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사랑의 재발명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의 만남은 다른 세대가 사랑이라 말하던 것과 다르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6.10.03

불 꺼진 방에 누워 스마트폰을 쥔 채 다른 이의 삶을 염탐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폰트의 자간, 팔로잉 목록에 낀 수상쩍은 헬스 트레이너 계정, 3년 전 페이스북 댓글의 말투,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의 선곡. 소개팅 전 건네받은 상대의 소셜 자아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뜯어보다가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르고 알림을 끈다. 사유는 차고 넘친다. 식당에서 직원을 부를 때 벨을 누르는 손가락 각도, 배달 기사를 향한 영혼 없는 목례,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는 숏츠의 카테고리. 이 촘촘한 감별의 그물망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3초 안에 폐기 가능한 불량품으로 전락한다.

맞다. 각박한 시대다. 세간에서는 이걸 두고 20대의 낭만이 죽었다느니, 살기가 팍팍해 연애마저 포기했다느니 쉽게 혀를 찬다. 사방에 외로워 죽겠다는 아우성이 넘쳐나는데 도대체 왜 다들 연애는 안 하느냐고, 그렇게 고독하면 눈 딱 감고 아무나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 될 일 아니냐고 말이다. 대체 왜 그냥 연애를 하지 않는 걸까?

첫째로 밑천이 없다. 얄팍한 통장 잔고와 언제 끊길지 모를 일자리, 간신히 지탱하는 하루치 루틴만으로 에너지는 이미 바닥이다. 퇴근길의 남은 체력을 쥐어짜 주말 데이트 코스를 짜고, 치솟는 파스타 물가 앞에서 조용히 머릿속 계산을 굴리고, 알량한 자존심을 접어가며 서운함을 달래는 일. 어느 것 하나 가벼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연애는 갈수록 계층을 타는 과업이 되어간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불안 속에서 친밀함을 가꾸는 일조차 일정한 여력을 갖춘 이들에게나 허락되는 사치가 되었고, 연애 경험이 없는 청년이 실업 상태일 확률은 그렇지 않은 청년의 세 배에 가깝다는 통계마저 심심찮게 들려온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궤도에 오른 뒤에도 서로에게 매력을 잃지 않으려 끊임없이 헬스장을 끊고 자기 관리를 검열해야 하는 판국이니, 사랑은 지친 몸을 뉘는 안식처이기는커녕 또 하나의 고강도 감정 노동에 가깝다.

둘째로 감수해야 할 위험이 또렷해졌다.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 불법 촬영, 금전 갈취처럼 친밀성의 외피를 쓰고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던 일들이 마침내 제대로 된 이름을 얻게 되면서 겉으로 드러났고, 이제 관계를 대하는 기본값은 ‘설렘’에서 ‘경계’로 옮겨갔다. 연애 리얼리티나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직진’의 풍경을 떠올려보라. 상대의 곤혹스러운 침묵이나 완곡한 거절 앞에서도 “내 진심을 왜 몰라주냐”며 브레이크 없이 마음을 들이붓는 태도. 한때 순정으로 미화되던 그 일방적인 속도는 이제 낭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간신히 균형을 맞춘 내 하루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난입이자, 받는 입장에서는 거절의 비용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고백 공격’일 따름이다. 쏟을 에너지는 모자란데 감수할 위험은 크니, 문을 열어주기 전에 경보 장치를 켜고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는 편이 합리적이다.

상황이 이러니 학교나 직장 같은 생활 영역에서의 만남은 사막이다. 밥줄과 평판이 걸린 공간에서 섣불리 사적 관계를 맺었다가 파탄이라도 나면 수습할 길이 없다. 사소한 호감의 표시조차 괴롭힘과 민폐의 경계를 넘나들고, 틀어졌을 때 마주할 지옥을 떠올리면 차라리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자만추’라는 말이 상식처럼 쓰이지만, 일상에서의 만남이 여전히 당연하고 흔한 일이었다면 굳이 그런 말을 만들어 강조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찾아낸 궁여지책은 통로를 아예 반대쪽으로 바꾸는 일, 즉 ‘인만추’다. 생활 영역의 리스크를 삶의 바깥으로 격리해 외주화한다. 수틀리면 버튼 하나로 상대를 차단하고 도망칠 수 있는 데이팅 앱, 규격화된 만남의 플랫폼이 외로움의 자리를 채운다.

로테이션 와인 파티에 벌써 세 번이나 다녀왔다던 친구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본명 대신 닉네임을 쓰고, 30분마다 호스트의 통제 아래 시계 방향으로 자리를 옮긴다. 알코올과 낯선 이성이 섞여 도파민이 돌면서도 통제 불능의 사고는 터지지 않는 곳. 진행자가 분위기를 알아서 띄워주니 애써 상대를 파악할 필요도 없고, 무례한 빌런을 만나도 30분만 버티면 합법적으로 도망칠 수 있다. 신원은 주최 측이 1차로 걸러주고, 문제가 생기면 수습할 관리자까지 상주한다. 날것의 위험을 시스템 뒤로 외주화한 채, 딱 즐길 만큼의 도파민과 안전거리만 챙겨가는 영리한 타협인 셈이다.

비슷한 계산으로 1인 손님 전용 룰과 바텐더의 중재를 내세운 혼술바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경계해도 타인의 무례를 완전히 걸러낼 무균실 같은 건 없다. 집 앞 혼술바를 찾았던 한 선배도 낭패를 겪었다. 온기를 바랐을 뿐인데, 실실 웃으며 곁눈질하던 취객이 화장실 가는 길목에서 등 뒤로 슬쩍 손을 얹은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선배는 자조했다. 잘못된 장소에서 괜찮은 사람을 찾으려 한 게 잘못이었다고, 평일 저녁에 술 마시는 사람치고 자기 관리 잘하는 사람 못 봤다고. 외로움을 덜어보려 문을 나섰던 사람이 손에 쥔 것은, 위안이 아니라 또 하나의 ‘필터링 목록’이었다.

