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주(過夏酒), 여름 나는 술로 맞이한 봄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무더운 날에도 무탈하게 술 마시려는 선조들의 흥이 담긴 조선 시대 과하주가 복원됐다.


여름 나는 술로 봄을 맞다


© daedongyeojudo, soola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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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병에 든 희석식 소주를 예전만큼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써서 못 먹는 게 아니라 달아서 못 먹겠다. 몇 해 전부터 도수가 낮아지니 들큰한 감미료 맛이 더 도드라진다. 대체 어디에서 돌아왔다는 건지 알 길 없는 하늘색 병 소주에 이르러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대량생산하는 막걸리도 대동소이, 국산 청주와 약주도 대부분 그랬다. 전국 각지의 양조장에서 흥미로운 배경 이야기를 담은 특색 있는 우리 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역시 대개 내 입맛에는 달다. 조미료와 설탕, 기름 범벅인 안주와 먹기에는 대안 없이 어울리지만 한 달에 한 번 먹으면 질리는 음식들. 술은 매일 마셔야 맛이니 안타까움만 깊어진다.
물론 조금만 찾아보면 우리 술 중에 달지 않고 맛 좋은 것들이 있다. 송명섭 막걸리, 해창 막걸리 등은 이름난 전통 주점 단골이라면 한 번쯤 마셔봤을 거다. 맑은 술 중에는 중원 청명주의 산미가 돋보이고, 문배술은 토닉 워터와 섞어 즐기면 향이 제법 고급스럽다. 화요 41은 비슷한 가격대의 프리미엄 보드카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다. 최근에는 섬세한 음식에 곁들일 만한, 쿰쿰한 누룩 향 적고 드라이한 우리 술이 속속 새롭게 등장하는 추세다. 그중에서도 제주술익는집에서 생산하는 오메기 맑은 술은 취향과 크게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권하는 술이다. 파인다이닝과 우리 술을 매칭하는 까다로운 작업에 몰두하는 전통주 소믈리에 더스틴 웨사는 이 술을 상큼한 소비뇽 블랑 품종의 와인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그저 달아서 초록 병 소주가 싫어진 건 아니다. 다섯 가지 맛 중 하나로서 단맛 자체에 무슨 허물이 있을까. 저급한 주정의 쓴맛을 억지로 가리려는 듯 우악스럽게 더한 단맛이라 그렇다. 헝가리 토카이 지방에서 소량 생산하는 스위트 와인이나 제대로 만들고 숙성한 셰리, 포트 와인 앞에서는 어쩔 도리 없이 무장해제 된다. 설탕이나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술을 빚을 때 자연적으로 발효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발효를 멈춰 남은 풍부한 잔당(殘糖)으로 단맛을 낸 주종이다. 조금씩 음미하며 마시면 신선한 산미와 섬세한 단맛이 입안 가득 조화롭게 퍼진다. 특별한 날 특별한 이와 마시는 특별한 술이다. 그렇게 우아한 단맛을 지닌 우리 술을 만났다. 전국 방방곡곡 술 익는 마을에서 새로운 우리 술의 맛과 그 이야기를 긷는 대동여주도 콘텐츠 제작자 이지민의 추천이었다. 분홍 복사꽃이 단아한 라벨이 붙은 날씬한 병에 담긴, 절제된 단맛과 조화로운 산미를 지닌 우리 술, 경성과하주.
우리에게도 셰리나 포트 와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빚는 술이 있었다. 과하주(過夏酒). 문자 그대로 여름을 지나는 술, 여름 나는 술이라는 뜻이다. 냉장 보관이 어렵던 조선 시대, 더운 계절에 탁주나 약주는 조금만 두어도 시어져 못 먹게 되기 십상이었다. 어떻게든 신선한 술을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술꾼들은 무탈하게 여름을 보내는 방법으로 약주에 소주를 섞었다. 발효 도중에 도수를 높이니 미처 알코올로 변하지 못한 당이 남아 술이 절로 달콤해졌고, 숙성 기간에 따라 섬세하고 복합적인 향미가 더해졌다. 한글로 쓴 가장 오래된 요리책 〈음식디미방〉에 과하주 제조법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때가 1670년. 바다 건너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는 포트 와인, 셰리 와인이라는 말조차 생기기 전의 일이다.
