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재일교포 김사직이 만든 강렬한 설화의 이미지들은 어째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가

재일이 한국인보다 한국적일 수 밨에 없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6.05.18
김사직, '여자들은 여행을 떠나, 노래와 고기를 주었다'.

김사직, '여자들은 여행을 떠나, 노래와 고기를 주었다'.

김사직의 이미지는 왜 그토록 강렬한가

김사직의 사진을 처음 마주하는 한국 사람은 잠시 움츠러든다. 아름답다고 느껴서만은 아니다. 그건 어떤 낯선 느낌 때문이다. 한복을 입은 인물들, 제물처럼 놓인 동물의 신체 부위들, 불꽃 같은 붉은색과 칠흑 같은 어둠이 맞부딪히는 화면.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은 익숙해 보인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삼신 할머니가 떠오르기도 하고, 카인과 아벨이 떠오르기도 하며, 어떤 장면은 몽골이나 그리스의 신화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우리가 아는 이야기들의 기억을 부정하듯 어떤 기괴한 형태로 과장되어 있거나 비틀려 있다. 우리가 움츠러드는 이유는 그 이미지들이 우리 정체성의 일면을 이루는 여러 이야기의 근원들과 격렬하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의 작가 김사직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다. 그의 작품이 한국의 무속적 이미지나 민간 신화의 층위를 건드리면서도 동시에 기독교 도상이나 서양 회화의 구도를 능숙하게 결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서 서양 미술 교육을 받았고, 그 시각적 문법을 이미 몸에 새겨 넣었다. "일본에서 서양 미술 교육을 받고 자라서 카인과 아벨 같은 서양 미술사의 유명한 장면들의 언어도 제 안에 있는 셈이죠. 서양적 도상을 의도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언어 역시 제 안에 있는 셈이에요." 김사직의 말이다.

'나는 편히 죽을 수 없다'(김사직, 영상)의 스틸 이미지.

'나는 편히 죽을 수 없다'(김사직, 영상)의 스틸 이미지.

그게 전부라면, 그의 이미지는 영리한 인용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그의 작업에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서양적 구도 안에 채워진 것들, 즉 흰 저고리를 입은 노파들, 곰 탈을 쓴 인물, 손에 쥔 씨앗과 피 같은 것들(<Monogatari>)의 질감과 무게다. 김사직은 한때 사진을 공부하다 잠시 쉬며 일본 각지를 돌아다닌 시기가 있었다. 그가 찾아다닌 것은 일본 여러 지역의 마술, 샤머니즘, 토속 신앙의 현장들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의 전통 음악을 들었을 때였다. "처음 듣는 음악이었어요. 뜻을 전혀 모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녀는 그것을 머리가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아는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당시에 선조들의 감각이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 흘러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내 선조들이 느꼈던 어떤 것들을 지금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의 이미지는 한국의 전통 미술이나 민속 도상과도 다르다. (<Monogatari> 연작에서 드러나는)그의 이미지는 전통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을 경유하되, 그녀의 몸이 다시 발명한 신화다. 그가 직접 말했듯, 그것은 "교포로서의 창세 신화"다. 고조선의 기원을 설명한 단군 신화처럼,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김사직 스스로가 자신의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 증언하는 스스로 만든 설화다. 대체로 그의 이미지는 한국의 무속 도상보다 더 원초적이고 더 야성적이다. 설화가 고증을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박탈과 단절을 겪은 몸이 스스로 재구성한 신화이기 때문이다.

'Together with HATAMUN, the body is there now'(김사직) 연작 중 하나.

'Together with HATAMUN, the body is there now'(김사직) 연작 중 하나.

