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TECH

이 사람들이 릴데크와 마스터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이유

바이닐 레코드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지른 지도 벌써 몇 년째. ‘아날로그의 재림’에 대한 무수한 기사가 쏟아졌지만, 턴테이블과 LP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굳이 릴데크와 릴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찾아 그 이유를 물었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4.05.05
몇 년 전 새로 출시된 릴데크 모델인 아날로그 오디오 디자인의 TP-1000.

몇 년 전 새로 출시된 릴데크 모델인 아날로그 오디오 디자인의 TP-1000.

세상에는 2024년이 되도록 릴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뭐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구축한 오디오 시스템의 소리를 제대로 듣겠다고 그에 맞춘 건물을 짓거나 전류의 성질이 중요하다며 집 앞 전봇대를 갈아버리는 사람도 나오는 게 오디오라는 기상천외한 장르이니까. 하지만 그건 대부분 아주 개별적인 집착일 뿐. 릴테이프에 대한 소식 중 가장 흥미로운 건,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릴데크만 전문으로 다루는 매장이 있다는 것이다. 애호가들만 알음알음 찾도록 건물 상층부나 지하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니다. 지상 1층 파사드의 통창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온갖 릴데크 모델들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대다수의 행인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지도 못할 것들을 말이다. “해외에서는 릴테이프의 유행이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죠. 국내에도 아직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듣는 분들이 있고요.” 릴투릴클럽에 처음 방문했을 때 맨 먼저 던진 질문 역시 그에 대한 것이었고, 석민우 이사는 ‘아직은 마니아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이쯤에서 릴테이프와 릴데크가 어떤 물건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풀네임인 ‘릴투릴 테이프’는 이름처럼 두 개의 릴을 걸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보내며 녹음하거나 재생하는 테이프를 아우르며, 릴데크는 이 녹음과 재생에 운용되는 기기다. 카세트테이프가 이 움직임과 원리를 축소한 발명품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카세트테이프와 가장 큰 차이는 무지막지한 정보량이다. 릴테이프는 대부분 자기장을 이용해 소리를 저장하는 ‘마그네틱 테이프’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데, 1950, 60년대에 주로 사용된 테이프는 초당 15인치 속도로 4분의 1인치 포맷을 녹음할 때 초당 약 6500만 개의 자성 입자를 담았다. 오늘날 가장 높은 디지털 포맷의 해상도가 초당 약 400만 비트의 스위칭을 제공하니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인 셈이다. 실제로 인간이 그 정보를 다 받아들이고 식별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아무튼 릴테이프가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아날로그 매체’라고 회자되는 건 그런 이유다. 1990년대까지 바이닐 레코드, 카세트테이프, CD 등 모든 음반 제작의 ‘마스터’ 매체로 통상 릴테이프가 쓰인 이유도 마찬가지. 소리 정보를 손실이 가장 적은 상태로 저장한 후 그것을 각 매체에 적용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릴데크 애호가인 포토그래퍼 이정규의 자택 거실 풍경.

릴데크 애호가인 포토그래퍼 이정규의 자택 거실 풍경.

