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art 1. 세계각지에서 보내온 추천 "한국어로 번역되어야 할 올해의 책"
해외에 거주하는 책 좀 읽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2023년에 당신의 거주국에서 출간된 책 중 한국어로 번역해 내야 할 책은 무엇입니까?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트래픽 전장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 기록한 트래픽 전쟁사
추천인 : 박상현 나라 : 미국 < Traffic >
벤 스미스(Ben Smith) 펭귄 프레스(Penguin Press)
미디어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2010년대는 세상이 광속으로 변하던 시절이었다. 신문, 방송부터 출판, 광고업까지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업계가 거대한 온라인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인터넷이 199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2010년대라고 해서 이전 10여 년과 특별히 다른 게 있었을까 싶지만, 달랐다. 미디어가 느낀 변화는 201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수십 년 동안 ‘발행 부수’와 ‘시청률’이라는 지표만 바라보던 미디어가 ‘트래픽’이라는 새로운 지표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이다.
미디어 기업들이 그걸 스스로 깨우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소셜네트워크’라고 부르던 기업들이 '소셜미디어'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미디어’를 자처하며 레거시 미디어의 밥그릇을 빼앗으려 한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미국의 경우 뉴욕 타임스처럼 버틸 힘이 있던 큰 기업들은 벼랑 끝에서 대변신을 시도하며 온라인에서 돈 버는 방법을 찾았지만, 많은 중소 신문사는 줄줄이 문을 닫아야 했다. 지금 온라인에서 시작한 리테일 거인들이 오프라인 중심의 레거시 유통회사들을 잡아먹는 현상이 미디어에선 10년 전부터 벌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지배하는 온라인에서 모든 미디어가 굶은 건 아니다. 공룡이 멸종하는 세상에서 작은 포유류가 세력을 넓힌 것처럼, 대형 미디어가 맥을 못 추는 세상에 최적화된 미디어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온라인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고커, 허핑턴 포스트, 버즈피드, 드러지 리포트, 브라이트바트 등 2000년대에 블로그 등의 형태로 시작된 온라인 매체들은 대형 언론사가 소셜미디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온라인을 점령한 바 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버즈피드 뉴스의 편집장을 지낸 벤 스미스의 책 <Traffic>이 다루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수십억 달러의 바이럴을 위해 경쟁하는 천재, 경쟁 그리고 망상’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트래픽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싸웠던 온라인 매체들의 생생한 전쟁사를 담고 있다.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던 저자의 기록이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보로 이뤄진 인물사전 역할도 한다. 전설적인 닉 덴턴, 조나 페레티, 아리아나 허핑턴 같은 사람들이 유명해지기 전 모습(가령 아리아나 허핑턴은 ‘블로그’와 ‘블로그 포스트’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뒷얘기)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지만, 이 트래픽 전쟁의 아귀가 사실은 지리적으로 무척 가까운 곳에서 항상 만나던 한 줌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재미 위주의 버즈피드를 만든 페레티, 진보적인 허핑턴 포스트를 만든 허핑턴, 가십 기사 중심의 고커를 만든 덴턴 그리고 지금은 극우 언론의 대명사가 된 브라이트바트를 만든 앤드루 브라이트바트가 한동네, 한 사무실, 같은 파티에서 만나는 모습을 보면 픽사의 <벅스 라이프> 마지막 장면-화면이 줌아웃되면서 모든 소동이 개울 속 작은 모래섬에서 일어난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이들이 각자의 미디어를 만들고 실험하던 순간이다. 새로 생겨나는 온라인 미디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시절 여러 창립자들이 자기만의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수행했고 실패하고 성공했다. 그만한 이유는 있겠지만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실리콘밸리의 성공 사례를 빨리 배워 적용하는 한국적인 풍토와 자신만의 가설을 세우고 실패해본 사람들의 경험은 전혀 다르다. 이제 세월이 흘러 10년 전 자존심을 접고 버즈피드 사람들에게 트래픽을 모으는 방법을 배우던 뉴욕 타임스는 이제 확실한 수익을 내며 온라인의 원톱 언론사로 재등극했다. 반대로 벤 스미스가 있던 버즈피드를 비롯한 온라인 매체들은 맥을 못 추고 있다. 이 역사의 순환마저도 아무도 방심할 수 없는 냉혹한 경쟁 시장 속에서 진정한 강자가 만들어진다는 교훈으로 읽힌다.
