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엘름드린 & 드라그셋이 초대한 세계
아모레퍼시픽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 <SPACES>를 연 엘름그린&드라그셋 듀오를 만나 그들이 우리를 초대한 세계, 그들이 만들어낸 아름답고 어둡고 부조리한 세계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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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가 드라그셋(왼쪽)과 마이클 엘름그린의 모습.
엄청난 규모에 놀랐습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라고요.
잉가 드라그셋(이하 ‘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자체가 크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스테이트먼트(전개)가 필요했지요. 1년 반 전에 이 미술관을 처음 방문했고,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라는 조건을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저희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었죠. 특히 저 안쪽에 있는 기둥이 있는 공간이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그 공간에 어울릴 만한 수영장을 설치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졌지요.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전시를 구축했으니 건축이 이 전시를 이끌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마이클 엘름그린(이하 ‘엘’) 사실 전시 공간 안에 실내 공간을 연출한 게 처음은 아녜요. 그런데 전시장 안에 아예 집을 지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 공간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시도가 가능했던 거기도 하죠.

‘Untitled(the kitchen)’의 설치 전경. 마치 실험실처럼 보이는 주방의 구석구석 흥미로운 단서들이 숨겨져 있다.
그 집 말인데요, 집이 지어지면서 그 집을 중심으로 모든 게 연결되는 느낌이에요. 집 안에 있는 작업실에서 설계한 레스토랑 ‘클라우드’가 실제로 구현되어 있고, 벙크베드가 있는 방에서 자는 아이가 상상한 것들이 수영장에 구현되는 듯 보여요.
엘 맞아요. 공간을 연결하는 내러티브가 존재하지요. 처음에 들어와서 돌아보다 보면 레스토랑, 집, 풀장, 주방, 스튜디오가 모두 별개의 공간으로 보일 거예요. 마치 인스타그램에서 피드를 넘길 때마다 각기 다른 현실이 존재하듯 보이는 것처럼요. 그러나 그 안에 들어서서 돌아다니며 단서들을 찾다 보면 이 공간들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지요. 그걸 바탕으로 관객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전개해볼 수도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집 안에 있는 블루 프린트가 구현된 것이 레스토랑 클라우드고, 책장에 있는 사진을 통해 레스토랑에 있는 소녀와 집 안에 있는 소년이 연결되지요.
풀장에 있는 아이는 헤드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쓰고 있잖아요. 저는 어쩌면 그 아이가 디스플레이를 통해 보는 가상 세계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가상 세계의 존재들은 일부러 화이트로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도요.
엘 뒤에 보이는 나무 그림자도 그런 초현실적인 정취를 더하고 있지요.
미학 용어 중에 현실과의 닮음 정도, 이야기의 그럴싸함을 뜻하는 ‘핍진성’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시각적인 핍진의 정도를 참 잘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핍진하게 해서 확 끌어당길 때도 있고 좀 덜 핍진하게 해서 툭 하고 밀어낼 때도 있고요. 예를 들면 주방의 선반 아래 감춰진 재떨이는 너무도 핍진해서 몰입하게 하지만, 블루 프린트에 쓰여 있는 의뢰인의 이름이 ‘잇 슬로우 클럽’이라는 점은 우리를 살짝 밀어내지요.
엘 저희가 미학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것과 연결된 현실이 무엇인가’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지털화된 세계에 살면서 우리 스스로의 몸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신체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를테면 우리의 현실과 평행하는 현실, 실제로 우리가 입장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물론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평행 현실에 신체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저 수영장에 다이빙해서 들어갈 수 없고, 레스토랑에 가서 먹을 수 없고, 주방에선 요리할 수 없지요. 결국 관객은 이 설치들과 상호 작용하기를 바라는 관음자, 혹은 보이저(여행자)가 되는 것이지요. 실제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공간에 놓임으로써 그것들의 기능이 무엇인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모레퍼시픽 뮤지엄의 한 공간은 전체가 수영장으로 꾸며졌다. 이 공간에 있는 동상들이 백색인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집 안 분위기가 미니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음산해요.
드 부드러운 표면, 미니멀하고 기능주의적으로 보이는 겉모습을 가지고 작업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형태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그것들은 완벽해 보이지만, 작동하지 않지요. 당신이 보는 것들이 그 표면만 완벽할 수도 있다는 것, 완벽한 세계란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집 안의 전체적인 디자인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인데, 스칸디나비아가 외부에서 보기엔 완벽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지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완벽하지 않은 건 알고는 있지만, 어째서 그 안에서 그렇다고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드 모두 같은 행동을 하도록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모노컬추럴’(monocultural)한 사회지요.
좀 뻔한 질문이지만 어디에서 이런 작업의 영감을 구하나요?
