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명의 등장
'비밀의 숲'에서 유재명이 살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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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주(이하 신) “조금 천천히 오지.”
유재명(이하유) 참 많은 심정이 함축된 대사죠. 비하인드부터 말씀 드리자면 “조금 천천히 오지”는 대본에 있는 대사예요. 반면에 바로 앞에서 이창준이 황시목에게 하는 “선배, 참 듣기 좋네”는 대본에 없던 대사예요. 현장에서 리허설하다가 제가 감독님께 말씀드렸어요. ‘선배’라는 말이 마음에 박힌다고. 황시목이 처음으로 이창준을 인간적으로 부르는 호칭이니까. 하지만 “조금 천천히 오지”라는 대사를 떨어지기 직전에 그런 느낌으로 치게 될 줄은 몰랐죠. <비밀의 숲>이란 드라마의 현장 분위기가 좀 그랬어요. 이상하게 현장에서 더 깊이 인물에 몰입될 때가 있었어요.
민용준(이하민) 신기하네요.
유_정말 신기했어요. 이창준의 마지막 장면만 해도, 인천의 폐건물에서 느껴지는 어떤 공허하고 황폐한 분위기가 대사의 질감을 바꿔놓은 부분이 있어요. 두 남자가 비극적으로 대면하는 순간이라는 극적 상황은 원래부터 있었죠. 그런데 막상 마지막 상황에 처하니까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제 안에서 툭 나오더라고요. “조금 천천히 오지.”
신_보는 입장에서도 울컥했어요. 조금만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싶고.
유_“나 죽기 싫어. 후회해.” 이런 대사가 아니니까요.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나도 잘 몰라. 그 마음처럼 툭 나오는 게 그 말이죠. “조금 천천히 오지.” 어쩌면 그 순간 사랑하는 여인이, 딸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민_혹시 이수연 작가는 어떤 의도로 그 대사를 썼는지 여쭤보신 적 있나요?
유_얼마 전 이수연 작가님을 포함한 <비밀의 숲> 식구들이 다 함께 놀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일상적인 톤으로 잘 소화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작가님도 멋들어진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런 대사를 써놓은 건 아닐 거 같아요. <비밀의 숲>은 촬영할 때마다 직감적으로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서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다행히 그런 직감이 잘 맞아떨어진 순간이었죠.
신_단 한마디로 인물의 모든 감정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것도 작가한테 제대로 설명조차 듣지 못한 상태에서.
유_그래서 중간중간마다 감독님한테 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확인했어요. 딱 그 정도만 물었죠. 사실 저는 대본 리딩한 뒤로 작품 종료할 때까지 작가님과 따로 연락 한번 안 했어요. 만약 작가님이 그 대사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해줬다면 오히려 그만큼 좋은 연기가 안 나왔을 것 같아요. 일단 작가님은 믿고 기다려주신 것 같아요.
민_아무래도 100% 사전 제작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결말을 알 순 없잖아요. 이창준의 운명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시점이 궁금합니다.
유_14화가 끝날 때쯤에서야 이 모든 게 이창준의 빅픽처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저도 전혀 몰랐죠. 물론 알고 나서도 공개할 순 없었고요.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인터뷰를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셈이죠.
민_아무래도 배우 입장에선 그 대목을 모르고 이창준이란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 같습니다. 악의 단서가 너무 많은 인물이니 자칫하면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으니까요.
유_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내 연기가 맞는 건지. 촬영 기간 내내 그런 큰 그림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이창준이 범인이냐고 물어보면 “임금님은 당나귀 귀” 이러시고.(웃음) 그냥 지금 하는 게 맞다고 하시니 매회 대본이 주는 느낌에만 집중해서 갔어요. 그런데 뒤늦게 대본의 대사를 돌아보면 굉장히 많은 설계와 힌트가 있었던 거 같더라고요.