WHO’S THE WRITER? 박상현은 <오터레터>의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테크와 미디어, 문화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와 내면의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세대를 위한 자전적 성장소설
추천인 : 마르탱 쿨롱 나라 : 프랑스 < La prochaine fois que tu mordras la poussière >
파나요티 파스코(Panayotis Pascot) 스톡(Stock)
솔직히 말하자. 나는 내가 소개하기로 한 이 책에 좀 개운치 못한 느낌이 있다. <에스콰이어 코리아>는 2023년 프랑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책 중 한국의 상황에서도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책을 물었다. <La prochaine fois que tu mordras la poussière>가 베스트셀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이 책이 출간된 8월 말 이후의 통계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의 입지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극히 젊은 작가가 낸 첫 소설이 이런 유명세를 누리는 게 단순히 책의 품질로만 설명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65만 권이 넘게 팔렸다는 이 기록적인 수치가 순전히 문학적 성취인지는 의심스럽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책을 논하기 전에 일단 작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으니까.
파나요티 파스코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 책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의 글은 최근에야 알려졌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프랑스에서 아주 유명했다. 불과 17세에 그는 유명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의 고정 칼럼니스트가 되었고 전국에 방송되는 TV 프로그램 <코티디엥(Quotidien)>의 고정 출연자가 되었다. 매일 아침 수백만 명이 시청하는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에서 그는 코미디언과 배우로서의 재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젊은 얼굴과 명랑한 목소리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나 역시 그의 유머를 즐긴 사람 중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인기를 구가하던 그는 어느 날 사라졌고, 스탠드업 코미디에 가진 열정을 풀어내기 위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그의 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유머였다. 그가 어떤 소셜네트워크를 시작하든 그 계정이 금방 팔로워로 가득 차듯, 공연장도 늘 꽉 들어찼다. 모두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농담을 술술 풀어내는 이 청년을 원했다. 넷플릭스도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유머와 크나큰 성공 뒤에는 예상 외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파나요티 파스코라는 이름은 프랑스 전체에 알려졌으나 정작 그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파악하고,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파리 교외의 작은 집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10대 소년이 갑자기 범국가적인 수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는 건 그의 내면에 큰 영향을 안길 만한 사건이다. 더구나 파나요티 파스코는 수많은 감정을 자기 속으로만 파묻어두고 있었기에 이 흉터는 더욱 깊게 남았다.
