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라 감독의 <벌새>
<우리집>은 초등학생인 하나(김나연)의 아침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침부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는 일상의 BGM이나 다름없다. 마치 싸우려고 결혼한 것처럼 엄마와 아빠는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날을 세운다. 오늘 아침에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하지만 하나에게는 계획이 있다.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며 분위기를 풀어볼 생각이다. 이미 밥도 지어놨다. 하지만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의도와 달리 왜 밥을 했느냐며 꾸지람을 듣는다. 식탁에는 가족 누구도 앉지 않는다. 그 뒤로도 하나는 직접 장을 보고, 밥을 짓고 가족을 기다리지만 좀처럼 함께 식사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 절친해진 동네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하나가 푸념 섞인 물음표를 뱉는다.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럴까?”
<벌새>는 중학생인 은희(박지후)의 1994년 여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엄마의 심부름을 다녀오다 아파트 층수를 착각해 집을 잘못 찾아간 은희의 머쓱함을 엄마는 모른다. 그저 대파가 시든 거 같아서 신경 쓰일 뿐이다. 은희는 조용한 아이다. 학교에서도 특별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날라리로 지목된다. 실제로 선생님이 지목하는 날라리의 조건은 죄다 충족하고 있다. 남자 친구도 있고, 노래방도 가고, 가끔씩 담배도 피운다. 공부도 썩 잘하는 거 같진 않다. 덕분에 착실하게 학업에 전념하며 서울대 입학을 갈망하는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빠는 은희를 늘 무시한다. 때론 손찌검까지 한다. 대치동에 살면서 공부를 못해서 강북 고등학교에 진학해 아버지에게 괄시를 받는 언니는 매일같이 학원을 빼먹고 밤늦게 집에 들어와 아버지 속을 썩인다. 그런 어느 날 밤늦게 들어온 언니를 혼내던 아버지의 성화가 어머니를 향하고 서로에게 언성이 높아지다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된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은희는 잠자리에서 무심코 물음표를 뱉는다. “우리집은 왜 이렇게 콩가루일까?”
생각해보면 우리집은 참 희한한 단어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집이니까. ‘우리’라는 단어가 내재된 공간성. 그건 결국 집이라는 공간이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가족을 담는 그릇이라고 일찍이 인식한 탓일 거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도 살고 있는 집을 무심코 우리집이라고 말한다. 비록 나 혼자만의 집일지라도 우리집이라 발음하게 되는 건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공간에서 여전히 가족의 여운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단 그것이 그리움이 아닐지라도 가족과 한 공간에서 살아온 기억은 언어의 관성을 통해 종종 무심코 살아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는 애틋하게 기억돼서 더욱 지리멸렬하게 환기되기도 한다. 너무 가까워서 때론 멀어지고 싶고, 너무 맞닿아 있어서 장벽을 치고 싶은 아이러니. <우리집>과 <벌새>는 바로 그런 아이러니를 살피게 만든다. 서로에게 지긋지긋한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함께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거나, 함께 먹고 싶은 사이일 수밖에 없는, 거리를 둘 순 있지만 결코 떨어질 수 없을 거라 믿게 되는 운명적 공동체를 각기 다른 시선으로 관통하면서도 보편적으로 아우른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둥지를 떠나야 하는 어린 새의 운명처럼 세상으로 나아갈 채비를 하듯 성장하는 아이들의 담담하고 단단한 얼굴을 비춘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벌새>의 은희는 집 밖에서 정말 은희다운 아이다. 집 안에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지만 단짝친구를,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한문 학원 선생님을 만나면 표정이 살아난다. 미소가 자연스럽다. 눈이 반짝거린다. 콜라텍도 가고, 방방도 타고, 노래방도 갈 수 있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은희는 가족과 함께 집에 있을 때보다 집 밖에서 더욱 은희 같다. 물론 은희가 가족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은희는 가족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방법을 잘 모르겠다. 식탁에 모여 앉으면 아버지는 늘 오빠 얘기뿐이다. 아버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언니보다도 더 관심을 못 받는 거 같다. 그러니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말을 걸고, 들어주는 집 밖의 관계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은희에게도 기회가 생긴다. 비록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침샘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자 가족의 걱정을 ‘누리게’ 된다.
각기 다른 풍경에서 살아가지만 하나와 은희는 모두 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 않을 뿐이다. 결국 가족으로부터 생긴 결핍을 충족해주는 건 가족 이외의 관계들이다. 실제로 사랑받고 있지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함께 모여 서로의 마음을 달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문을 두드린다. 직접적인 위로가 아니라 그저 함께 웃고 우는 것으로 마음을 나누고 끌어안는다. 때로는 서로에게 화를 내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끝내 서로의 마음속에 자리한 허기를 알아보는 아이들은 끝내 서로를 끌어안고 마주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사려 깊게 이해해준다고 느껴지는 누군가를 만나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받는다.
나무는 계절의 온도와 광량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다르다. 그래서 계절마다 나이테의 너비도 달라진다. 여름에 잘 자라고, 겨울에 덜 자란다. 사람에게 관계는 계절과 같다. 계절의 온도가 나무의 성장에 영향을 주듯 관계의 온도가 사람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하나와 은희에게도 수많은 계절이 찾아온다. 가족은 가끔 겨울 같다. 따듯한 온도가 그립다. 그래서 하나도, 은희도 집 밖의 세상에서 온기를 찾는다. 가족이 아닌 가족 밖의 관계를 통해 더 너른 성장을 경험한다. 그렇게 새로운 나이테를 넓혀나간다. 하지만 계절에도 끝이 있듯이 모든 관계 또한 영원하지 않다. 계절의 끝을 마주해야 한다. 관계의 끝을 감당해야 한다. 이별을 마주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그 끝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한 뼘 더 성장한 자신의 마음을, 성숙해진 영혼을. 비로소 다른 나를 만났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과거를 지나 현재로 왔다. 그렇게 성장했다. 그리고 여전히 성장한다. 장차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던 시절이 지나가도, ‘진짜 여행 준비’를 하듯 인생을 살아가자는 다짐은 또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한 뼘이라도 더 자라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집>과 <벌새>는 그런 성장통을 겪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다. 우리가 건너온 세월, 그 속에 남겨진 것들, 그리고 함께 건너온 것들, 결국 나를 위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을 사려 깊은 울림으로 안겨준다. 그렇게 또 한번 남겨둔 시절을 돌아보고, 건너갈 시간을 마주 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위안과 다짐을 준다. 결국 <우리집>과 <벌새>는 당신을 위한 시간이다. 꼭 쥐여주고 싶은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