엘 전 영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사실 극장에 또 가면, 그 경험이 2차원적라는 사실이 싫지요. 우린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저희 작업들은 어떻게 보면 직접 들어가 상상하고 추리할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드 물론 그 장면이 당신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는 점도 중요해요. 당신은 그 안에서 이방인으로서, 방문자로서 존재하죠. 그 세계에 속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 역시 당신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세계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죠.
아까 마이클과 서울의 시간에 대해 잠시 얘기했지요. 서울은 엄청 빠른 도시입니다. 특히 이 전시장이 있는 용산의 통일로 일대는 그중에서도 아주 활기찬 곳이지요. 그런데 이 지하로 내려와서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느려지는 것만 같았어요.
엘 사실 제가 꿈꾸는 것 중 하나가 ‘이 용산 일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모든 차를 30초만 슬로모션으로 돌려보면 어떨까’라는 상상이에요. 일종의 공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실제로 이번 전시에 있는 작품들 중 ‘슬로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작품도 있고요. 거울에 하나의 획을 긋는 페인터의 형상을 비롯해 이 안엔 수많은 ‘프로즌 무브먼트’ 요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요소들이 아마도 느림의 감각을 전달한 거겠죠.
이번 전시에서 가장 놀라운 공간인 수영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Powerless Structures, Fig. 11’의 경우 유리창을 통과하는 무용의 다이빙 보드였고, 미국 서부나 남부의 중산층 집에 있는 땅콩 모양 수영장을 차용한 ‘반 고흐의 귀’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마치 커뮤니티 센터에 있음 직한 수영장이 떠올라요. 어째서 이렇게 수영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나요?
드 농담으로 답하자면 저희가 집 밖에 풀장을 만들 수 없는 북유럽 출신이라서 수영장에 집착한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실은 이 모든 수영장은 다이빙 보드에서 시작됐어요. 방금 언급된 바로 그 1997년 작품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행복한 게이의 삶을 예찬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호크니의 그 컬러풀한 페인팅에서 보는 모습들이 우중충한 노르딕 국가에 사는 저희의 현실과 너무도 달라 보였거든요. 다이빙 보드는 풀 안에 뛰어드는 장치죠. 어쩌면 세계의 가장자리 바깥이나 뭔가의 안으로 뛰어드는 장치로 해석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그걸 박물관에 전시하면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행위는 정지되지요. 특히 첫 작업은 다이빙 보드의 절반이 미술관의 유리로 막혀 있었어요. 그 뒤로 저희 작품에는 액션을 일으키도록 초대하지만, 막상 그 액션을 할 수 없는 것들이 자주 등장해요. 예를 들면 ‘프라다 마르파’(Prada Marfa, 2012)의 경우도 그렇죠. 들어갈 수 있는 진짜 프라다 매장처럼 보이지만 그럴 수 없거든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구조물을 둠으로써 감성적으로 또 지성적으로 다르게 관여하는 작업입니다.
엘 (이번 작품의 형태인) ‘퍼블릭 풀’이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죠. 공용 수영장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의 몸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는 곳입니다. 또 자신과 다른 몸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거의 다 벗고 있는 만큼 부의 정도나 사회적 배경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민주적인 장소이기도 하고요. 예술계 전반이 사회적인 작용을 하는 다른 장소가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화이트 와인을 마시면서 프라이빗 전시를 감상하는 세계 밖에 공용 풀장이 있다는 것을요.
흠, 방금 한 말은 무척 흥미롭네요. 사회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공용 공간’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요.
드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많은 장소가 있습니다. 특히나 물리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그렇지요. 전 이런 ‘공공 기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두 아이폰이나 갤럭시만 쳐다보며 살다가는 반사회적인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있어요. 퍼블릭 풀로, 극장으로, 놀이터로 또 미술관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까 우리가 얘기한 1997년 작품의 연작 제목은 번역하자면 ‘무력한 구조’입니다. 전 그 무력감이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의 표어였던 ‘Foreigner’s everywhere’의 ‘foreigner’라는 감각과도 상통한다고 생각해요. 아까 전시장에 있는 메모에도 쓰여 있는 엘름그린의 시집 제목 ‘home is where you left’라는 글귀가 던지는 이미지도 비슷하지요.
드 사실 그 ‘home is where you left’라는 구절은 마이클이 열아홉 살 때 쓴 시에서 가지고 온 구절이기도 해요.
엘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성장할 때나 혹은 학교에서 배울 때 ‘주류의 현실’(mainstream reality)을 늘 번역해 받아들어야 해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로미오와 줄리엣>을 수업 시간에 배운다고 상상해보세요. 저는 이성애자인 소년 로미오와는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전부 나의 욕망으로 번역하고 변형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그때 제가 사용한 방법들이 우리의 작업 방식이기도 해요. 뭔가를 뒤집고 트위스트하고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지요.