<La prochaine fois que tu mordras la poussière>는 이런 정체성에 대한 탐색과 젊은 날의 불안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책이며, 그렇기에 오히려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짙은 어둠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흥미로운 픽션일 수 있는 내러티브를 택한 것이다. 이 책은 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삶의 즐거움과 성공에 대해 인스타그램에 끊임없이 포스팅을 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본인들이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는 행복을 느끼는 재능은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한 소년이 성인이 되는 힘겨운 과정을 거칠게, 거의 폭력적이라 할 정도로 드러내 보인다. 소년은 육체적, 감정적 사랑의 방식에서 정체성을 찾아가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소년의 아버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10대 소년에게는 큰 충격이어야 할 일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른 모든 감정이 그랬듯 이 역시 그에게 깊이 와닿지 않고 그저 흘러가버린다. 하지만 스스로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모든 감정이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소년은 그로 인해 불면증을 겪고 결국 글을 쓰게 된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건, 글이 나오는 건 주로 밤이다. 나는 어릴 때 사람들이 밤에만 죽는다고 믿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고, 그게 틀렸다고 입증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밤에 혼자 있으면 나는 그저 존재에 불과하고, 나는 내가 존재라는 사실이 불편하다. 존재한다는 건 내게 복잡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방금 느낀 사실들을 적어 내려가면 조금은 안심이 되고 진정되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에는 확신이 든다. 그때 느꼈던 걸 지금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찰은 형식과 내용 모두 날것에 가깝다. 미성숙하다거나 유치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스타일은 심플하다. 하지만 이 책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내는 지점은 이렇게 종종 어설픈 방식으로 드러나는 고백이 아니다. 지나치게 스스로의 이미지를 파악하는 세태, 소셜네트워크의 헛된 즉각성, 외모 지상주의로 점철된 시대에 신물이 난 그가 그에 대해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파나요티 파스코는 굉장히 자주 스스로를 인식하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고, 스스로가 영화 장면 속에 있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 나르시시즘이 그로 하여금 인생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대신 ‘좋아요’를 좇고 사회의 룰만을 따르게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침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찾게 되는 여정도 아니었다. 상당히 의심스러운 이 책의 문학적 가치 역시 아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외적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의 현실 내면 사이의 깊은 괴리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곧 30대가 될 특정 세대에 대한 묘사였다. 우리는 그 두 가지가 이렇게 심하게 나뉘지 않고, 덜 전형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모든 다양성에 열려 있는 자세가 삶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이렇게 책이 잘 팔릴 일일까? 어쩌면 그 사실 역시 이 책이 던져주는 생각해볼 만한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WHO’S THE WRITER? 마르탱 쿨롱은 프랑스 태생으로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리랜스 에디터다.

빼어난 상상력과 낭만적 이야기 속에 깃든 시대와 사회에 대한 단단한 고찰
추천인 : 쁘랍다 윤 나라 : 태국 < divine Being >
지다눈 루에앙피안사뭇(จิดานันท์ เหลืองเพียรสมุท) 샐먼북스(Salmonbooks)
단편소설집 <divine Being>의 작가 지다눈 루에앙피안사뭇은 현재의 태국 문단에서 아주 특이한 존재다. 그녀는 불과 22세였던 2017년에 디스토피아를 그린 이야기 모음 <สิงโตนอกคอก>(우리에서 풀려난 사자)를 발표해 명망 있는 동남아작가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날렸으며, 소위 ‘순수문학’ 커뮤니티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점잖은 작가나 독자들이 마뜩잖아 하는 아주 상업적인 ‘영 어덜트 판타지’와 ‘야오이(BL) 라이트 노벨’도 지속적으로 써왔다. 내게는 이런 그녀의 대조적 활동 자체가 기존 태국 문단에 인상적이고 신선한 움직임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지다눈의 최신 단편집 <divine Being> 역시 ‘SF/판타지’ 장르로 마케팅되고 있지만, 사실 특정 장르로 규정하기 힘든,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태국의 판타지 픽션 소설들이 대부분 그렇듯 지다눈의 여러 이야기들 역시 작가가 상상해낸 세상을 배경으로 외국인 이름을 단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문학이 그 사회의 현실적 삶을 반영하거나 묘사하기를 원하는 전통주의자들은 태국 장르문학의 이런 트렌드가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다눈은 장르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이러한 테크닉을 활용하면서도 태국 내의 이슈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배경과 캐릭터는 판타지같이 보이지만 그 속의 내러티브는 현실과 아주 가깝게 닿아 있다는 얘기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곳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현재의 정치적 복잡성, 사회적 이슈의 주제가 모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SF 작품들은 보통 대부분 미래 세계나 기술 발전보다는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는 인간 경험에 대한 실존적 질문, 아주 흔하고 오래된 질문들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판타지 형태로 실존적 개념을 탐구하는 지다눈의 소설은 독특하면서도 이 전통에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divine Being>은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처음 나오는 작품인 ‘평범한 세계 퀘이사’는 모든 사람이 애초에 여성으로 태어났다가 28세에서 32세 사이에 남성으로 변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계에선 변화 기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물학적으로 두 가지 성별을 모두 경험한다. 그건 연인들이 이성으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간, 임신할 수 있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는 설정이기도 하다. 24세에 28세의 남성과 연애를 시작한 여성에게는 4년 정도의 시간이 남은 셈이다.
