 워싱 데님 재킷 모두 엑슬림.
김 도 희
콜드, 딘, 키드밀리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김도희는 똑똑한 옷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2021년 엑슬림을 론칭했다. 부드러운 색감과 날것의 워싱, 섬세한 디테일이 가미된 테크웨어로 한국 패션 신에 그들만의 에피소드를 써내려 가고 있다. 사실 스타일리스트 일을 시작한 건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6년 전쯤 뮤지션 콜드에게 크리스마스 공연 스타일링을 부탁받은 것이 시작. 대학을 자퇴하고 군대에 다녀온 뒤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앞으로의 인생을 고민하던 때였다. 돈이 될 것 같아 덥석 하겠다고 했는데, 그 일을 시작으로 운 좋게 딘과 키드밀리의 스타일링까지 맡게 됐다. 아주 자연스럽게 패션을 업으로 삼게 된 거다.
돈을 벌기 위해 패션을 시작했다는 사람은 처음이다.
전공은 패션이고, 부전공은 영화였다. 둘을 비교해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것 중 그나마 돈을 벌 만한 게 옷 같았다. 스타일리스트 일은 내게 굉장히 잘 맞았다. 양손 가득 새 옷을 사는 일도 마냥 즐거웠다. 매일 수많은 옷을 보고 만지는 일은 그 자체로 공부가 됐다. 어떤 옷이 좋은 옷인지,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인지, 어떤 옷에 어떤 소재를 써야 하는지… 지금 엑슬림만의 색감과 디테일 모두 그 시절이 없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거다.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을 뒤로하고 엑슬림을 론칭한 이유는 뭔가? 만들고 싶은 옷이 있었나?
기본에 충실한, 거짓이 없는 옷. 군대에 가기도 전 막 20대가 되었을 때부터 밀리터리 베이스의 옷들을 좋아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다양한 나라의 군복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을 정도로. 군복처럼 특수한 목적을 가진 옷은 그 나라의 특징을 가장 잘 담고 있어서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 기후나 문화에 맞춰 필요한 기능을 덧붙이기 때문에 디테일과 원단, 부자재도 저마다 다르다. 엑슬림의 기반이 되는 테크니컬 디테일도 대부분 군복에서 따왔다.
그렇다면 디자이너 김도희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브랜드는?
단연 나이키. 기능을 담는 데 충실한 브랜드다. 눈이 반짝거릴 정도로 새로운 디자인과 트렌디한 감성이 패션을 화려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고 나 또한 가끔은 그걸 좇으려 하지만, 결국 본질만큼 중요한 건 없다.
짧다면 짧은 기간에 새로운 장르를 이끄는, 한국 브랜드를 이야기할 때 손에 꼽히는 브랜드가 됐다. 테크웨어나 고프코어로 분류되는 수많은 브랜드와 엑슬림은 어떻게 다른가?
완성도. 엑슬림의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부적으로 세분화된 생산 인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는 편이어서 브랜드가 몸집을 키워갈 때쯤 그걸 보완해줄 사람부터 찾았다. 원대한 계획이 있던 건 아니고, 퀄리티와 편리성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진 거다. 요즘 우리 팀은 비비드한 컬러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몰두하고 있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연스럽고 오묘한 색감을 살리기 위해 수십 곳의 공장을 전전하고 수십 번의 워싱 테스트를 한다. 몇 번이고 손을 물들이고 기꺼이 실패하면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인스타그램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당신이 팀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인다.
우리 팀은 12명이다. 요즘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시간이다. 무엇을 보고 듣고 읽었는지, 그 잠깐의 일상적인 대화가 때로는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데 큰 단서를 주기도 한다.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 다양한 의견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가며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이 재미있다. 엑슬림의 에피소드 모두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컬렉션이 아닌 에피소드라는 타이틀로 브랜드를 전개하고 있다. 부전공한 영화의 영향인가?