“지구상에 존재하는 음원 소스 중 가장 영역대가 넓다고 할 수 있죠. 좀 과장해서 말하면, 릴테이프를 구해서 음악을 들으면 녹음할 때의 환경, 그때와 똑같은 컨디션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거예요(시중에서도 릴테이프 형태의 ‘오리지널 릴 마스터’ 음반을 구할 수 있는데, 이는 녹음에 사용한 마스터테이프를 1:1로 복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릴데크 애호가인 포토그래퍼 이정규의 설명이다. 성수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은 들어서는 누구나 일단 감탄부터 내뱉는데, 마치 비틀스나 비지스의 레코딩 영상 속에서나 보던 1980년대 스튜디오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화이트와 우드 톤으로 조성한 거실에는 버건디 컬러의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고, 그를 둘러싼 모든 벽면에 릴데크, 믹싱 콘솔, 스피커가 빼곡하다. 가정용 릴데크가 아닌 스튜디오용 릴데크를 공수해 사용하는 것도, 프리앰프 개념으로 믹싱 콘솔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그의 ‘최대한 녹음했던 당시의 소리 그대로 음악을 듣고 싶다’는 집념의 소산이다. “물론 다른 이유로 쓰는 사람도 많죠. 제 생각에도 이걸 실질적으로 제대로 사용하려고 사는 사람보다 폼 잡으려고 사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고요. ‘나 이런 거 쓴다’ 하고 느낌 내는 거죠. 그러다 보니 최고급이라고 알려진 제품들이 많이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요. 외국에서 이걸 하는 친구들을 보면 미제든 일제든 비싼 거든 저렴한 거든 그냥 그 소리가 본인과 맞으면 사서 잘 만져서 쓰거든요.” 만약 이 기사 속 이미지들을 보며 ‘별종들의 사치 경쟁이 또 하나의 물신적 유행을 낳았구나’ 하고 삐딱하게 바라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흐름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지점은, 이렇게 표상적 문화에 비판을 가하던 이정규도 릴데크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디자인을 첫 번째로 꼽았다는 것이다. “사실 제일 첫 번째는 디자인이에요. 두 번째는 저와 소리 성향이 맞는가 하는 거죠.” 하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그가 말하는 디자인이란 단순히 인테리어 측면이 아니다. 그것을 작동시킬 때 눈이나 손과 조응하는 ‘물리적 속성’에 가깝다. 아날로그란 매체의 저장 방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매체에 인간이 관여하는 방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트는 일련의 과정이 되게 물리적이라서 좋은 거거든요. 손 한 번 더 가고 귀찮더라도 좀 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거죠.” 프리랜스 오디오 회로 설계자인 이재홍 박사는 분야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빈티지 열풍’에서 릴데크가 갑자기 주목받는 이유를 짚기도 했다. “요즘은 코부즈나 타이달 같은 음원 서비스에서 하이엔드 음원을 스트리밍으로도 들을 수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릴테이프를 찾는 데에는 아무래도 레트로의 의미가 있겠죠. 갑자기 빈티지 롤렉스가 주목받는 것처럼요.” 물론 그 역시 음질 측면도 함께 짚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게 들려주는 소리가 디지털과는 뭔가 다르다는 거예요. 따뜻하고, 편안하고, 오래 들어도 피곤하지 않은 느낌이 있죠. 그건 기술적으로만 설명하기는 도무지 불가능하고 아직은 감성으로만 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요.” ‘아날로그의 따뜻한 소리’라는 건 이제 다소 공허하고도 진부해진 구석이 있는 이야기. 하지만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기술처, 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기술 관료로 일한 후 직접 오디오 회로를 설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이재홍 박사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을 때, 그 명제는 새삼 새로운 힘을 얻는 듯했다. 물론 그 역시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일단 음악을 들려주고자 했다. 직접 설계한 온갖 앰프와 스피커에 연결된 리복스 B77 릴데크로. 데크에 걸려 있던 릴테이프에서는 재즈 연주곡이 흘러나왔고, 그는 곧 에디터가 바이닐 레코드를 모은다고 했던 사실을 기억해낸 듯 이렇게 물었다. “릴테이프가 좋은 게, 소리에 잡음이 없죠?” 릴테이프와 바이닐 레코드의 차이는 사실 정보량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날로그’라는 카테고리로 한데 묶이지만 사실 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재생한다. 자기장을 사용하는 릴테이프는 바이닐 레코드 특유의 ‘판 튀는 소리’도, 톤암이 레코드의 안쪽으로 들어가며 생기는 트래킹 에러도 없고 (녹음 속도에 따라 저장 가능 곡 수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한 번 재생하면 뒤집을 필요 없이 오래도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대신 좀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있죠. 돈도 많이 들고.” 오리지널 릴 마스터 음반의 가격은 통상 한 장에 5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단순 비교하는 것은 사실 불공평한 일이기도 하다. 릴데크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이것이 재생 기기일 뿐만 아니라 녹음 기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재홍 박사가 릴데크를 활용하는 주요 방법도 바이닐 레코드의 곡들을 릴테이프에 녹음해 듣는 것이다. “귀한 LP는 그렇게 릴테이프에 소리를 옮겨둔 후에 잘 보관하는 거죠. LP는 재생할 때마다 음반이 상하는 매체이니까. 음반 하나를 억지로 다 들을 필요 없이 제가 좋아하는 곡만 따로 모아 들을 수 있으니 그것도 큰 장점이고요.” 릴데크와 릴테이프로 일종의 ‘믹스테이프’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추억 돋는다’고 하기에는 공 릴테이프도 하나에 10만원이 넘어간다는 점이 걸리지만 말이다.

릴투릴클럽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릴데크 제품들. 릴투릴클럽은 릴데크 역사의 전설적 모델들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한편 상주 기술자를 두고 모든 제품을 오버홀, 수리, 관리하고 있다.