민_어쩌면 결말을 알게 됐을 때 새삼 아찔한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까요? 만약 유재명이 절대악이었다고 단정 짓기라도 했다면 완전히 아귀가 안 맞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유_사실 이창준 본인도 이런 운명을 맞게 될지 몰랐을 거 같아요. 인천의 폐건물에서 떨어져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살았을 테니. 어쩌면 그게 인생이겠죠. 우리도 우리 삶의 엔딩을 모르고 살잖아요. 그렇게 결말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 배우 역시 캐릭터의 결말을 모르는 걸 받아들이고 연기해내는 게 당연한 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촬영 당시 이창준에 관해 생각한 키워드는 위악이었어요. 절대악이었다면 오히려 연기하기 편했을 거예요. 어쩌면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이창준이 신비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예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인물로 느껴지니까. 비밀스럽고.
신_그래서 <비밀의 숲>이죠. 그리고 이경영 배우가 연기한 이윤범 회장이 절대악이고요.
유_덕분에 이창준을 표현하는 매 순간마다 그가 위악적이라는 느낌을 더욱 확실히 받았어요.
신_모든 게 이창준의 빅픽처였지만, 이창준은 결코 완벽한 설계자는 아니었던 거죠. 정의로운 검사를 꿈꿨던 재벌가의 사위. 자기 안에서 자꾸만 분열되는 거죠. 괴물이 돼버린 거고. 이창준이 그런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면 <비밀의 숲>의 반전이 그렇게 여운이 길지 않았을 거예요. <오션스 일레븐> 같은 케이퍼 무비가 주는 반전의 쾌감 정도로 그쳤겠죠.
유_부산에서 연극 활동할 때 선배들한테 반복적으로 받았던 질문이 있어요. “이 상황에서 과연 인간이 이렇게 행동할까?” 실연당하는 장면이든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는 장면이든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연기로 보여줘선 안 된다는 거였어요. 외로움으로 연기해야 한다고 했어요.
민_외로움으로 연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유_욕망의 근원은 결핍이죠. 외로움은 인간이 지닌 근본적 결핍이고. 결국 욕망을 표현하는 건 외로운 존재가 지르는 비명처럼 보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게 연기로 표현돼야 한다는 거고요.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저는 그 말에 공감했어요. 그렇게 표현할 수 있도록 작품도 많이 했고. 결국 사람을 표현한다는 건 그 사람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 사람인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가슴 깊숙이 들어가 보여주는 것. 그런 마음으로 연기했으니, 이창준은 그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이 된 거죠. 가진 것이나 누리는 것과 상관없이 존재 그 자체로 외로운 사람인 거죠.
민_1~2회가 방영된 뒤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고 하셨더군요.
유_아까 말한 것처럼 저는 이창준의 외로움을 연기했는데 너무 폼 잡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너무 연기를 억누른 게 아닌지, 그런 게 제 눈엔 많이 보였거든요.
민_배우 역시 결말을 모르니까 결국 감독이나 작가의 힌트 안에서 유추해서 연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유_그래서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던 게 황시목 앞에서 “내가 안 죽였어!”라고 강변할 때였어요. 제가 범인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대사를 소화해야 했으니까요. 일단 배우 유재명으로서는 그 대사를 멋지게 소화하고 싶었어요. 제가 선택한 톤은 위악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위악을 버리고 진실처럼 보이고 싶었죠. 제가 생각하는 이창준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 순간만큼은 진실해지자는 거죠. ‘내가 죽인 게 아니다. 이 세상이 그 사람을 죽인 거다.’ 이런 논리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고 봤어요. 황시목은 작은 죽음과 큰 죽음은 없다고 말하지만, 이창준에겐 작은 죽음과 큰 죽음이 있을 수도 있고요. 이창준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수도 있죠.
신_인간은 원래 일관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이창준은, 황시목이 아니니까.