맞다. 여전히 영화를 사랑한다. 마음 한편에 언젠가는 내 이름을 건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 다큐멘터리도 좋을 것 같고. 엑슬림을 시작한 뒤로 내 일상은 늘 작업실에서 시작해 작업실에서 끝나는데, 영화를 볼 때만큼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부담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된다. 특히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지겹지 않다. 인셉션, 테넷, 인터스텔라….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전부 그의 작품이다. 곧 개봉하는 〈오펜하이머〉도 너무 기대된다.
브랜드의 대표이자 디자이너로서 한국은 살 만한가?
빨라서 재밌고 빨라서 어렵다. 물론 그 속도감이 한국을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나라로 키운 건 사실이지만, 늘 뒤처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아직까지는 그 흐름에 맞춰 열심히 살고 있다. 엑슬림도 나도 시기를 잘 만난 것 같다. 이런 좋은 흐름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이번 인터뷰에 참여한 김지용, 문인석, 임동준, 그 외 모든 디자이너의 작업물은 내게도 좋은 자극제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중하고 발전하며 패션 신에 좋은 에너지를 불어넣었으면 한다. 니고와 준 다카하시가 그랬고, 알렉산더 맥퀸과 헬무트 랭, 드리스 반 노튼이 그랬던 것처럼.
얼마 전 블리자드와의 협업도 반응이 좋았다. 새롭게 당신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것이 있나?
블리자드는 풍부한 지원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좋은 회사였다. 실험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즐기면서 했고 덕분에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다. 게임 스킨을 만들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다음 도전 과제는 엑슬림만의 향을 만드는 거다. 시각, 후각, 청각적 요소를 잘 갖춘 브랜드로 엑슬림을 키우고 싶다. 공간에 들어섰을 때 우리만의 향이 나면 좋을 것 같아서 오프라인 스토어도 준비 중이다. 딱 2년만 기다려 달라.
울 재킷, 메탈릭 레더 스커트, 스터드 백 모두 웰던. 스니커즈 아크네 스튜디오.
권 다 미, 제 시 카 정
권다미와 제시카 정은 2014년 청담동에 편집숍을 열었다. 이름은 ‘레어마켓’. 그들만의 심미안으로 그동안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브랜드를 누구보다 빠르게 들여오는 곳이었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자크뮈스와 마린세르가 대표적이다. 레어마켓의 이름을 달아 크고 작은 굿즈들을 출시하던 그들은 2019년, 웰던을 론칭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역사 속 예술을 재해석하는 ‘웰던’스러운 옷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는 웰던을 한국의 테일러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펑크적인 디테일과 과장된 실루엣, 동시에 잘 짜인 테일러링. 그들은 클래식한 형태의 의복에 정형화되지 않은 색채를 덧씌우며 한 단계씩 천천히 그들만의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윈드브레이커, 봄버, 슬리브리스 푸퍼 모두 커마웨어.
문 인 석
일본에서 패션 컨설턴트로 활동하던 문인석은 2021년 연인 최발과 함께 커마웨어를 론칭했다. 최근 첫 컬렉션을 통해 그들만의 하드웨어 디테일로 주목받기 시작한 커마웨어의 옷에는 테크웨어와 스트리트, 기모노와 헬무트 랭의 정신이 전부 녹아 있다. 종종 그런 오해를 산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밖에 모르고 살았다. 부모님에겐 말 잘 듣는 아들. 매일이 학교, 학원, 과외였다. 그랬던 내가 일본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거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해야겠다.
말 그대로 패션 오타쿠가 됐다. 좋은 옷을 갖춰 입고 길거리를 걸으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헬무트 랭이나 릭 오웬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다니던 나는 패션과 거리가 먼 우리 과에서 늘 별종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패션 신에서 프리랜스 컨설턴트로 일을 시작했다. 바잉이 필요한 곳에는 바이어로, 프로덕션 업무가 필요한 곳에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이런저런 일을 하며 크루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경험이 지금 커마웨어를 운영하는 데 튼튼한 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 옷을 좋아하던 시기에는 취향을 찾는 데 몰두했고, 시야가 넓어진 뒤에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옷을 연결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내게 필요한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커마웨어는 그동안 경험한 옷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퀄리티의 옷을 만들고 나를 좋아해주는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어찌 보면 조금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한 브랜드다. 론칭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내가 그리는 것을 직접 손에 쥐어야 하는 사람이라는걸.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브랜드를 론칭한 이유가 있나?