재일 사회에 박제된 시간

김사직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재일 사회라는 공동체의 특수한 성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녀가 <에스콰이어>와 나눈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일본 내 교포 사회의 가부장제와 제사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수도권 한국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열 가정 중 하나도 채 안 된다고 체감한다. 제사를 지내더라도 일 년에 한 번으로 몰아 지내는 경우가 많다. 한편 일본에서 재일이든 아니든 여성들이 한국인 교포와의 결혼을 힘들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제사'다. 1년에 스무 번의 제사를 지내는 가정도 있을 정도로 오래전 단절된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 현상을 단순히 보수적이라거나 시대에 뒤처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보다 정확한 설명은, 그 전통이 '박제'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과 관습은 한국 사회 내에서 시대와 함께 변화했다. 도시화, 민주화, 경제 성장, 개인주의의 확산 속에서 제사는 간소화되고, 가부장제는 도전받았으며, 문화는 끊임없이 갱신되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간 교포 사회의 문화는 이주 당시의 시점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지켜온 것은 살아있는 한국의 문화가 아니라, 특정 시점에 고정된 한국의 이미지였다. "제사는 일부일 뿐이고, 사실 한국식 유교 관습과 가부장제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던 시절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아 있어요. 한국 본토에서는 서구 문명의 유입과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이런 사고방식들이 많이 와해된 반면에 일본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마치 우리들의 정체성인 것 마냥 지켜냈던 거죠." 일본이라는 균질성의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 살아남으려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의 핵심 증거로 기능하는 것이 바로 전통 의례와 관습이었다. 변화는 곧 정체성의 소멸처럼 느껴졌다. 재일 사회에서 '한국인다움'은 언어 능력, 민족 이름 사용, 가족의 이야기, 음식 문화, 문화적 유물 같은 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일종의 자기 본질화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은 선택적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되는 것이 된다. 전통을 버리는 일이 적에게 항복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공동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한국이 아니기도 하다. 다른 사회의 압력으로 더 단단해진, 그러나 바로 그 단단함으로 인해 더 이상 살아 숨 쉬지 못하는 정체성이다.

<物語>(Monogatari) 연작 중 '영웅'.

<物語>(Monogatari) 연작 중 '영웅'.

교토의 한국 무용 교실

김사직에게 한국 무용의 경험은 특별했다. 그는 사진을 잠시 그만두고 일본 각지를 여행한 후, 교토에서 한국 전통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몸이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의 선택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 무용을 통해 신체 감각이 되돌아오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녀는 교토의 한국 무용 스승에게 약 15년간 배우며 사제관계를 유지했다. 그녀에게 그 공간은 자신의 한국 정체성을 지키는 지성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일본 사회 속에서 자신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고 몸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장소. 그러나 2년 전, 그는 한국에 3개월간 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스승에게 무용을 배웠다. 그때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토에서 무용은 문화였고, 스승은 어버이였으며, 그 관계는 종종 강력한 상하 관계였다. 한국에서 배운 무용은 말 그대로 춤이었다. 한국의 스승은 김사직에게 늘 "좋아하는 춤을 잘 추게 하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 단순함과 자유로움 속에서 그는 교토에서의 15년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교토의 그 공간은, 사실 또 하나의 단단해진 재일 교포 공동체였다. "결국 거기도 디아스포라라는 틀 안에서 박제된 무용 선생님이셨던 거죠." 결국 교토에서 배운 한국 무용은 한국에 가닿는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안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재일의 연장이었다. 한국의 무용을 통해 한국에 닿았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닿은 곳은 또다시 재일이라는 조건 그 자체였다.

상처 입은 몸이 만드는 신화

<AMA Series> 중 '二匹が出会う'.

<AMA Series> 중 '二匹が出会う'.

김사직이 결국 도달한 것은 이 모순의 인정이었다. 그는 디아스포라로서 자랐다는 것을 드디어 스스로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작품이 태어났다. 정체성을 찾았기 때문에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최근작 <나는 편히 죽을 수 없다>는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언젠가 그녀는 한국 무속 의례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가(巫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그들이 드리는 기도를 함께 나눌 수 없었다. 이 영상 작품에서 그녀는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바리공주로 분장해 뭔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장면이 립싱크이며, 바리공주가 실제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점이 작품의 요체다. 한국의 전통에서 정체성의 구원을 찾고자 했지만 언어적으로 그 공동체와 연결될 수 없었던 상태의 공허함이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나는 편히 죽을 수 없다' 영상 스틸컷.

'나는 편히 죽을 수 없다' 영상 스틸컷.

그래서 이미지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강렬하다. 그것은 역설이 아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상실된 것을 다시 만들 때, 그 재창조는 원본보다 더 원초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기억과 지식이 아닌 욕망과 상처에서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단군 신화가 이미 있는데 다시 단군 신화를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단군 신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를 만들어야 할 때, 그것은 더 절박하고 더 날것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디아스포라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정체성이라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잘 감각하지 못합니다. 정체성을 찾는 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녀가 말한다. "정체성은 이미 있지요. 일본에서 자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요. 그러나 일본이라는 사회와 한국이라는 사회를 오가면서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생기는 '정체성 트라우마' 역시 있습니다. 그런 트라우마를 제 세대에서 없애고 싶다, 그런 희망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그녀가 렌즈에 담아내는 이미지들을 더 강렬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Credit

  • PHOTO 김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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