두 번째 작품인 ‘시간여행자 브레이크 포인트 2020’은 사람들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지만, 어느 시대로 가든 특정 장소로만 갈 수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한 낭만적인 이야기다. ‘노드(node)’라고 불리는 이 장소는 시간 여행의 도착 플랫폼 역할을 한다. 각 노드마다 영원히 그해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사는 관리인이 있다. 그해가 지나도 관리인은 똑같은 해를 다시 살아야 한다. 시지프스 신화처럼. 2020년의 노드는 태국 방콕의 어느 집이고, 관리인은 로차네라는 젊은 여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2020년은 코로나19 팬데믹의 해였고, 이 이야기는 명백히 전 세계를 휩쓸었던 끔찍한 시기에 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풍자다. 독자가 로차네와 그녀의 달콤쌉쌀한 관계를 알게 되고 나면 이후 소설의 SF적인 요소는 거의 무의미해진다. 2020년은 태국의 젊은이들 상당수가 반독재 시위에 참가한 해였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다.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동시에, 폭발적으로, 연달아 일어났다. 이 소설은 태국의 역사적인 정치 전환점에 대한 기록으로도, 그에 대한 지다눈의 견해로도 읽힐 수 있다. 당시 그녀 자신도 시위를 지지했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이 두 단편의 예시만으로도 <divine Being>이 어떤 책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이고 궁극적으로 로맨틱하다. 몇 작품에 이르러서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인 실험(예를 들면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도 엿보인다. 친숙한 플롯 비틀기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작품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해외 독자들이 거의 볼 수 없었을 태국 문학의 어떤 면을 갖고 있다고 본다. 강한 상상력을 품은 감성. 이 책을 올해 태국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으로 꼽는 건 그런 이유다.
WHO’S THE WRITER? 쁘랍다 윤은 주로 소설 및 시나리오, 에세이를 쓰는 태국의 작가이자 시각 디자이너, 잡지 편집인이다.

천체물리학 서적이 이탈리아 베스트셀러 서적 3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
추천인 : 알레산드로 파시 나라 : 이탈리아 < Buchi Bianchi >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아델피(Adelphi)
나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아직도 우리가 가진 기존의 생각이나 의식을 뒤흔들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적어도 흥미를 끌거나, 열정을 일으키거나, 질문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책이? 책이란 작가와 독자라는 존재의 단편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작은 여행인 것처럼, 결국 나는 책을 통해 늘 무언가를 배우기를 갈망한다.
올해 출간되어 이탈리아 베스트셀러 서적 3위 자리를 오랜 시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Buchi Bianchi>는 대중에게 그리 친숙한 이야기를 품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거의 과학적 사고방식이 단절된 상태나 다름없는 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1956년에 베로나에서 태어난 이 이론물리학자는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이론물리학 센터의 교수이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등의 책을 쓴 (둘 모두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이다. 그리고 그의 근작인 <Buchi Bianchi>의 이례적 성공은 이런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또 삶의 지평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강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것. 우리는 오직 과거만 알 수 있으며 미래는 알 수 없는 존재지만 늘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열망들에 과학은 대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불멸의 존재도 아니고 천체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닌 우리가 어째서 블랙홀과 화이트홀 이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걸까? 무수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를 둘러보기 위해 직접 가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블랙홀 이론에 도달했던 방법이자 화이트홀에 대한 조각들이 탄생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화이트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블랙홀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로벨리는 이렇게 썼다. “별은 자신을 구성하는 수소를 연소해 헬륨으로 변환한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수소는 소모되어버리고 더 이상 연소되지 않는 헬륨과 잿덩이들로 변하며, 별은 중력의 영향으로 부서지고 만다. 큰 별의 중력은 엄청나며, 아무리 단단한 암석조차도 그 압력을 견딜 수는 없다. 별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렇게 별은 지평선 속으로 가라앉게 되고, 블랙홀을 형성한다.” 블랙홀의 지평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지평선을 넘어서게 된다면 마치 아주 길고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긴 깔때기에 빠진 것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깔때기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 그 밑바닥에 블랙홀을 형성한 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백만 년에 걸쳐 이뤄지는 현상이지만 정작 별들에게는 고작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이 흐른 것과 같다. 하지만 블랙홀이라는 공간이 무너진다면 시간도 끝이 난다. 그런데 이게 과연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로벨리와 그의 미국인 친구 할(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인물이다)은 이 ‘블랙홀의 종말’이라고 이름 붙은 어둡고 섬찟한 가설에 반론을 제기한다.