민_결국 이창준을 움직이는 건 두 가지 명분인 것 같습니다. 일단 하나는 정의. 사실 이건 황시목한테도 있는 명분이죠. 그런데 이창준한텐 정의 말고 사랑이라는 명분도 있어요. 이창준이 연재한테 고백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너밖에 없었어.” 어쩌면 이창준의 정의보다도 이창준의 사랑이 진심이었다는 게 드러나서 이창준을 향한 시청자들의 애정이 더욱 커진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유_어느 순간부터 연재에 대한 이창준의 진심을 알게 되는 대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 당신이 법정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서너 개밖에 안 되는 신이기도 하고, 그냥 툭 던지듯 하는 대사지만 그 안에서 이창준이 연재를 사랑했다는 게 느껴지죠. 이 사람이 정말 아내를 사랑했고, 그것이 이 사람의 행복이자 고통이었다는 게 드러나죠. 결국 사랑 때문에 그런 결말로 갈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민_어쩌면 <비밀의 숲>을 위대한 드라마로 만든 건 황시목이 이창준을 ‘시대가 만든 괴물’이라 규정한 덕분이 아닐까요? 만약 <비밀의 숲>이 이창준을 그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으로 남겼다면 드라마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생겼을 거예요. 그런데 황시목이 이창준을 비판하면서 여운과 울림이 남죠. 덕분에 이창준이란 인물도 정당한 평가를 받은 거 같고요.
유_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아찔한 부분이 있어요. 만약 이창준의 유서가 심금을 울리지 못하면, 제가 만들어낸 선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작품의 감동이 뚝 떨어졌을 거예요. 용두사미의 드라마가 됐겠죠. 모든 작품이 부담스럽지만 이 작품에서의 부담감은 상상 이상이었어요. 제가 <비밀의 숲> 엔딩을 소화하게 됐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겠지만 제 입장에선 자칫 잘못했으면 큰일이었을 거예요. 그런 대사가 진실되게 전달되지 못하고 황시목과 균형을 이루지 못헀다면, 저는 되게 모자란 배우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보시다시피 지금 흰머리가 많은데 전부 <비밀의 숲>을 하면서 생긴 거예요.(웃음)
민_이창준과 황시목의 아슬아슬한 힘 싸움이 <비밀의 숲>을 보게 만드는 묘미이기도 했죠. 그리고 이창준이란 인물의 이중성을 배우가 잘 이해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유_그동안 쌓아온 제 배우 이력이 이창준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영화에선 대부분 단역을 맡아오다 조금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된 건 2~3년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반면에 연극 무대에선 다양한 작품을 했죠. 직접 극단도 운영했고. 제가 서울에 와서 마지막으로 연출한 연극이 알베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이에요.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저예산으로 연출한 마지막 작품이었죠. 두 주인공이 정의를 놓고 논쟁을 하는 연극인데 그때의 경험이 이창준의 정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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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_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유_평범하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면서 딱히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운명처럼 학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스무 살 때 처음 연극을 했고 그때부터 계속 이 길을 걸어왔네요. 연극을 시작하고 나선 연극밖에 안 했어요. 연극하고, 술 먹고, 연애하고. 아는 형들 만나서 또 연극하고, 술 먹고, 싸우고. 그러다 어느 날 눈떠보니 서울에 와 있고.
신_결핍이 욕망을 만들어낸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유재명이 연극을 계속 욕망하게 만든 결핍은 무엇일까요?
유_가장 솔직한 대답은 이기적이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잘 먹고 잘 사는 수단이 아니라 그냥 저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이 연극이었으니까요. 결국 어떻게 보면 저는 가족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희생을 통해 살아온 셈이잖아요. 지금은 어머니가 되게 좋아하시지만.
민_무명 생활이 길었다고 들었습니다.
유_영화나 드라마를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왔지만 적응을 못 했어요. 심지어 마흔이 넘어서 올라왔으니까 고집도 세진 터인데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응답하라 1988>도 하고, <욱씨남정기>도 하게 됐죠. 그런데 <굿와이프>에서 신체 장애가 있는 변호사 역할이 들어왔을 땐 ‘괜히 한다고 한 건가?’ 생각했어요. 제가 예전에 연극할 때 지적장애인 연기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왠지 내가 했던 연기를 흉내 내는 거 같아서. 하지만 좋은 기회였으니까 해야 했죠. 어쨌든 요즘은 어디 가서 감사 기도라도 올려야 할 거 같아요. 저 혼자 잘해서 된 게 아닌 거 같거든요.
