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촬영물과는 다른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단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시대와 세계의 넓고 깊은 단면을 포착하는 일. 혹은 타인의 삶에 자신의 주관과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는 일. 스트리트 포토그래피는 예술일까, 기만일까?


photographer SUZUKI TATSUO, where Hamburg, German when 2018

photographer SUZUKI TATSUO, where Hamburg, German when 2018


저는 ‘위대한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시대’가 이미 지나버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래 이미지는 사진가 스즈키 다쓰오가 2018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그로 말하자면 도쿄 및 대도시의 거리 풍경을 포착한 사진으로 최근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 다년간 후지필름의 브랜드 앰배서더로 선정되었으며 내년 초 ‘사진가의 성지’ 슈타이들에서 사진집도 출간할 예정이다. 하지만 최근 그의 이름을 대중에 퍼뜨린 건 다소 불미스러운 논란이었다. 후지필름에서 공개한 스즈키 다쓰오의 신제품 출시 기념 사용기 영상이 공분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진가가 스펙터클을 만드는 주된 방식은 (아래 사진에 드러나듯) 광각 단렌즈로 피사체에 바짝 붙어 촬영하는 것. 가히 행인의 품으로 뛰어들어 얼굴을 촬영한 뒤 유유히 돌아서는 그의 행태에 성토가 쏟아졌다. 상투적으로 쓴 표현이 아니다. 어찌나 거셌던지 후지필름은 해당 영상과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전량 폐기하고 사과문을 올려야 했으니까. 스즈키 다쓰오가 후지필름의 브랜드 앰배서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건 물론이고 말이다.
하지만 사진책방 이라선의 운영자이자 미학자인 김진영 대표는 스즈키 다쓰오의 사진을 검색해보는 내내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정도 사진이 그렇게 논란이 됐다고요?” 그의 사진이 결백해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과장 조금 보태, 이 정도를 배제한다면 이라선을 채운 유명 사진집 중 절반은 윤리성을 재고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와 캔디드 포토그래피(피사체가 촬영 여부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촬영하는 사진)는 오늘날 사진 예술의 거대한 한 축이니까. ‘존중이 결여된 작업 방식과 행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결과물이 공분을 산 것 같다’고 답하자 김진영 대표는 이라선의 서가에서 두 권의 책을 뽑아 들고 돌아왔다. 20년간 촬영한 세계 곳곳의 행인을 비슷한 행색끼리 묶은 한스 에이켈봄의 〈21세기 사람들(People of the Twenty-First Century)〉과 뉴욕의 행인들을 얼굴이 도드라지도록 촬영한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머리들(Heads)〉. 전자는 코트 안에 카메라를 숨기고 주머니 속 셔터 릴리즈를 눌러 방대한 인원을 촬영한 작업이었으나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고, 후자는 피사체 중 한 사람이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사람들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니까요. 다만 가끔씩, 사람들이 초상권을 너무 배타적인 권리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의 카메라에 본인의 얼굴이 포착되는 게 침해라고 여기는 건 좀 과도한 우려죠. 공공장소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배타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거잖아요.”
김진영 대표는 재차 ‘제 생각’이라는 단서를 달아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그녀의 견해는 미국 뉴욕주 변호사인 캐슬린 김의 법리적 견해와 거의 동일하다. 예술에 관한 법리와 판례를 정리한 〈예술법〉의 저자인 캐슬린 김 변호사는 한국의 사진가들이 입을 모아 좁디좁은 운신의 폭을 토로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초상권에 굉장히 예민하죠. 하지만 정확히 ‘초상권’을 규율하는 별도의 법률은 없어요. 프라이버시권이나 퍼블리시티권과 동떨어진 초상권도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이고요. 초상권 소송은 헌법에 명시된 ‘인격권’에 근거하고 있어요. 법률이 없다 보니 하급법원마다 엇갈린 판례가 나오기도 하고요. 일반인도 자신의 사진이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거나 명예 훼손으로 인한 피해를 입증한다면 승소할 가능성이 있지요. 하지만 그저 공공장소에서 사진 찍힌 게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초상권이란 게 통상 과도한 권리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법률이 어느 환경에서나 통용되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며, 각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가치관의 최소한의 합의에 가깝다. 그렇다면 초상권을 중시하는 국내 여론에 따라 우리의 법은 공공장소에서의 촬영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발달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캐슬린 김 변호사는 그런 요구들이 있긴 하나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사고로 사망했을 때도 미국과 영국에서 파파라치 방지법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죠. 하지만 모두 좌초됐어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가 위법하고 어디까지가 적법한지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텐데, 그 기준점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고려대학교 로스쿨의 박경신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스트리트 포토그래피를 법적으로 제약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낯선 사람이 타인의 사유재산 영역에 들어가면 침입이 되죠. 즉 공공장소는 서로 낯선 사람 두 명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우리의 사회생활을 확장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죠. 예를 들어 집회 시위도, 광고도 공공장소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공공장소라는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하고요. 앞으로 공공장소에서의 자유를 더 보호할 필요가 있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고 공유할 자유도 그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에 반하는 시각도 있다. 〈독일 초상권 이론과 사례〉의 저자이자 언론중재위원회 교육본부장인 이수종 교수는 이런 견해가 미국 내의 판례들에 기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초상권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도 매우 중시하는 권리이며, 독일 법에서 다수 모티브를 가져온 한국 법률 역시 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사적 영역이 크거나 예술적 이익에 기여한다고 판단될 경우 사진가의 손을 들어주는 판례가 있죠. 