블랙홀처럼 좁고 긴 깔때기에 만약 별이 아니라 물체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체는 이리저리 튕겨 다니다 결국 밖으로 나오게 된다. “만약 블랙홀의 삶 전체를 촬영한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역재생한다면 무엇이 보일지 상상이 되는가? 화이트홀이 보인다.” 블랙홀은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구멍이고, 화이트홀은 나올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는 없는 구멍이다. 블랙홀은 물질을 삼키고 화이트홀은 물질과 에너지가 나타나는 영역이다. 우주는 화이트홀에 의해 생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블랙홀의 존재는 관측으로 확인되었으나, 화이트홀의 존재는 아직 확인된 적이 없을 뿐이다. (우리가 블랙홀을 관측할 수 있게 된 것도 실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가설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로벨리는 주저 없이 독자들을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 양자역학으로 안내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만 이해하면 충분하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일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볼랙홀의 끝에 다다르더라도 물질은 파괴되지 않고 되돌아온다는 것. 로벨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 화이트홀 이론이 암시하는 바와 그 힘을 이해하는 것은 종교나 무신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흔히 블랙홀에 비유한다. 블랙홀이라는 깔때기에 빠져든 별처럼 떨어지기만 하다가 결국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물리학의 최전선은 반론을 제기한다. 수백만 년 동안 블랙홀 안에서 추락한 별조차 ‘무’의 공간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며, 그 시간이 파괴되지는 않는다고. 그저 튕겨져 되돌아올 뿐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로벨리는 이 책을 은유로 마무리한다. 매일 저녁 일몰을 바라보며 태양이 바다에 잠기는 것이라 믿어온 늙은 어부에게 ‘그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며 지구 반대편에 태양은 여전히 떠 있다’고 설명하면 어떻게 될까? 어부는 미쳐버리고, 그의 세계는 무너지게 될까?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습득하고 도약하면서도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이제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안 채로 태양이 바다 뒤편으로 사라지는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이것이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과학은 일상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위도’ 개념을 이해하면 생각보다 덜 춥다고 느낄 수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그리고 서울과 밀라노는 같은 위도에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밀라노와 이 글을 받아볼 도시 서울이 비슷한 위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 해도 크게 잘못될 것은 없겠지만,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때 분명 우리 세계와 삶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계들이 생겨날 것이다.
WHO’S THE WRITER? 알레산드로 파시는 이탈리아 밀라노 기반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다.

글자 대신 이모티콘과 밈을 보내는 시대를 위한 시의적절한 안내서
추천인 : 스테판 윌슨 나라 : 영국 < Emoji Speak >
지은 카이어(Jieun Kiaer) 블룸즈버리(Bloomsbury)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한 이후,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콜 포비아’ 증상일 것이다. 영국 전화 응답 서비스 업체인 ‘페이스 포 비즈니스’가 2019년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76%가 전화벨 소리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밝혔으며, 올해 미국 CBS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90%가 전화 통화를 불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잘은 모르지만, 스마트폰의 보급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으니 IT가 발달한 한국의 상황도 아마 비슷할 것이라고 본다.
