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본의 감상법
」재영책수선은 꽤나 직관적인 이름을 가진 브랜드다. ‘재영 대표가 망가진 책을 수선하는 곳.’ 업체의 정체에 더해, 작업자가 얼마나 담백한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도 슬쩍 알려준다. “사실 처음에는 그런 이름도 생각했어요. ‘아틀리에’ 같은 표현이나 어려운 한자어가 들어간 그럴싸한 상호 있잖아요. 그런데 결국 ‘책 수선’이라는 표현을 써야겠다 싶더라고요. 아무래도 한국에선 좀 생소한 분야니까. 문제는 이름 때문에 이 안에서 책을 고치는 일만 벌어진다고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재영 대표는 책뿐 아니라 포스터, 지도, 팸플릿, 액자 등 온갖 지류를 수선한다. 때때로 직접 책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책 사진을 찍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재영책수선의 ‘일’은 아니지만.
재영 대표는 미국의 대학원에서 북 아트를 공부하던 시절, 컨서베이션 랩(conservation lab, 학교의 소장 자료를 보수하는 시설)에서 처음 책 수선이라는 분야를 접했다. 책 제작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얼마간 근무하기로 한 것이었는데 예기치 않게 그곳에서 두 가지에 매료된 것이다. 책 수선이라는 일, 그리고 오래된 책 자체의 미감. “제가 전공으로 북 아트를 선택한 건 책의 구조에 흥미가 많았기 때문이었어요. 판형, 모양, 실의 두께가 쌓였을 때 생기는 건축적 형태…. 그런데 책 수선을 하면서 그 구조가 무너진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죠.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책은 사람의 손이나 자연적 요소, 혹은 압도적인 시간에 의해 망가진다. 그리고 책의 망가진 형태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디에 어떻게 놓였는지, 책 주인이 어떤 버릇을 가졌는지에 이르기까지. “바꿔 말하면 책이 특정 형태로 낡는 건 반드시 그만큼의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저는 그걸 ‘날름’ 보게 되는 거고요.” 재영 대표는 그게 책 수선가의 특혜라도 된다는 듯 말한다. 다만 자랑이라기보다는 모종의 안타까움이 담긴 투로.
재영책수선에 책을 맡기면 수선된 책과 함께 수선 전 책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받게 된다. 물론 재영 대표는 전문적으로 사진을 배운 사람이 아니고, 단순히 고객 서비스 차원이라기에는 촬영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녀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다만 포기할 수가 없어서라고 했다. 작업을 시작하면,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그 책은 이제 영영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컨서베이션 랩에서 일하던 때부터 간간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수선소를 차린 후부터는 좀 더 제대로 촬영하고 있죠. 파본의 미학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요.”
재영 대표는 늘 책과 수선 작업에 대해 거창하게 표현하는 것을 경계한다. 다만 딱 한 번, 당신의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해달라고 했을 때 이렇게 답하긴 했다. “책의 기억을 관찰하는 사람.” 책이 훼손된 이유를 탐구해야 최적의 수선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 단순히 그녀가 오래된 책의 아름다움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뷰가 끝날 때 그간 촬영한 것 중 특히 아름다운 책을 몇 권 소개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며칠 후 열한 권의 책 사진을 받았다. 그 미감에 대한 사려 깊은 설명과 함께.


