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징징거림에 대하여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피해자는 침묵하고 가해자는 억울해한다. 가해자는 더 강렬하게 징징댐으로써입장의 전복을 시도한다. 피해자는 침묵하고 가해자의 폭력은 희미해지는 나라, 지금의 한국이다. | A Thousand Words,강간,한국사회

“그런데 이상했어요. 다 사라졌어요. 피해자도 가해자도 사라졌어요. 친구들 진상조사위원회에 결과는 올라왔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그동안 피해자는 어쨌든 감당해야 하는 거죠. 가해자들은 피하고 피하다가 징계를 받긴 했어요. 정학이었나?”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 마지막 학기에 재학 중인 학생 A가 말했다. 약 1년 전에 단체 카톡방에서 있었던 성희롱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발단은 이랬다. 군인 신분이었던 남자 A는 휴가 중이었다. 평소 호감이 있던 여자 A와 술을 마셨다. 남자 A에겐 여자 A와 섹스를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어찌어찌 둘이 같은 방에서 술을 마셨는데 남자 A가 취해서 먼저 쓰러졌다. 여자 A는 낌새가 이상해서 남자 A의 전화기를 열어봤다.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엔 여자 A를 비롯한 같은 과 다른 여자 동기에 대한 다양한 성적 대상화와 비하의 표현이 난무하고 있었다. “‘걔는 왜 나한테 안 대주냐’는 말부터 뭐, ‘주절먹’이라는 말이 있대요. 혹시 아세요? ‘주면 절하고 먹는다’는 말이에요. 자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그중 한 명은 이 문제가 페이스북에서 공론화된 후에 징계를 받기 전에 학교를 그만뒀다고 들었어요. 안 그래도 재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가해자도 여럿, 피해자도 여럿이었다. 각기 다른 대학에서 비슷한 사건이 이미 수차례 보도된 적 있었다. 구체적인 사례는 달랐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남학생들끼리 모인 대화방이 있고, 그 안에서 여학생들에 대한 성희롱 발언이 다양한 층위의 언어로 오가는 식이었다. 대학생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일탈 같은 게 아니었다. 이미 공론화된 것만 각계각층이었다. 현직 남자 기자 몇몇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서 여자 기자들을 대상으로 “성감대가 많다”거나 “가슴이 큼” 같은 식으로 희롱한 것도 얼마 전이었다. 여러 대학과 지방 공기업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터졌다.하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다. 댓글에선 마음 놓고 가해자에 동조한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지만 남자들끼리 모이면 늘 벌어지는 일”이라는 식은 점잖은 축이다. “사적으로 나눈 대화를 공론화시켜서 처벌까지 받게 하는 건 오히려 역차별 아니냐, 사생활 침해다”라는 말까지 나오면 그땐 좀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폭력의 1차 피해자를 살피지 않고 가해자와 자기를 같은 집단의 일원으로 동일시하면서 두둔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사생활 침해’라는, 아주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프레임의 전환을 시도한다. 단톡방 성희롱에 대해 법원은 이미 모욕죄를 적용하고 있다. 남자들끼리 낄낄거리는 농담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희롱은 어디서나 범죄다. 두둔한다고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학술적으로는 이미 검토가 끝난 얘기다. ‘강간 문화’라는 용어에 이제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느껴지는 그대로의 의미다. “강간이 만연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여겨지는 환경.” 위키피디아는 강간 문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강간이라는 용어가 읽기에도 좀 폭력적으로 여겨진다면, 성폭력 혹은 성희롱으로 바꿔도 다르지 않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조금 더 일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의미가 된다. 강간 문화에는 이런 말들이 해당한다. “여자가 그렇게 유혹하는데 남자가 그럼 어쩌라는 말이냐.” “남자의 본능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할 때 여전히 흔하게 하는 말이다.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한순간에 전복하려는 말이다. 폭력의 가해자를 두둔하면서 피해자가 근거를 제공했다는 클리셰다. 정확히 강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변명이다.강간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일상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수 있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것을 여성성으로,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것을 남성성으로 치부하는 것도 전형적인 강간 문화의 소산이다. 단톡방에서 벌어지는 광범위한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그 성희롱을 두둔하는 모든 언어도 강간 문화의 소산이다. 자기도 모르게 범죄 가해자가 되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목소리에 굳이 힘을 보태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인식은 하는 편이 낫다.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가 쓴 책 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대다수 남성들의 본심은 폭력적인 남성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함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우리의 침묵이 결과적으로는 동의의 표현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 한다. (중략) 폭력적인 남성들은 선한 남성들이 계속해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믿음을 공유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여성에게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게 말이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선한 남성들이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 피해자들을 괴롭히길 원한다. 피해 여성이 왜 거기에 있었으며, 알아서 조심하지 않고 왜 그런 치마를 입었는지를 캐물으며 여성들을 취조하길 원한다."