민_<굿와이프>에 출연할 때 전도연 씨가 연기하는 걸 보고 정말 장애인인 줄 알았다고 했더군요. <굿와이프>에서 연기한 손동욱 변호사는 변론에 자신의 장애를 이용할 정도로 능수능란한 인물이죠. 그런 면에선 <비밀의 숲>의 검사장과는 다른 종류의 악인이기도 하고요.
유_<굿와이프> 대본을 받았을 때 번쩍 든 생각인데, 제가 연극에서 지적장애인을 연기할 때 모델이 있었어요. 뇌성마비에 걸린 지인이 있었거든요. 사실 배우가 어떤 인물을 분석하고 해석해서 표현하는 데엔 한계가 있어요. 결국 저만의 냄새 같은 것이 필요한 거죠. 많은 경험이 필요한 일이에요.
민_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서왔기 때문에 되레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때 시행착오를 겪진 않았을까요?
유_연극 무대에 마지막으로 선 건 2~3년 전이었을 텐데 아직도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요. 환경이 바뀌면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없던 울렁증도 생기고 심지어 탈모도 생겼었죠. 처음에는 대사 한마디 치는데 한 100번 연습한 거 같아요. 그래도 떨리더라고요.(웃음) 어떻게 잘 풀려서 여기까지 온 거 같네요.
민_연기는 일찌감치 시작했는데 왜 마흔이 돼서야 서울로 올라오신 건가요?
유_사실 서른 살 때 1년 반 정도 서울에 올라와 있었어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거든요. 대학교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고 바로 올라왔는데 영화 하는 형들이랑 ‘뻘짓’만 하다 내려갔죠.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올라온 거예요. 부산에서 큰 작품 하나 연출하고 방전된 상태에서 가방 하나 들고 놀러 왔다가 눌러앉아버렸죠.
민_<비밀의 숲>은 일반적인 드라마에 비해 컷의 호흡이 긴 편이에요. 심지어 원 테이크 신도 많고요. 이런 호흡이 연극에 익숙했던 배우 입장에선 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유_그랬던 것 같아요. 대화 신도 심호흡하는 기분으로 했던 거 같고요. 그래서 배우들끼리 동선을 짜고 거기 맞춰서 카메라를 이동하기도 하고, 감독님께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민_<바람>이라는 영화에서 1인 2역을 맡았습니다. 과외 선생님으로 등장해 정우 씨와 길게 대사를 주고받는 원테이크 신이 있었죠. 사실 잠깐 치고 빠지는 역할이었음에도 긴 호흡의 대사를 맛깔스럽게 해서 인상 깊게 남았어요. 그런데 <바람> 덕분에 <응답하라 1988>에 캐스팅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유_<응답하라> 시리즈의 신원호 감독님이 저예산 독립 영화을 좋아하셨어요. <바람>뿐만 아니라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저를 보셨대요. 그래서 섭외 제안을 하셨고, 오디션을 보게 됐죠.
민_<바람>에 출연했을 때 이 영화가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셨을까요?
유_그렇진 않았죠. 당시 부산에서 연극할 때였는데 부산 로케를 내려오는 영화들이 종종 단역을 뽑았어요. 나름 짭짤했죠. 그래서 열심히 촬영하고 출연료 받아서 후배들 술 사주고 그랬어요. 그때는 그냥 그런 거였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영화를 보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특히 조감독들 중에 <바람>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신기했죠. 어떤 한 순간이 많은 것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연결돼서 또 연결되고.
신_혹시 단역으로 출연한 횟수를 기억하세요?
유_지금까지 제 영상 필모그래피가 37개래요. 어떤 분이 그걸 정리해놓은 걸 봤는데 대단하더라고요. 어떻게 다 찾았을까? 얼굴도 잘 안 보이는데.(웃음)
신_단역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유_지금 생각해보면 잘 버틴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스스로 거만해진 거 같네요.(웃음)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역할을 얻지 못할까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죠. 캐스팅됐을 땐 고맙다가도 막상 현장에 나가면 못난 생각이 올라올 때도 있었어요. 많은 단역배우들이 그런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죠. 그 상황을 이겨내는 분도 있고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운 순간들이지만 힘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신_뭐가 가장 힘드셨나요?