학창 시절을 보낸 미국에서도, 20대를 보낸 일본에서도 나는 결국 이방인이었다. 한국이 그립기도 했고, 브랜드 론칭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는 한국 시장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제 막 K-컬처가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했고. 브랜드를 빠르게 성장시키는 데에 한국만큼 파급력 있는 곳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어려움도 많다.
아무래도 한국의 문화는 일본과 너무 다르니까.
브랜드를 준비하는 1년은 거의 공장에서 살았다. 일본에서 배운 것 중 브랜드를 운영할 때 가장 도움 되는 게 있다면 현장을 홀대하지 않는 문화다.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학교를 나와도 신입 사원은 무조건 현장에서부터 시작이다. 건설 회사라면 건설 현장, 애널리스트라면 은행 창고, 바이어라면 세일즈부터 하는 거다. 너무 당연한 일본의 장인정신 문화와 한국의 빠르고 효율적인 시스템, 미국의 자유분방함… 늘 이방인으로 살아온 내게 쌓인 점들을 선으로 이어 커마웨어만의 색을 만들고 있다. 항공 점퍼에 킨츠키적 요소를 더한다든지, 딱 떨어지는 테일러링 재킷에 기모노의 디테일을 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커마웨어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브랜드가 있다면?
단연 헬무트 랭. 지금도 헬무트 랭과 라프 시몬스, 피비 파일로 시절의 셀린느를 컬렉팅한다. 그들의 옷을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매일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과하지 않은 우아함. 그들이 가장 주목받았던 시기의 옷은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 공부가 된다. 디자인을 하다 막힐 때면 다시금 그 아카이브를 들여다보며 내가 놓치고 있는 지점을 찾는다.
론칭 2년 째, 지금의 커마웨어는 처음과 조금 다르다.
브랜드 론칭을 결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커마웨어가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였다. 이건 철저한 사업이니까. 그 기틀이 잘 갖춰지면 진짜 내가 꿈꾸는 커마웨어를 더 좋은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타협하지 않기 위해 그보다 좀 더 작은 타협을 한 셈이다. 그래서 처음엔 커마웨어다우면서도 접근성이 좋은 옷을 만들었다. 곧장 판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드롭 형식으로 옷을 발매했고. SNS 속 문인석을 좋아해주던 이들이 커마웨어에도 관심을 가져주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이제 어느 정도 기틀을 마련한 것 같아 이번 시즌엔 처음으로 컬렉션도 준비했다. 아직 이것저것 시도하는 단계다.
이번 컬렉션에서 유독 마음이 가는 피스가 있다면?
우리의 하드웨어를 적용한 하드웨어 푸퍼 베스트. 동그란 스냅 하나에서 시작해 일본의 전통 형태를 덧붙이는 식으로 디자인을 완성했다. 커마웨어를 한 단계 성장시킨 피스다.
집에 고양이가 두 마리 있다. 슈크레와 브륄레. 카페나 레스토랑을 찾아다닐 정도로 디저트를 좋아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좋은 공간에서 언젠가 오픈할 스토어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기분 좋은 커피 향과 맛있는 디저트, 편안한 옷과 안락한 가구로 채워진 곳. 브랜드 이름처럼 편안하게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거기서는 잠을 자도 좋다.
편안함, 우아함, 희망. 앞의 두 단어는 우리 옷의 방향성, 나머지 하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나는 패션도, 디자인도 전공하지 않은 그저 옷을 좋아하는 학생일 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몸으로 부딪혀 만든 커마웨어를 보고 누군가는 희망을 얻어 가면 좋겠다. 비전공자도 이정도의 작업물로 신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파리에서 쇼를 하고 싶다. SNS나 인터넷으로 옷을 보여줄 수 있는 수십 가지 방식이 생겼지만, 나를 가슴 뛰게 만들었던 런웨이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 음악과 모델, 옷의 움직임, 공간의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져 발산하는 압도감은 휴대폰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니까. 여전히 발렌시아가 같은 브랜드의 쇼를 보고 있으면 그런 결심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