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part 2. 이주빈은 <눈물의 여왕>의 천다혜가 악당인줄 몰랐다고 했다

이주빈은 매해, 매 계절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다.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이나 출발선에 섰다는 부담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무려나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단단하고도 무심한 투로 말했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4.04.23
블랙 드레스 아미.

블랙 드레스 아미.

최근에 이병헌 감독의 신작인 <닭강정>에 짧게 등장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어요.
제가 이병헌 감독님과 <멜로가 체질>을 찍었잖아요. 그 이후로도 그 작품에 출연한 명준이와 함께 가끔씩 보는데, 어느 날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나 뭐 하나 찍는 거 있는데 (특별출연) 할래?” 그래서 저는 “그럼요. 할게요.” 이렇게 된 거고. 이병헌 감독님이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은인 같은 분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역할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승낙하신 거군요.
네. 일단 하겠다고 하고 나서 대본을 받았는데 이제 역할이…. (웃음) 감독님이 워낙 본인만의 작품 스타일이 있으니까 ‘재미있게 풀어주시겠지’ 하고 한 거죠. 제가 ‘저 못 해요’ 이런 소리를 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이주빈이 <닭강정>에서 맡은 역할은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남편 때문에 혼례 후로 매일 독수공방을 하다 미쳐버린 조선시대 대감집 마님이었다.) 그런데 사실 대본이 재미있어서 끌리기도 했어요. 조현재 선배님(<닭강정> 속 남편 역할)이 이불 안에 누워서 제가 뭐라고 하든 “난 이게 좋아” 하시잖아요. 대본을 읽는데 그 얼굴에 자꾸 감독님 얼굴이 겹쳐지더라고요.(웃음) “아, 이거 재미있겠다” 했죠.
이병헌 감독이 은인 같은 사람이라는 얘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요?
일단은 <멜로가 체질>이 대중에게 저라는 사람을 처음 배우로 인식하게 한 계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맡았던 소민이라는 캐릭터도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고요. 정점을 찍고 살짝 내려온 배우 캐릭터고 성격도 나쁠 것 같은 느낌이지만, 볼수록 여리고 의리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이미지가 저한테도 투영되어서 좋아해주신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표현이 살짝만 달라져도 제멋대로인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는 캐릭터였죠. 시청자들의 몰입과 응원을 받기 어려워지는 캐릭터.
맞아요. 실제로 4화 정도 방영됐을 때만 해도 욕을 많이 먹었거든요. 저도 그때는 비교적 신인이었으니까 반응을 찾아보고 했는데,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얼굴 보기도 싫다’ 이런 반응까지 있더라고요. 그때는 그게 또 속상했는데, 회차가 넘어갈수록 소민이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생겨요. 그때 새삼 느꼈죠. ‘아 이게 캐릭터와 드라마의 힘이구나.’ <눈물의 여왕>의 다혜(이주빈 분)도 초반에는 욕을 먹다가, 수철이에 대한 진심이 얼핏얼핏 보이면서 호감이라는 반응이 생기고 있거든요. 그런 부분이 좀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지금껏 방영된 회차까지는 다혜의 감정이나 행동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없고, 짧은 순간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표정이 전부였잖아요. 그것만으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꾼다는 게 신기한 일이긴 하네요.
그쵸? 저도 굉장히 신기해요. 그런 부분들만으로 좋아해주신다는 게. 저는 사실 처음엔 다혜가 빌런인지도 몰랐거든요.
다혜가 악역인 걸 몰랐다고요? 설정이 중간에 바뀐 거예요?
아뇨. 그러니까 주인공들을 속여 돈을 가로채는 일당 중 한 명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제 캐릭터만 준비하고 연기를 하다 보니 그런 식으로 생각을 못 했던 거죠. 저한테는 제 캐릭터잖아요. 다 제 연기잖아요. 저한테는 다혜의 행동이 다 설명됐고, 제 감정이 다혜의 감정이 되다 보니까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던 거예요. 다혜는 사실 원래 악랄하다기보다 누군가의 애정이 엄청나게 고픈 친구잖아요. 성장 환경에서 그게 충족이 안 되니까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명품 갖고 싶어 하고, 그렇게 철없는 식으로 발현이 되어 삐뚤어진 거죠. 누군가 그 애정의 갈구를 충족시켜주기만 한다면 누구보다 정직하고 똑바로 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제야 방영본을 보면서 저도 ‘어머 어머, 나쁜 애구나’ 하는 거죠.(웃음)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저는 몰랐던 거예요. 다혜가 그렇게 보여질지.
인스타그램에 올리신 “다혜야 착하게 살자”라는 말이 그런 의미였군요.
방영본 보면서 저도 막 그러는 거죠. 야 그만해라. 왜 남의 방을 뒤지니. 어떻게 남의 집에서 담배 피울 생각을 하니.
화이트 셔츠, 프린트 쇼츠 모두 버버리.