유_일단 심심하니까. 힘든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심심한 거래요. 내 인생의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도 중요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현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분들이 생기면 반갑죠. “선배, 이쪽에 앉으셔야지”라면서 그늘 자리 봐주고, 얼음물 주시는 분들도 있고.
민_혹시 단역배우 생활에 지쳐서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유_많이 했죠. 장사나 할까 생각했고.
민_만약 내가 그때를 못 넘겼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없었을 거라 생각한 상황이 있을까요?
유_서울 생활 3년 차 정도가 됐을 때였는데 그때 정말 힘들었던 거 같아요.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내려갈까 생각도 했고. 출연 중인 드라마가 있었는데 제가 그런 상태이다 보니 재미를 못 느꼈어요. 만약 <응답하라 1988>을 못 했으면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민_그렇다면 그 힘든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일말의 계기가 있나요?
유_자주 같이 술 마시는 후배 몇 명이 있는데 한잔하다 보면 그 친구들이 저를 되게 존중한다는 게 느껴져요. 그래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죠. 그런데 일이 잘 풀리면서 그 친구들에게 한잔 사게 되면 언젠가부터 제가 잔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검열을 하게 됐어요. 최근에는 그 친구들한테 이런 부탁을 했어요. “만약 너희들이 내 연기를 보다가 재미없으면 내 뒤통수를 한 대 때려줘. 그게 나한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어쨌든 그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했어요. 그중에 제 여자 친구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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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_ <비밀의 숲> 이전엔 <응답하라 1988>의 코믹한 이미지로 잘 알려졌지만 부산 연극계에선 이미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유명했다고 하더군요.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모두 가진 배우란 거죠.
유_그렇게 표현해주시는 감독님들이 있어서 좋았어요. 어쩌면 <비밀의 숲>을 통해 균형이 맞춰졌으니 뿌듯하기도 하고요. 물론 슈트 입는 역할만 고집할 생각은 없죠. 예를 들면 조금 어수룩하거나 순박한 동네아저씨도 괜찮아요. 작품이 좋고, 저를 간절히 원하는 역할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관심이 있죠.
민_ <바람> 덕분에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할 수 있었듯이 영화 <하루>의 제작진이 <비밀의 숲> 제작진에 유재명이란 배우가 괜찮다는 말을 전해준 것이 캐스팅 기회로 이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배우가 작품에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작품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또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유_사실 처음에는 몰랐어요. 나중에서야 저를 추천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짠한 기분도 들어요.
신_저는 유재명 씨에게서 송강호나 김윤석 같은 배우를 처음 볼 때의 기분을 느껴요. 그래서 한편으론 작품 운만 잘 따른다면 큰 배우가 되실 거라 생각하고요.
유_그런데 저는 오히려 욕심을 내려놓고 싶어요. 지금보다 조금 아쉬운 입장이 되더라도 저라는 배우를 더 다질 수 있는 시간을 갖자고. 그래서 비중 있는 역할, 슈트발 죽이는 작품,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삼는 걸 경계하자고 생각해요. 저를 지켜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이라 순간순간 훅 달뜰 때가 있더라고요. 이젠 정신 차리고 다음 작품을 생각해야죠.
신_끊임없이 복기하는 성격이라면 정신을 놓으실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강박 탓에 힘들 수는 있을 거 같은데요.
유_그래서 그런 강박을 놓으라는 얘기도 많이 들어요. 사실 배우를 오래 하고 싶진 않아요. 지키지 못할 말일 수도 있지만 적당할 때 그만두고 싶어요.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직업만 갖고 사는 건 의미 있고 존경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반대로 한 가지 직업만 고집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일 때도 있어요. 물론 일이 지겨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또 다른 재미가 느껴지는 삶이 있다면 좋겠다는 거죠.
신_혹시 여자 친구에 관한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유명세 덕분에 여자 친구까지 세간의 관심을 받는 상황이 됐어요.
