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이 지면에 리모와를 소개하며 “‘프리미엄’이라는 키워드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신분 같은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전통 럭셔리 브랜드는 귀족 사회의 잔재처럼 화려한 느낌이 있다. 프리미엄은 럭셔리보다는 조금 더 지적이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신분을 드러낼 수 있다. 최근 수많은 브랜드가 이 대안적 신분에 몰두한다. 유구한 역사 대신 유연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최고를 지향하기보다 최적을 구현한다. 지금까지의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만들어낸 방향성이다.
그런데 프리미엄 브랜드의 중요한 지점은 절대적 방향일 수도 있지만 상대적 격차일 수도 있다. 20세기의 대중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는 콘셉트 자체의 방향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그 둘은 콘셉트에 따라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대중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의 너무 넓은 틈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흐름을 탄다.
이 위태로운 외줄 타기가 프리미엄 브랜드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때로 대중 브랜드 속에 섞여야 한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럭셔리 브랜드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자신의 콘셉트를 지켜야 한다. 리모와나 아우디 같은 브랜드가 그 아슬아슬한 선을 지켜온 브랜드로 회자된다. 하지만 여행 가방이나 자동차처럼 기술 기반 제품이라면 말이 프리미엄이지, 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럭셔리 브랜드만큼의 투자가 필요하다. 소비자 역시 럭셔리 제품을 고를 때처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여러 번 검증해 프리미엄 제품을 고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모와와 아우디는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의 럭셔리일 수밖에 없다.
하겐다즈도 프리미엄 아이스크림이다. 대신 하겐다즈는 자동차와 여행 가방보다 더 자유롭다. 우선 값싼 아이스크림과 고급 아이스크림의 격차가 매우 크므로 그 사이에서 여러 가지 브랜드 전략을 더욱 과감하게 펼칠 수 있다. 또한 아이스크림은 주로 밥을 먹고 나서 즐기는 후식이다. 사람은 밥을 먹으면 너그러워진다. 구매나 후평가에 따르는 기준 역시 비교적 헐거워진다.
하겐다즈는 프리미엄 브랜드 운용의 고전과도 같다. 이들이 모범 사례로 회자되는 이유는 아이스크림이라는 산업의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이스크림은 트렌드나 기술적 변화에 영향을 덜 받으므로 연구개발 비용이라는 변인이 적다. 하겐다즈가 태어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지켜야 했던 건 하나뿐이다. 맛. 달콤하고 유혹적인 맛.
하겐다즈의 창립자는 이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철저히 프리미엄이라는 포지션을 노렸다. 지금 하겐다즈를 떠올릴 때 그려지는 이미지는 대부분 그 의도된 프리미엄화의 산물이다. 마케팅이나 브랜딩 관련 도서에서 나오는 사례도 모두 프리미엄 전략과 관련한 내용이다. 하겐다즈는 시대에 앞서 프리미엄이라는 고지에 깃발을 꽂은 덕분에 업계에서 남다른 포지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선점한 이미지를 늘 영리한 방식으로 유지했다.
하겐다즈가 나오기 전까지의 아이스크림은 어린이들의 간식 아니면 싸구려 빙과 제품이었다. 하겐다즈의 창립자 루번 매터스와 로즈 매터스 부부는 자신들이 새로 만들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이런 기존의 인식과는 완벽히 다르길 바랐다. 이들은 아이스크림의 격을 올리려 했다. 특별한 식사의 연장처럼. 그 일환으로 이들이 가장 먼저 만든 건 설비나 재료가 아니라 이름이었다. 하겐다즈(Hagen-Dazs).
북유럽권 언어에서나 볼 수 있는 움라우트(ä) 기호가 들어간 이 단어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 특정 지명도, 어떤 단어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스펠링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Hagen-Dazs’라는 이름을 보면 왠지 유럽 어딘가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대대손손 이어지는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진 아이스크림일 것 같다. 이 이름은 50년이 넘도록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지만 알고 보면 아무 뜻도 없고 형태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에 큰 뜻이 없기 때문에 하겐다즈의 정체불명 이국적 이미지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사람들도 아이스크림 같은 것에 족보를 따질 정도로 피곤하게 살지는 않는다. 모두 적당히 신비로운 이미지를 적당한 수위에서 즐겼다.
일본의 가전 브랜드 발뮤다 역시 하겐다즈와 같은 배경으로 이름이 만들어졌다. 발뮤다의 작명 공식도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느낌이 좋은 음절의 조합’일 뿐이다. 우연히도 막연한 느낌을 이름으로 구현한 발뮤다 또한 하겐다즈처럼 프리미엄의 영역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모든 전략은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하겐다즈와 발뮤다에서 드러나는 프리미엄 전략도 마찬가지다. 소비자에게 많은 걸 설명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 것.