만남의 자리가 미덥지 않다면 관계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 상책이다. 섣불리 서로를 옭아매지 않는 ‘썸’이 보편적인 통과의례가 되고 관계의 명명을 미루는 회색지대가 늘어난 이유다. 일찍이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의 사랑이 ‘오직 너 하나’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며 관계의 만족이 유지되는 동안만 이어지는 ‘합류적 사랑’으로 옮겨갔다고 보았다. 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이 유연한 문법에는 상시적인 교체의 공포가 따라붙는다. 피차 더 나은 선택지를 염두에 둔 채 문간에 발 하나만 걸쳐두고 있는 사이, 나 역시 상대의 손에서 언제든 갈아치워질 수 있는 패에 불과하다는 서늘한 진실. 그렇게 쿨하고 독립적인 관계를 지향할수록, 현실에서는 서로를 향한 불신의 감시와 위태로운 줄타기가 시작된다.

방어벽 뒤로 숨어든 우리는 상대를 향한 감시의 망루를 점점 높이 쌓는다. 나는 언제든 발을 뺄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상대만큼은 다른 가능성에 한눈팔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봐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모순. 인스타도 안 하고 집과 헬스장만 오가는 ‘너드남’ 판타지와 나만 바라보며 매달려주는 ‘멘헤라’를 향한 뒤틀린 갈망, 이성과의 접점을 단속하려 발명된 ‘여사친’과 ‘남사친’, 깻잎 한 장 떼어주는 친절에서 불륜의 싹을 읽어내는 ‘깻잎 논쟁’까지. 죄다 이 만성적 불신의 파생물이다.

하지만 매번 상대를 단속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도 진 빠지는 노릇이다. 애초에 문간에서부터 싹을 쳐내는 ‘사전 감별’이 횡행하는 이유다. 커뮤니티에는 특정 직업과 외모와 취미를 낙인찍는 ‘문담피’니 ‘간스유예기엔교’니 하는 축약어가 무슨 과학적 진단이라도 되는 양 떠돌고, 에브리타임과 블라인드에 쏟아지는 파탄의 ‘썰’들이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걸러낼 리트머스지가 된다. 맞춤법 실수 하나, 옷차림 하나, 식사 예절 하나가 즉각적인 탈락 사유다. 신뢰가 바닥난 판에서 상처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아무도 통과시키지 않는 것. 우리는 서로에게 부지런히 결격 사유를 발부한다. 이쯤 되면 웃음만 나온다. 그래, 피차 피곤한데 그냥 이렇게 서로 거르고 거르며, 혼자 살다 가자고.

아니다. 우리 솔직해지자. 그렇게 모든 타인을 방 밖으로 밀어내고 나면, 결국 텅 빈 방에 남겨진 고독과 단둘이 마주 앉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늙어가는 삶을 진정 감당할 수 있을까? 진짜 비극은 아무도 사랑을 믿지 못하면서도, 그 고독을 달랠 다른 관계의 문법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온전한 어른으로 인정받고 고립을 면하는 길은 여전히 ‘연애-결혼-가족’이라는 뻔하고 무거운 단 하나의 패키지뿐이다. 거기 목을 매는 이들을 두고 ‘남미새’니 ‘여미새’니 비웃으면서도, 정작 그 궤도 바깥에서 타인과 깊은 온기를 나누는 법은 모른다. 대안이 없어 무거워진 사랑은 그렇게 자꾸 얄팍한 회색지대로 도망치고, 그 도망이 판 전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다시 차가운 고독으로 침몰하는 닫힌 루프.

참 우스운 촌극이다. 사방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저 인간은 이래서 탈락, 저 인간은 저래서 아웃”이라고 심사위원 행세를 하지만, 솔직히 우리 모두 누군가의 피드에서는 0.5초 만에 ‘빛삭’당할 만한 하자를 주렁주렁 달고 사는 불량품 아닌가. 식당 벨을 공손히 누르며 유튜브 알고리즘을 무균실처럼 관리한다고 해서 대단히 성숙하고 무해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단 한 번의 스크래치도 감당하지 못하는 유리멘탈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지뢰가 되지 않기만을 빌며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내가 그만 징징거리지 말고 연애나 하라고 요구하리라 예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라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부딪치며 실수도 하고, 데고, 밑바닥을 보이며 싸우다 가까스로 화해하거나 깨지며 단단해지는, 끈적하고 불완전한 여정이라고. 오산이다. 아무렴 이렇게 잘난 척 떠들어댄 나부터가 이 거대한 쫄보 연대의 든든한 일원이다. 카톡 미리보기로 메시지를 훔쳐보며 답장 타이밍을 재고, 상대의 사소한 뉘앙스 하나에 식은땀을 흘리고, 평온한 저녁 루틴이 침범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소인배. 그럼에도 기어이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들을 위해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사랑이 끝나가는 게 아니라 그 번거로움을 감수할 사람과 여건이 끝나가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한때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젠체하기 위해 주워섬기던 말마따나, 사랑은 정말 재발명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장민욱은 사회학을 공부하고 글을 쓴다. 세상과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단기 아르바이트와 일용직을 전전하며 만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동시대 청년들의 내밀한 여정에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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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장민욱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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