유_사실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어요. 어쩌다 보니 이 나이까지 결혼을 못 한 것뿐이고요. 물론 처음에 기사가 났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죠.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야, 무슨 이런 기사 났어! 쓸데없는 소리 하네” 그런 식이었어요.(웃음)
신_갑자기 나이 차이 같은 게 뉴스가 됐으니까요.
유_여자 친구와 함께 방배동으로 청소년 연극 수업을 하러 가다가 버스 안에서 그 기사를 같이 봤는데 그때 서로 마주보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실시간 인기 검색어까지 올라오는데 우린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시계 안에서 살아온 커플이니까. 다만 그런 것까지 이슈가 되는 걸 보면서 ‘역시 좀 색다른 세계이긴 하구나’ 생각했죠. 사실 나 같은 사람의 연애까지 뭐가 그리 궁금할까 싶어요.
민_아무래도 <비밀의 숲> 시즌 2가 제작되면 출연하진 못할 텐데, 아쉽지 않나요?
유_그래서 만약 <비밀의 숲> 시즌 2가 제작되면 100kg까지 살을 찌울 테니까 다른 역할을 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사실 작가님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을 거 같아요. 시즌 2 제작을 바라는 목소리가 애정이 담긴 요청이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시청자로서 애정을 갖고 봐야죠. 그런데 만약 깜짝 출연이라도 필요하다면.(웃음)
신_40대이신데 남자에게 40대는 무엇일까요? 사랑도 죽음도 삶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나이일까요?
유_제가 이제 마흔다섯인데 50대를 바라보는 선배들을 보면 몸이 되게 안 좋더라고요. 관리를 못 하고 막 살아서. 그런 거 보면 걱정되죠. 그리고 사실 제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운전을 못해서 중고차를 하나 샀는데 2년 동안 다섯 번 몰았나? 취미도 별로 없어요. 유일한 취미가 동네 친구들이랑 당구 한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셋집 하나를 빼면 모아둔 것도 없고. 말하고 보니 별로 한 게 없네요. 그래도 40대 중반은 괜찮은 나이인 거 같아요. 뭔가를 많이 해야만 되는 나이라 생각하지만 반대로 내가 아직은 이 정도밖에 못 했다는 걸 인식해도 괜찮은 나이라고 생각하니까.
신_비로소 슈트를 입게 되는 나이일지도?
유_40대 초반까지 양복 한 벌로 지내다가 얼마 전 맞춤 양복을 서너 벌 샀어요. 지난 10년간 그 양복 한 벌을 입고 무대 인사도 가고, 단편영화도 찍었죠. 그래서 집에 걸린 새로운 양복을 보면 낯설어요. 슈트를 입고 연기했지만 자연인 유재명의 삶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런 낯선 시간을 인식하는 나이가 된 거 같아요. 주위도 보이기 시작했고. 나를 위해 고생하는 사람도 보이기 시작해서 갚아주고 싶고. 여유를 갖고 싶어졌어요.
신_덕분에 중년의 로맨틱 아이콘이 된 거죠.
민_멜로 영화를 찍고 싶다고도 하셨는데 본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시나요?
유_멜로를 하고 싶다는 건 나도 그런 거 잘할 수 있다고, 반쯤은 농담처럼 한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만약 제게 그런 역할이 주어진다면 제가 하고 싶은 사랑은 멋진 사랑보단 찌질하거나 구질구질하더라도 사람 사는 모습이 담긴 짠한 멜로예요. 어쨌든 <비밀의 숲>에 로맨스가 있었으니 소원 풀었죠.
신_마지막 질문입니다. 행복하세요?
유_행복이란 단어에 집착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메모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메모를 안 하고 있네요. 결국 행복에 관해 메모하지 않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거 같아요. 행복에 대해 정의하기 위해 혹은 남들에게 말해주기 위해 썼던 거 같은데 이젠 안 쓰니까요. 요즘은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자체를 까먹고 지낸 거 같아요. 그럼 잘 살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만큼 행복한 거 같고요.
Credit
- 에디터/ 신 기주
- 사진/ KIM C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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