프랑스 비평가 아르튀르 푸쟁(Arthur Pougin, 1834~1921)이 쓴 연극에 관한 역사 사전이다. 처음 의뢰가 들어왔을 때 책은 이미 두 동강이 나 있었고, 표지와 책등 역시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출간된 지 135년이 넘은 책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본드만으로도 제본이 가능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실이나 끈을 사용했고, 실이 삭아 끊어지면 책은 두 동강이 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경우 유독 책등의 윗부분이 망가져 있는데, 이 역시 하드커버 책이라면 필연적인 파손이라 할 수 있다. 책장에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겠다. 만약 당신이 그 책을 꺼내려 손을 뻗는다면, 어느 부위에 가장 먼저 손가락이 가 닿겠는가? 십중팔구 책머리다. 그 부분에 검지를 걸고 잡아당기는 건 우리의 흔한 독서 습관이고, 이 책에서 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 1874~1942)의 책 〈잉글사이드의 릴라〉는 의뢰받을 당시 앞뒤 커버 부분이 떨어진 상태였다. 양장본의 커버는 잦은 넘김과 면지와의 장력 때문에 책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부분 중 하나고 그만큼 파손도 쉽게 일어난다. 다만 보통은 앞 커버가 더 많이 망가지는데(책을 뒤에서부터 펼치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이 책은 뒤 커버 손상이 더 심했다. 도서관에 보관되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도서관 카드가 부착되어 있는 뒤 커버는 앞 커버보다 좀 더 두꺼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차이는 기껏해야 1mm 남짓. 하지만 책 무게에 서가에 보관된 다른 책들의 압박까지 더해지면 그 1mm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이 책이 잘 보여준다.





책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파손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요인들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통풍이 잘 안되면 곰팡이가 슬고 습기에 노출되면 책의 형태가 변한다. 그리고 햇빛(정확히는 자외선)으로 인해 변색이 가속화하기도 한다. 지극히 과학적 시선으로 본다면, 종이의 펄프나 표지 안료 성분이 산소, 자외선과 만나 산성화되는 화학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논리는 잠시 접어두고 이 책을 온전히 시각에만 의존해서 감상해보자. 〈1만1000번의 채찍질과 상테 거리의 에로틱 극장〉은 원래 슬립케이스에 들어가 있는 책으로, 아마도 가운데 부분만 무언가의 그늘에 가린 채, 케이스가 눕힌 채 보관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덕분에 햇빛이 닿은 책등의 머리와 꼬리 부분에 이토록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이 생겨난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디자인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책이 훼손되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그 흔적에서 이유를 추측해보는 일은 종종 탐정놀이 같은 감흥을 선사하기도 한다. 1925년에 베른하르트 타우흐니츠(Bernhard Tauchnitz)에서 출판한 아서 코넌 도일(1859~1930)의 추리소설 〈네 사람의 서명〉을 의뢰받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부분은 책 표지에 있는 점들이었다. 하얗고 까만 다량의 작은 점. 잉크일까? 하지만 잉크라고 하기에는 두께가 있는데? 그럼 페인트일까? 하지만 긁어 부스러지는 형태가 다른데? 그렇다면 정답은… 누군가의 배설물. 그럼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바로 거미. 거미의 배설물이다. 양으로 보니 그동안 이 책을 한두 번 화장실로 사용해온 것이 아니다. 의뢰자가 이 책을 찾아낸 곳이 해외 헌책방의 한구석이었다고 한 것으로 짐작해 아마도 책이 놓여 있던 곳 위에 거미가 진을 치고 살았던 것 같다. 책 수선이라는 일에는 이렇게 거미와 책벌레 같은 작은 존재들의 배설물을 청소하는 것도 포함된다.


현재까지도 다양한 에디션으로 발행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전염병학 의학 사전인 〈역학 사전〉의 초판본이다. 공업용 접착제를 사용한 전형적인 페이퍼백 형태로, 내구성이 약해 곳곳이 낱장으로 떨어진 데다 제본은 반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의뢰인은 앞으로도 이 책을 자주 볼 예정이라 튼튼한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결국 실 제본, 하드커버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실 제본을 하기 위해서는 공업용 접착제가 남아 있는 책등을 완전히 잘라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책은 묶음에서 낱장의 종이들로 해체되는데 그때, 하나의 두께를 가진 물건이 다시 수많은 층으로 나뉘고 펼쳐질 때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비록 그 순간은 짧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왼쪽 사진은 수선 작업 완료 후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