릴투릴클럽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릴데크 제품들. 릴투릴클럽은 릴데크 역사의 전설적 모델들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한편 상주 기술자를 두고 모든 제품을 오버홀, 수리, 관리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해외에서는 릴테이프가 이미 몇 년 전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나라에서 먼저 각광을 받으면서 전설적 오리지널 릴 마스터를 재발매하는 레이블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새로운 릴데크를 제조하는 업체도 나왔다. 레이디 가가를 비롯한 많은 뮤지션이 다시 옛날 방식으로 릴테이프를 이용해 음반을 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다소 뒤늦긴 했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조금씩 반향이 일고 있는 중이다. 음악계 종사자들을 필두로 릴데크에 발을 들이는 신규 유입자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 작년에는 바이닐 레코드 생산업체인 화수분이 처음으로 오리지널 릴 마스터를 발매하기도 했으며, 릴데크를 전문으로 다루는 오프라인 매장 릴투릴클럽이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릴테이프도 지난 몇 년간 바이닐 레코드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이재홍 박사의 답은 좀 비관적인 축이었다. “일종의 컬트 문화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 정도가 되겠죠. 일단은 과거에 생산된 릴데크의 수량이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요즘 보면 값이 계속 올라가고 좋은 물건은 계속 줄어들고 있거든요.” 국내에서는 늦게 유행한 만큼 핸디캡을 쥐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한 최소한의 수요가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장애 요소로 꼽힌다. 예를 들어 충분한 수요가 없으면 음반도 국내에 정식 발매될 수가 없고, 애호가들은 해외 직구 등의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장벽이 높아지면 또 유입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런 지점에서는 릴투릴클럽이 잘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큰마음 먹고 오리지널 릴 마스터를 구하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았거든요.” 이정규 포토그래퍼의 설명이다. 릴투릴클럽의 큰 의의 중 하나는 릴테이프를 공식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2XH, 오푸스3, 오디오노츠, 헤미올리아 등 최근 릴테이프를 재발매하고 있는 대부분의 레이블 음반을.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릴데크도 판매하고 있다. 모체인 우미테크가 리복스의 공식 국내 수입사인 만큼 리복스와 스튜더는 물론 나그라, 타스캄, 아카이, 필립스 등의 전설적 모델들과 새로 생산되고 있는 모델까지 아울러 거의 ‘작은 박물관’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위층에 전문 기술자를 두고 제품의 오버홀, 수리 및 관리를 직접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화가 성숙하기 힘든 가장 큰 요인이 신뢰도예요. 그냥 개인끼리 거래를 통해서만 물건을 구할 수 있고, 수리를 해주는 곳도 별로 없다 보니까 거의 뭐 폭탄돌리기가 되는 거죠. 워낙 오래된 기기들이잖아요. 저희는 수리를 대비해 불량품도 일단 사들여요. 나중에 부품으로 쓸 수 있도록요. 판매한 뒤에도 계속 후속 조치를 해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 없이 입문할 수 있고, 그래야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거죠.” 릴투릴클럽 석경환 대표이사의 설명이다. 이 기사를 위해 취재한 다른 이들 역시 릴투릴클럽이 국내 최초로 릴데크 ‘문화’를 표방하는 매장이라는 점을 높이 샀다. 하지만 그 비전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견해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건 당사자인 석경환 대표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비즈니스 모델로 치면 그리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아주 험한 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논현동 한복판에 대체 왜 이런 가게를 차린 걸까? “험한 길이지만, 또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거든요. 좋은 소리를 좇다 보면 결국은 이 분야로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그 답은 경영인의 언어라기보다는 애호가의 언어에 가깝게 들렸다. 릴투릴클럽에 두 번째 방문한 날 석민우 이사는 “안 그래도 들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 계속 기다렸다”며 대뜸 어제 들어왔다는 피아졸라의 미공개 음반을 틀었다. 몇 년 전 새롭게 출시된 3000만원짜리 릴데크, AAD의 TP-1000으로. 릴테이프가 얼마나 설득력을 가진 매체인지 괴짜들의 전유물인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테다. 하지만 오디오나 아날로그 기술, 소비 문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 릴데크 문화에 대해 판단하려면 일단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봐야 한다. 피아졸라의 미공개 릴테이프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릴투릴클럽에서 유통하고 있는 오리지널 마스터 릴 음반들. 최근 릴테이프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명반으로 회자되는 앨범들의 오리지널 마스터 릴 버전이 재발매되고 있는 추세다.

릴투릴클럽에서 유통하고 있는 오리지널 마스터 릴 음반들. 최근 릴테이프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명반으로 회자되는 앨범들의 오리지널 마스터 릴 버전이 재발매되고 있는 추세다.

Credit

  • EDITOR 오성윤
  • PHOTOGRAPHER 박기훈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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