관객들이 이곳에 와서 해야 하는 게 번역일 수도 있겠어요.
드 사실 요즘은 다행스럽게도 그런 정체성의 구분이 옅어지고, 더 유연해졌지요. 이제 이분법적인 분위기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해요.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아까 우리가 말한 1997년의 다이빙 보드는 아예 제 구실을 못하게 유리로 반쯤 막혀 있었지요. 그래도 지금은 유리 밖으로 나와 있고요.
드 게이는 어때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 클래식한 게이에게 요구되는 정체성은 사실 저희 작품 세계 안에서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파빌리언에서 컬렉터를 물에 빠뜨리면서 끝났어요.
아하! ‘컬렉터의 죽음’(2009) 말이군요. 그런데 전 사진으로만 봤는데, 그건 진짜 물이었나요.
엘 맞아요. 그건 진짜 물이었어요. ‘Powerless Structure’ 연작은 저희가 푸코를 읽다가 생각한 아이디어였어요. 푸코는 ‘권력 구조’(Power Structure)에 대해 ‘구조 자체에는 사실 힘이 없다. 우리가 구조를 수용하기에 구조에 권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권력 구조’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면서요. 전 그 말에서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을 봤어요.
요즘은 정체성을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게 오히려 시대에 뒤처지는 느낌이 들 수도 있는 분위기지요. 워낙 사람들이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이번 전시에서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무척 로맨틱하고 캠피하다고 느꼈어요.
엘 어떻게 보면 약간 뒤틀린 로맨티시즘, 형용 모순 같은 로맨틱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군요. 캠피하다는 말은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을 비트는 방식이니까요. 방금 우리가 얘기한 ‘Powerless Structure’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할 ‘Powerless Structures fig.101’은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에 설치되었던 조각인데요, 흔들목마를 탄 소년이 마치 창을 던지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요. 흔들목마는 엄숙주의가 만연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져 유행한 장난감인데, 저는 이게 제대로 분출되지 못한 성적 욕망이 뒤틀린 방식으로 표현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 자체로 캠피하지요. 그걸 트래펄가 광장 한복판에 내놓은 이유 역시 캠피하고 싶어서였고요. 전 사실 그 광장 중심에 서 있는 넬슨 제독의 동상도 상당히 캠피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요염한 자세를 하고 있잖아요.
눈길을 끄는 장치도 있었어요. 작업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building for the masses’라는 문구가 붙은 포스터가 있었죠. 포스터에 그려진 아파트가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똑같이 생겼더군요.
드 아파트 얘기를 해준 게 상당히 흥미로워요. 같은 형태의 건물도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저가의 사회 주택이 되기도 하고 엄청나게 비싼 집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엘 전 강남에 처음 갔을 때 유럽의 도시 외곽에 있는 집합거주 건물들이 줄지어 있길래 아주 가난한 동네인 줄 알았어요. ‘같아 보여도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질문이네요. 사실 그 포스터는 저희가 만든 가짜입니다. 반면 거실에 있는 포스터는 뉴 아방가르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시의 진짜 포스터고요.
로맨틱, 캠피 두 가지와 함께 흐르는 정조는 위트인 것 같아요. 당신들에게 ‘위트’란 무엇인가요?
드 제게 위트는 어려운 현실, 도전적인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대처 방식이에요. 뮤어를 통해 현실에 대응하지요. 물론 커뮤니케이션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위트가 오갈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든요.
엘 부조리 측면에서 위트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희는 사무엘 베케트의 엄청난 팬이기도 한데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정말 어둡고 종종 그 내용은 디스토피아적이고, 실존과 같은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재밌거든요. 집 앞에 있는 나무 설치물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를 연상케 하는 장치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제가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가 떠오르네요. 한편 벙크베드가 있는 방에선 위아래로 마주 보고 있는 베개에서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빌보드 작품 ‘무제’(1991)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드 곤살레스-토레스로부터는 미니멀리즘적인 형식에 정체성의 질문을 넣었다는 점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은 삶에서 참조되는 형상들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곤살레스-토레스는 미니멀리즘적인 폼 안에 다시 삶을 넣었거든요. 마이클은 실제로 곤살레스-토레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만난 적도 있어요.
엘 맞아요. 곤살레스-토레스가 1994년에 작고했는데, 그 2년 전인 1992년에 코펜하겐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넷플릭스의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의 정취가 떠오르는 ‘Shadow house’(2024)의 설치 전경. 집 안 곳곳 이들의 과거 연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Credit
- ASSISTANT 송채은
- ART DESIGNER 최지훈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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