요즘의 프리미엄 브랜드와 달리 하겐다즈는 구구절절하지 않았다. 하겐다즈는 자신들의 아이스크림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귀하게 구한 어떤 우유를 쓰는지, 왜 가격이 기존 아이스크림보다 40%나 비싼지 이야기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이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를 각인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들은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신문이나 TV 광고 등이 아니라 프리미엄 유통처라는 전략을 썼다. 하겐다즈는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 제품을 샘플링했다. 오페라나 뮤지컬이 열리는 극장이나 테니스 경기장 내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고급스러운 장소의 이미지를 아이스크림에 붙인 것이다. 1960년대 당시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최근 선보이기 시작한 국가별 광고 역시 ‘뭔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아이스크림에 얹는다’는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켜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살짝 녹인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초코&브라우니 맛은 푹신한 소파 위에서 커다란 스푼으로. 이런 식으로 기획된 하겐다즈 광고는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에 함께한다는 어필인 셈이죠.” 일본에서 유명 푸드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스위츠 반초의 말이다.
하겐다즈는 아이스크림이라는 물건을 상상하게 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즐기고 있는 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쓰는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건 꽤 효율적이고 성공률이 높은 접근법이다. 하겐다즈의 딸기 아이스크림에 오레곤주 딸기가 몇 개나 들어가는지를 설명한다면 하겐다즈는 수많은 유기농 아이스크림 브랜드와 같은 곳에서 경쟁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인들이 하듯 프레임을 바꿨다. ‘하겐다즈를 먹어야만 하는 순간’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겐다즈보다 더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찾는 게 아니라 하겐다즈가 필요한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물건을 쓰는 순간을 표현하는 건 프리미엄 브랜드의 모범 답안이다. 하겐다즈가 1980~1990년대에 이어 지금까지 이어온 마케팅 방식을 수많은 브랜드가 차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플과 레인지로버와 티파니와 미니는 다른 브랜드와 철저히 분리된 세계를 구축했다. 이럴 수 있었던 것도 경험과 캐릭터에 집중한 브랜드 이미지를 꾸준히 쌓아온 덕분이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어려운 점은 아까도 말했듯 친근한 곳에 있으면서도 분리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하겐다즈는 정말 탁월하다. 이들은 대중적인 판매처에 하겐다즈 제품을 유통시킨다. 대신 그 제품을 사는 경험을 물리적으로 철저히 나눈다. 그 결과 하겐다즈 전용 냉동고 같은 게 나왔다. 사실 하겐다즈는 편의점과 마트와 대형 슈퍼마켓에서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하겐다즈를 일반적인 빙과류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하겐다즈는 하겐다즈 냉동고 안에만 있고, 하겐다즈 냉동고 안에는 하겐다즈만 있기 때문이다. 하겐다즈의 로고가 새겨진 별도의 냉동고는 하겐다즈 월드로 들어가는 또렷한 상징이자 관문이다. 하겐다즈는 이렇게 꾸준히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프리미엄이라는 이미지를 갖도록 훈련시켰다.
그러다 보니 아주 흥미로운 역전이 이루어졌다. 20~30년 전부터 프리미엄 이미지를 갖기 위해 하겐다즈의 제품을 찾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항공사의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 공항의 비즈니스 라운지, 호텔의 룸서비스 혹은 고급 극장의 디저트 메뉴에 늘 하겐다즈의 이름이 오른다. 하겐다즈 특유의 맛을 원하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은 프리미엄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하겐다즈 로고를 쓰는 셈이다. 가장 극적인 예가 1990년대의 싱가포르항공과 캐세이퍼시픽이다. 이들은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하겐다즈를 맛볼 수 있다’는 걸 대표 서비스로 내세웠다.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비즈니스 클래스급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개념을 아이스크림 한 통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사업주 입장에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주느냐 마느냐는 작은 차이일 수 있다. 하지만 손님 입장에서 하겐다즈는 사업주가 들인 비용 이상의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경험적 측면에서 카페나 레스토랑의 디저트 메뉴를 컨설팅할 때 아이스크림은 꼭 하겐다즈를 쓰라고 적극 권합니다. 그래야 객단가가 올라간다고 말이죠.” F&B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어느 셰프가 설명하는 ‘하겐다즈 효과’다. 그의 말처럼 하겐다즈 효과는 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유효하게 작동한다.
오랫동안 이어진 캠페인 때문에 우리는 ‘하겐다즈 효과’가 유발하는 ‘하겐다즈 기분’을 상상할 수 있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이름도 어려운 고급 요리를 접하다가 마지막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디저트가 나오는 순간. 그 친숙함과 안도감. 고된 일과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고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꺼내는 순간. 좋은 그릇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위스키 한 잔과 천천히 즐기는 그 순간. 그때 그 순간의 고급스러운 만족감. 이런 경험을 쌓으며 우리는 공산품인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한 통에 개인의 정서와 감정을 이입시킨다. 21세기의 고급화는 곧 개인화다. 나만의 것이 최고의 사치품이다. 하겐다즈는 나만의 것을 경험하게 하는 멋진 재료다. 그렇게 보면 하겐다즈가 가장 사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어떤 브랜드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