화이트 셔츠, 프린트 쇼츠 모두 버버리.

연기가 끝난 캐릭터는 기억 속의 친구처럼 남나요? 아니면 스스로의 일부처럼 남나요?
작품마다 다르긴 한데, 다혜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다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다혜를 생각하면 짠하거든요. ‘이제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런데 또 친구라기보다는 일부처럼 남았다는 느낌이 더 강해요. 어쨌든 제가 그 연기를 했고, 제 여러 측면 중에서 동질감이 있는 부분을 꺼내서 확장한 거니까요.
예전 인터뷰에서 ‘로맨스가 없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건 지금도 그래요. 그런 작품을 많이 못 해봤기 때문에. 제 안에 버킷리스트처럼 남아 있는 거죠.
가장 해보고 싶은 장르의 작품을 꼽으라면 뭘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최근에 굉장히 인상 깊게 본 것 중에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이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거든요. 1970년대에 난기류 때문에 비행기 하나가 안데스산맥에 추락했는데, 거기서 생존자들이 굉장히 오랜 기간을 살아남아요. 먹을 게 없으니까 죽은 시체들의 살을 먹으면서. 뭔가 그렇게 극한에 처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미스 슬로운>을 감명 깊게 봤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하셨잖아요. 끝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저변을 섬세하게 묘사해야 하는 작품에 관심이 많으신 걸까 싶기도 하네요.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 그런 게 눈에 밟히나 봐요. 자꾸 ‘언젠가 이런 걸 해보고 싶다’ ‘이걸 잘 해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하고 싶다’ ‘잘하고 싶다’ 이렇게 제 속에서 목표처럼 되어버리는 거죠.
전문직 여성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하신 적도 있어요. 이번에 <범죄도시4>에서 맡은 역할이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경찰이던데, 어느 정도 해소가 됐으려나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번 영화에서는 ‘한지수’라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제시하는 정도였던 것 같아요. 어떤 전문성을 발휘하고 일을 하는 부분은 크지 않은 거죠. 아직 빌드업 단계의 캐릭터인 거예요.
하긴 드라마 <닥터로이어>에서 연기했던 임유나도 병원 R&D센터장이긴 했었죠. 그런 면모가 작품 속에서 잘 제시되지 않았을 뿐이지.
맞아요. 전문성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내면의 욕망을 부각해야 하는 캐릭터였죠. 자기 분야에서 활약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정략 결혼의 대상이었고, 집안의 결정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지고, 그 안에서 주체성을 찾고 싶어 하지만 그게 본인의 전문성으로 헤쳐 나간다기보다는 좀 다른 방향으로 발현됐고요. 그런 장르에 필요한 ‘트러블메이커’로 작동한 부분이 컸죠. 그래서… 그 부분도 아직 갈증이 있습니다.(웃음)
이주빈이라는 배우에게 있어 지금은 어떤 시기일까요?
‘진짜 시작’을 하는 단계라고 느껴요. 신인의 마무리 단계인 거죠. 이제 어디 가서 스스로 신인이라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만큼 ‘신인이니까 봐주세요’ 하는 엄살도 부릴 수가 없는 거죠. 물론 예전이라고 그런 생각으로 임한 적은 없지만, 사실 현장을 놓지 않으려고 어떤 불안함에 작품을 하거나 현장 경험을 쌓고 숙련도를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던 시기도 있거든요. 이제 그런 때는 지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굉장히 많은 작품을 하셨고, 굉장히 다채로운 연기를 하셨죠. 저도 인터뷰 준비하면서 새삼 놀랐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모든 걸 다 잘 해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부터 보여드릴 건 그것들의 심화 버전일 테니까, 그리고 아직 제가 보여드리지 못한 모습도 많이 있으니까 그런 부분을 기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얘가 이런 느낌도 있네’ 하고 느끼실 수 있게 하는 거, 저는 그래도 그건 자신 있거든요.
이주빈이라는 배우가 새롭다고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거.
네. 일단 저 자체가 맨날 변하는 인간이라서요.(웃음) 저도 그동안 제가 가진 색깔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깊이가 생겼을지 기대되기도 하네요.

Credit

  • PHOTOGRAPHER 최문혁
  • STYLIST 강이슬
  • HAIR 다정
  • MAKEUP 아라
  • ART DESIGNER 박인선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