강간 문화에 동조하는 거의 모든 목소리가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가해자에겐 징징거림의 빌미를 준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앞서 단톡방 사례를 들려줬던 학생 A는 대학 내에서 간간이 벌어지는 모든 성희롱 혹은 성폭력 사건의 양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가해자의 폭력보다는 피해자의 고통에 의미를 더 부여하는 것 같아요. 어떤 편견과 이미지를 강요한달까요? 피해자는 무기력해야 하고 행복하면 안 되고 심지어 꽃뱀으로 몰리기까지 하죠. 기사에서도 그래요. ‘씻을 수 없는 상처’ 뭐 그런 말들. 맞는 말이지만, 그건 피해자가 결정하고 극복할 일이죠. 씻을 수 없는 폭력은 가해자가 행한 건데, 낙인은 피해자한테만 찍히는 거예요. 가해자는 기사에서도 거의 안 보여요. 사라져 있죠.”실은 오랫동안 거의 모든 사례에서 반복돼왔다. 영화 의 실제 사건이었던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에서도 그랬다. 경찰 조사 중엔 “네가 좋아서 찾아간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가해자 가족에 의한 2차 폭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피해자에 대한 배려 같은 건 없었다. 1년간 44명의 남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당한 성폭력 피해자가 조사 과정과 이후 모든 시간에 겪어야 했던 일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양상은 같다. 남성이 가해자고 여성이 피해자인 거의 모든 경우의 폭력에 대해, 어떤 남자들은 강간 문화를 바탕으로 알게 모르게 동조하고 있다. 피해자가 설 수 있는 땅은 점점 더 좁아지고, 가해자에겐 징징거림의 기반이 된다. 약자에 대한 폭력이 문화와 동조를 기반으로 확대 재생산된다.2016년 9월 에 서민 교수가 기고한 칼럼의 제목은 “요즘 한국 남성의 상징은 징징거림이로구나!”였다. 칼럼에는 두 가지 예가 있다. 하나는 제천여성도서관, 또 하나는 부산 지하철의 여성 전용 칸이었다. 제천여성도서관은 김학임 여사가 제천시에 기부한 11억원에 제천시 예산 8억원을 보태 1994년에 지은 것이었다. 김학임 여사는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억울함으로, 여성이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여기에 ‘남성연대’라는 단체가 나타난 건 2012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6명뿐이었지만 출현의 이유는 과연 보편적이었다. 여자만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은 역차별이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경제 논리였다. 도서관 운영에는 남자들이 낸 세금도 쓰인다는 말이었다. 지하철 여성 전용 칸에 대한 반응도 정확히 같다. 서민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이들은 도대체 왜 화가 났을까? 9000개가 넘는 댓글을 대충 훑어보니 남성들이 분노한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역차별’을 당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제 하다 하다 남녀평등을 넘어 여자들이 원하는 건 여성 상위 시대네’라든지 ‘내가 내는 요금으로 운영되는 지하철에 여성 전용 칸이 있다면 남자에겐 요금을 깎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징징거림’이라는 말은 현상에 비해 다소 귀엽게 여겨지지만 그 정서의 바탕은 사실 분노에 가깝다. 거의 모든 역차별 주장의 정서적 기반 역시 분노다. 남자들은 다 같이 화를 내고 있다. 단톡방 성희롱 사건에 대해 “우리끼리 그런 말도 못 하냐”는 식으로 ‘사생활 침해’의 프레임을 들고 나올 때의 그들도 분노하고 있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좋아서 간 거 아니냐”, “여자가 그렇게 유혹을 하면 남자가 어떻게 버티냐”는 식의 말은 억울함의 호소처럼 들리지만, 그 뿌리에는 좀 뒤틀린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제천여성도서관을 찾아갔던 남성연대도, 지하철 여성 전용 칸에 역차별 운운하는 감정적 기반도 다르지 않다. 다시, 토니 포터의 책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남성들은 남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분노를 표현하는 것만은 예외다). 우리는 남성으로서 감정을 공유하거나 내보이는 건 나약함의 증거라고 배웠다. (중략) 우리가 배운 ‘남자’가 되는 법의 대부분은 여성의 성향이나 관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서 시작된다.” 이 거리 두기에 대해 를 쓴 칼럼니스트 위근우는 조금 더 한국적인 맥락에 대해 말했다. “물론 모두에게 힘든 시대죠.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들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한다는 건 잘못된 구도예요. 피해자의 입장에 눈을 감았을 때만 가능한 논리예요. 상대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 공감 능력에 문제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일단 본인이 힘들어서 그런 것 같고, ‘맥락맹’이 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반지성주의 사조도 결합돼 있지 않을까요?”강간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일상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수 있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것을 여성성으로,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것을 남성성으로 치부하는 것도 전형적인 강간 문화의 소산이다. 단톡방에서 벌어지는 광범위한 성희롱도 마찬가지다.개인적으로 ‘징징거림’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한 건 2014년 초였다. 2014년 4월 18일 에 실린 사회학자 엄기호의 강의를 정리한 기사 제목은 “‘징징거림’과 ‘조리돌림’의 세계, 대한민국에서 ‘성장’은 가능한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주된 방식이 ‘내 고통을 징징거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중략) 그래서 사람들은 나날이 서로서로를 고조시키죠. ‘내가 더 고통 받았다’, ‘내가 더 힘들다’고요.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누군가 나한테 고통을 줬기 때문’으로 서사화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대단히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을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겁니다.”누군가 징징거릴 수 있다면 그건 피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연대 안에서라야 옳지 않을까? 고통을 나누고 서로를 지지하는 최소한의 방식으로, 우리는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하지만 고통의 주체는 너무 아파서 침묵하고, 징징거림은 가해자끼리의 연대를 서로 확인하는 이상하고 폭력적인 신호가 되었다. 내가 더 고통스럽다고 겨루고 싸우는 판에서 폭력과 분노는 방향을 잃고 다시 약자를 향한다. 정작 아픈 사람의 목소리가 폭력의 대상이 되고 불행을 겨루는 목소리만 시끄러운 시대. 진짜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