그런 과하주를 ‘조선 제일의 명주’라 했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최남선도 저서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 각지의 이름난 술 중에서 경성 지방의 과하주를 으뜸으로 꼽았다. 탁주와 맑은 술, 소주를 빚는 기술에 모두 통달해야 제대로 완성할 수 있는 술이라 했다. 햅쌀로 지은 밥에 누룩과 물을 넣어 발효시킨 후 걸러낸 탁주에서 맑은 물만 떠낸 약주에 역시 쌀로 만든 증류주를 섞어 오래 숙성시켜야 진하고 향긋한 과하주가 완성된다. 까다롭고 복잡한 제조 과정 때문이었을까, 조선 제일의 명주라는 말이 무색하게 과하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경기도 여주 지역의 신흥 양조장인 술아원은 2014년부터 현대적으로 복원한 과하주를 내놓기 시작했다. 경성과하주는 그 다섯 번째 시도다. 경성과하주가 술아원에서 그간 내놓은 제품과 가장 다른 건 17세기 〈음식디미방〉에 실린 제조 방법에 보다 충실하게 만들었다는 점. 쌀 맛 좋기로 이름난 여주에서 그해 생산한 햅찹쌀 100%로 만든 술을 거르고 떠낸 후, 숙성 도중에 경기미 100%로 만든 증류주를 더해 저온에서 150일 이상 장기 숙성시킨다. 경성과하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완성해 소량만 생산하는 술이다. 경기미를 증류한 소주도 고급 위스키를 만들 때처럼 처음과 나중에 증류된 술은 버리고 가장 맛 좋은 부분만 남겨 첨가한다. 국산 햅쌀과 밀 외에 다른 재료를 전혀 섞지 않지만 그동안 내놓은 과하주 중 화사한 과실과 꽃향기가 가장 뚜렷하고, 전에 비해 누룩 향과 단맛은 절제했다. 라벨에 그려진 복사꽃 그대로 산뜻한 풍미다. 증류주를 더한 술답게 진득한 질감도 있다. 만든 과정과 결과가 모두 흡족하다. 아쉽다면 화사한 맛과 달리 코로만 향을 맡으면 다소나마 누룩 특유의 냄새가 느껴진다는 점. 고급 포트, 셰리 와인처럼 3~4년 이상 공들여 숙성시키면 어떨지 궁금해진다.
광어와 우럭 등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생선회나 육회에 곁들이면 좋겠다. 달콤한 디저트와도 잘 어울리지만 나는 거창한 안주 없이 담백한 크래커와 마실 때 무척 좋았다. 기존 우리 술과 비교하자면 한산 소곡주가 떠오른다. 물론 그보다 화사한 산미가 도드라지고 당도는 훨씬 낮다. 첫 잔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향기롭지만 다디단 맛 탓에 서너 잔이면 금세 물리는 소곡주와 달리 천천히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다. 조금만 머금어도 입안 가득 농염하게 퍼지는 봄 향기. 섬세하고 화사하다지만 여전히 진한 술이라 경성과하주를 마신 뒤에 다른 맑은 술을 마시면 향을 느끼기가 어려울 정도다. 알코올 도수는 20도. 병입 후 더 이상 발효가 일어나지 않으니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우리 술을 즐길 때 간혹 감수해야 하는 변질의 위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날이 더워지면 얼음 듬뿍 넣은 잔에 탄산수를 섞어 ‘여름 나는 술’이라는 원래 의미 그대로 즐겨보고도 싶다.
무더운 날에도 무탈하게 술 마시려는 선조들의 흥이 담긴 조선 시대 과하주가 복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