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정두언의 마지막 순간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16일 오후, 여느 때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국회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정두언 전 의원 사망’소식이었다. 화려했던 정치인이 지는 순간이었다. | 박근혜,이명박,정치,국회의원,문재인

16일 오후, 어느 때나 다름없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국회에 순간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소식이 가장 빠른 국회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진짜?’, ‘말도 안 돼’ 등의 반응과 탄식이 쏟아졌다. 눈을 비비고 뉴스를 보고 또 봤다. ‘정두언 전 의원 사망’이라는 문장은 변함없었다. 현실이었다. 정두언 전 의원과 가장 가까운 정태근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된 일이죠?”“유서를 써놓고 나간 것은 맞아요. 지금 현장으로 이동 중이에요. 산으로 가고 있어요.”“이유가 대체 무엇인가요. 우울증 때문인가요?”“나중에 통화하시죠…” 짤막한 통화 속에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이 느껴졌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날 오전 10시에 정태근 전 의원과 라디오 생방송을 했다. 방송 후에는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정태근 전 의원은 오늘은 어머니와 약속이 있다며 나중에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라디오 생방송을 마치고 약 4시간이 지난 뒤, 정 전 의원은 서울 홍은동의 북한산 자락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 전 의원의 부인은 이날 오후 3시58분쯤 남편이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드론과 구조견을 투입, 정 전 의원의 시신을 발견했다.정 전 의원은 과거 방송 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 5촌 살인사건을 언급하다가, “내가 (의문사를) 당할까 두렵다”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16일 갑작스런 죽음에 타살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경찰은 CCTV와 현장 감식, 유족 진술 등을 종합해 타살은 아니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대체 무엇이 정 전 의원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게 했을까. 여러 측근들은 ‘우울증’을 거론한다. 최근까지도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한때 MB의 최측근이자 ‘왕의 남자’로 불렸고 잘 나가는 시사평론가라는 타이틀까지 있었지만 속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겪어왔다는 것이다.행정고시에 합격해 관료를 지낸 그의 정계 입문은 지난 2000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시작됐다. 그해 16대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승부욕이 강한 그가 정치인으로서 처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이후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 서울시장 선거캠프에 합류했고, 이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맡았다. MB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시점이다. 국회 입성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을에 재도전해서 결국 성공했다. 이어진 18대, 19대 총선에서도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 정치판에 확실히 자리매김했다.또한 정두언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 1등 공신으로서 장미빛 미래가 가득한 정치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3대 축은 이상득, 이재오, 정두언이라는 말이 있었다. 특히 전략면에서는 정두언을 따라올 수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고 현실은 더없이 냉혹했다.  그는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의 권력투쟁에서 점차 밀려났다. 정 전 의원은 이를 ‘권력의 사유화’로 보고 18대 총선에서 이 전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 파동’을 주도한 바 있다. ‘상왕’을 건드린 대가는 컸다. 친 이명박의 핵심에서 순식간에 변방으로 떨어져나갔다. 국정원의 사찰까지 받는 사건까지 벌어졌다.고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013년에는 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법정 구속돼 열 달 간 옥살이를 했다. 2014년 11월 무죄 확정판결을 받아 누명을 벗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절치부심하여 2016년 20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4선에는 실패했다. 우울증이 더욱 심해진 것이 이 무렵이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자살시도를 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정계를 떠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진 2016년 11월이다. 새누리당을 탈당해 시사평론가로 화려한 인생 2막을 열었다. MB정부의 대한 과감 없는 비판은 물론,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쓴소리를 하며 활약했다. 지난해에는 재혼을 하고 서울 마포구에 일식집을 개업하며 주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일각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으로 음식점 영업 부진을 거론하지만, 지인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정계를 떠나고 나서도 거친 현실 정치에서 상처 받은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소신파’로서 촌철살인의 평론을 통해 방송가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나, 보수진영에서는 ‘배신자’라는 평가도 엇갈렸다. 그는 지난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나름 언행일치 하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이 ‘너 혼자 잘났냐’란 식으로 받아들이니, 항상 외로웠다”라고 토로한 바 있다.그를 ‘친형’처럼 따른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우울증은 정치를 하며 숙명처럼 지니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선 ‘잔인한 7월’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정 전 의원이 사망한 7월, 그로부터 1년 전에는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화려해 보이는 정치 세계 이면에는 이처럼 그림자도 길다.배지를 달고 여의도에서 활약하던 시절, 정두언은 끼 많은 정치인으로 통했다. 2009년 트로트 가수로 정식 데뷔하고 4집 앨범까지 내며 ‘가수 의원’으로 불렸다. 연기에도 관심이 많아 관료 시절에는 드라마 단역 오디션에 참가했다. 최근에는 영화 섭외도 온다며, ‘악역’ 역할을 맡으면 잘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만큼 예술적으로, 정말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 싶었던 ‘풍운아’는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서 머무는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