CBS는 문자 메시지보다는 전화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는 편이 신뢰를 쌓고 나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첨언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같은 이유로 ‘베스트셀러’는 아닐지언정 이 책이 더 넓은 세상에서 읽히길 바란다. 지금의 문자 메시지는 단순히 ‘글자’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그것, ‘이모티콘’ 덕분에 메시지만으로도 우리는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모티콘이나 밈과 같은 시각적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등장한 것은, 우리가 의사소통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책은 세계적인 맥락에서 이모티콘과 밈의 사용에 대한 논의를 제공한다. 스마트폰 시대, 대화의 한 방식으로 이모티콘 그리고 밈의 사용을 제시한 저자는 이모티콘과 같은 이미지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지평으로 삼아 ‘이모지 스피크(Emoji Speak)’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책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현대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매력적인 작은 심벌’을 인지하도록 진화했다. 이런 변화는 약간의 속도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증가하고 있는 요즘, 이모티콘은 이에 대한 대처를 간편하게 해준다. 문자만으로 대화하던 시대를 넘어 강한 설득력을 가진 이모티콘과 이미지가 커뮤니케이션의 대부분을 자리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이모티콘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며,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간단히 아우르는 기능을 한다.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영어는 마치 세계 공통의 언어처럼 쓰이고 있고, 저마다 손안에 있는 휴대전화로 훌륭한 수준의 번역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언어적 통합을 이룬 상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더해, 스마트폰의 기종에 따라 약간 다를 수는 있으나 이모티콘의 모양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어 같은 언어, 같은 뉘앙스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각국의 언어만큼 비언어적 의사소통 역시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제스처일지라도 어떤 나라에서는 유머러스한 의미인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욕설로 읽힐 수 있다고 책은 사례를 들어 말한다. ‘밈’ 등의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이모티콘이나 밈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 해석이 문화권별로 다르다는 점이 책에 등장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그러니 이모티콘은 작지만 복잡하고, 한 언어 안에 살고 있지 않으며, 한 가지 문화나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2023년 현재에서 미래를 빚어가는 데 이모티콘은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 너머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에 변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예로 이모티콘이 온라인 밖으로 벗어나는 과정에서 복잡한 법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트위터, 블로그, 인스타그램 심지어 뉴스 페이지까지 온라인 기반의 매체에서는 이모티콘을 마음껏 쓸 수 있으나, 이들은 오프라인으로 넘어오는 순간 수많은 저작권 문제와 부딪힌다. 저자는 원래 책에 더 많은 이모티콘과 밈의 예시를 싣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책을 준비하는 동안 이모티콘 커뮤니케이션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뚜렷한 경계를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설명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일이었다. 이모티콘에 대한 책에서조차 이모티콘을 쓸 수 없는 상황을 두고 저자는 이에 대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상에 널리 침투해 있지만, 이처럼 이모티콘에 대한 많은 부분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책과 같은 인쇄 매체로의 진출이나, 법적인 소유권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 등에서 그렇다. 때문에 이 책이 놀랍도록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가 읽어보길 바란다. 저자가 서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즘 우리는 글자를 쓰는 대신 이모티콘을 보내’고 있으니까.
WHO’S THE WRITER? 스테판 윌슨은 아티스트다. 옥스퍼드대학교 러스킨 스쿨과 런던 예술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Credit
- EDITOR 박세회/오성윤/김현유
- PHOTOGRAPHER 정우영
- TRANSLATOR 이원열(프랑스/태국/영국)/우정호(이탈리아)
- ART DESIGNER 주정화
CELEBRITY
#리노, #이진욱, #정채연, #박보검, #추영우, #아이딧, #비아이, #키스오브라이프, #나띠, #하늘, #옥택연, #서현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에스콰이어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