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니스 코트 위에서도 스타일을 포기할 수 없다면, 하지만 또 너무 틀에 박힌 룩은 지겹다면 지금 가장 추천하고 싶은 브랜드는 팔메스다. 편하고 예쁘고 만듦새도 좋은 데다 일상에서도 충분히 입을 수 있을 만큼 현대적이니까. “퍼포먼스를 강조하는 브랜드는 기능성에만 관심이 있고, 전통적인 브랜드는 테니스의 유산을 더 중시했어요. 제가 원하는 스타일은 찾기 힘들었죠.” <킨포크>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니콜라이 한손(Nikolaj Hansson)은 우아하면서도 동시대적인 테니스웨어를 만들고자 2021년 코펜하겐에서 팔메스를 론칭했다. 정교한 테일러링, 고품질 친환경 소재, 세련된 디자인… 스포티하면서도 포근하고, 캐주얼하지만 동시에 우아한 테니스웨어. 이들이 만든 스포츠 재킷이나 피케 폴로, 귀여운 스웨트셔츠와 플리스 후디, 테니스 스웨터를 보면 다른 브랜드와 구별되는 지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듀런 랜팅크는 패션의 순수한 예술적 가치를 추앙하는 동시에 지속가능성을 외치며 전통적 규범에 도전하는 디자이너다. 그의 디자인을 관통하는 주제는 ‘Repurposing’, 즉 어떤 물건의 이용 목적을 바꿔 가치를 높이거나 되살리는 것이다. 처치 곤란하게 쌓여가는 하이엔드 레이블의 재고를 자르고 붙여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 이를테면 루이 비통 모노그램 캔버스와 오래된 트렌치코트로 팬츠를 만들거나 빈티지 매킨토시 코트를 과장된 아워글라스 실루엣 코트로 재탄생시키는 식이다. 재조합 방식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으며 각각의 세부 역시 완성도가 높다. 2019 LVMH 프라이즈와 2022 안담 프라이즈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거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와 V&A 뮤지엄에 영구 소장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컬렉션에선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개발한 나일론 소재로 아방가르드한 실루엣의 룩을 선보이는 중.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 테크웨어의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올리 샤인더는 작년에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스물세 살의 신예 디자이너다. 졸업과 동시에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지원으로 컬렉션을 선보였고 센스, 머신에이, 트레비앙에 입점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의 옷을 쿨하고 섹시한 테크웨어로 평한다. 다른 테크웨어와 어디가 다른지, 언뜻 봐서는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코듀라 나일론과 지오메트릭 패널, 스냅 버튼 같은 테크웨어의 문법 사이사이에 파격 요소를 숨겨 놓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한 절개나 살갗을 은근하게 내비치는 시어 메시가 그 예. 엉덩이 일부를 과감하게 노출시킨 브리프 같은 아이템도 있지만 대부분 정도가 은밀해서 오히려 페티시적으로 느껴진다. 올리 샤인더는 관능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 후드바이에어(HBA)의 공동 창립자 라울 로페즈(Raul Lopez)는 2011년 후드바이에어를 떠났다. 그리고 2017년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나열한 루아르를 설립했다.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주목받았지만 아쉽게도 매출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19년을 끝으로 브랜드를 중단했다. 그런데 2022년 봄, 루아르가 뉴욕 패션위크에 다시 화려하게 복귀했다. 브루클린 부시위크 주차장에서 열린 쇼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결과도 좋았다. 기립박수가 나왔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새로운 루아르는 퀴어 코드와 그가 태어난 도미니카공화국의 문화, 1980년대 스타일을 절묘하게 조화시켰고, 과장된 테일러링과 스트리트 웨어의 결합, 타이 스타일링, 동그란 핸들의 안나 백으로 고유한 시그너처를 만들었다. 특히 트로이 시반과 두아 리파가 즐겨 들며 유명해진 안나 백은 그에게 2022 CFDA 올해의 액세서리 디자이너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라울 로페즈에게 지난 2년의 공백은 단순한 도피가 아닌, 창작의 열정을 채우는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 모델과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던 디에고 비야레알 바구젤리(Diego Villarreal Vagujhelyi)는 어느 날 덤벨을 만들기로 했다. 어린 시절, 장난감 대신 갖고 놀던 덤벨은 그에게 무척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대상이었다. 누구보다 더 멋있고 섹시한 덤벨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저절로 손을 뻗게 될 만큼 근사하고, 오래 쥐고 있어도 쓸리거나 미끄러지지 않는 기능적인 형태. 그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형상을 묵직한 스틸로 제작하고, 완성된 20파운드 덤벨 두 개를 고급스러운 나무 케이스 안에 담았다. 이 덤벨의 아름다움을 일찍이 알아본 건 루도빅 드 생 세르넹이었다. 그는 바구젤리에게 2024 S/S 컬렉션의 주얼리 디자인을 부탁했고 마침내 지난 6월 그 결과물이 세상에 공개됐다.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핸드 브레이스와 네크리스, 젠틀하게 목을 죄는 초커… 이보다 더 관능적이고 페티시적인 주얼리는 흔치 않다. 앞으로 바구젤리가 선보일 컬렉션이 기대되는 이유다.
▶ 키코 코스타디노브와 모란모란 갤러리가 함께 전개하는 브랜드. 시작은 2019년 11월 LA 모란모란에서 열린 전시 <OTTO 95.8>이었다. 키코는 이 전시를 통해 클래식 웨어와 유니폼을 콜라주한 난해한 피스들로 세상에 혼재된 문화적 다양성을 조명했는데, 1년여의 준비를 거쳐 이를 확장한 게 바로 오토958이다. AI 모란을 앞세우는 오토958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와 문장,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미지로 소통을 시도한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비주얼과 완전히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방식. 사실 이 프로젝트는 인터넷 세상에서 허구의 콘텐츠가 얼마나 자유롭게 확장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일종의 실험에 가깝다. 세상에 단 한 피스밖에 없는 럭비 저지를 비롯해 양말, 캡, 키링 등을 시즌 상관없이 산발적으로 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