하지만 그건 아주 예외적으로만 인정하는 부분이고요, 초상권은 그렇게 간단히 침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인격권의 하나이니까요. 원칙은, 개개인의 모습이 대중에 공표되는 건 오직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라도 ‘나는 예술 사진을 하는 포토그래퍼이기 때문에 거리에서 아무 사람의 얼굴이나 찍을 수 있어’ 하고 주장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이수종 교수는 예술 사진 영역의 초상권 분쟁에서 사진가가 패소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 대해서도, 보도 사진이나 상업적 목적의 사진에 비해 아직 소송 자체가 많지 않아 벌어지는 착시라 분석한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따라 사회문제로 불거지고 새로운 여론이 형성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 전에 초상권 관련 규정을 좀 더 정치하게, 자세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죠. 인격권을 우리 민법에 수용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무산됐는데, 그것도 조속히 이뤄져야 하겠고요.”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에는 ‘표현의 자유’라는 대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촬영권을 법적으로 강화하려 했던 프랑스의 전 문화부장관 오렐리 필리페티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사진가의 시선을 다음 세대와 공유해야 한다. 기억은 왜곡될 수 있고, 사진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얼굴’을 갖지 못할 것이다.” 사진은 예술의 한 분과인 동시에 사회를 이해하는 주요한 사료(史料)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세계 85개국을 여행하며 거리 사진을 남긴 사진가 케이채 역시 스트리트 포토그래피를 ‘미래를 위한 사진’이라 표현한다. “거리 사진이야말로 현시대의 삶을 날것 그대로 남길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연출된 사진으로는 그 사회를 아무리 잘 반영한다고 해도 층위가 다르죠. 이를테면 현대의 젊음을 표현한 사진이 전부 라이언 맥긴리 같은 작가의 사진이라고 상상해봐요. 불행한 일 아닐까요? 진짜 젊음은 벌거벗고 자연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니잖아요.” 케이채는 상업 사진과 비상업 사진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늘 스스로의 정체를 ‘거리 사진가’라 규정한다. 다만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미덕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무게추를 달듯, 그 미덕이 사진 윤리에 대한 사진가 각자의 끊임없는 질문 아래에서만 작동한다는 전제를 덧붙인다.
보스토크 프레스 김현호 대표의 견해는 그와는 좀 다른 축이다. 사진 매체 출판인이자 사진비평가로 오래도록 활동해온 그는 사진이란 매체의 속성 변화에 주목한다. “스즈키 다쓰오도, 후지필름도 놀랐을 거예요. 그들이 사진 문화를 잘 모를 리 없잖아요. 분명 자신들이 가진 상식 안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텐데 갑자기 문제가 된 거죠. 사진이 변한 거예요. 사진의 성격은 이미지 자체보다 이미지가 놓인 지지체가 더 크게 규정하니까요. 한 장의 은판 사진이었을 때와 무제한 복제가 가능해졌을 때, 그리고 지금처럼 디지털 이미지가 되어서 복제와 유통의 궤도조차 알 수 없을 때 사진의 성격은 같을 수가 없죠.” 세상이 바뀌면 사람들의 감각도 바뀐다. 공포에 대한 감각도 마찬가지. 예전에는 평범해 보였던 사진이 이제는 두려움을 야기할 수 있으며, 사진의 보편성과 파급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범주가 점점 좁아질 거라는 뜻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넓어지는 예술 영역과 좁아지는 예술 영역이 있다는 건 일견 당연한 명제. 다만 김현호 대표가 생각하는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존립 가치에도 변화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공공장소에서 촬영할 권리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법을 만들었을 때는 그 쪽이 더 사회적 편익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지금도 그 편익이 작동하는지는 의심스러워요. 기록과 고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진이 있고, 만약 편익이 있다고 해도 그에 비해 일반 시민들의 권리 침해가 너무 크죠. 존재를 지탱하던 윤리적 근거가 허물어지고 있는 거예요. 저는 ‘위대한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시대’가 이미 지나버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현호 대표는 그것이 개인적으로도 무척 아쉬운 일이라고 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러나 개인적 선호는 선호일 뿐, 사진가들이 할 일은 시대의 여건 안에서 무엇이 가능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기사를 취재하는 동안 여러 취재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저도 결론이 궁금하네요.” 그러나 물론, 법조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판이한 주장 속에서 에디터가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게 애초의 기획 의도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에는 미처 밝히지 않은 비밀이 있다. 함부르크를 여행하던 스즈키 다쓰오는 거리에서 만난 한 무리의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카메라를 들어 올렸을 때 프레임 속의 남자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나 말고 내 친구들 찍어. 쟤네가 훨씬 포토제닉하잖아.” 엄밀히 따져 이 사진의 피사체는 낯선 이가 아니고, 촬영 여부를 인지했으며, 느슨한 유대 안에서 촬영되었다는 뜻이다. 굳이 이 사진을 택한 건 편집부 내부에서도 스즈키 다쓰오의 사진 세계에 대한 견해가 나뉘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 사진을 싣는 건 자칫 ‘동의’의 제스처가 될 수 있으며, 이 기사는 스즈키 다쓰오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기사는 다만, 스즈키 다쓰오의 작업 방식에 쏟아진 비평이 너무 단순했다는 점을 짚는다. 개인의 정체성과 정보의 범주에 대한, 사진과 영상이라는 예술의 특성에 대한, 혹은 공공성과 자유와 통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는 점을. 스트리트 포토그래피는 그 가치와 경계에 대한 견해가 이토록 분분한 사안이고, 우리에게는 좀 더 입체적인 이해와 철학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진 예술의 기조를 형성하기 위해서. 혹은 그리 비장해지기 이전에, 이 글을 읽을 누구나 사진가이자 피사체이며 소비자인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

*취재원들의 발언은 모두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와 ‘캔디드 포토그래피’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 외 영역으로 분류되는 사진 및 불법 촬영물과는 쟁점이 다름을 주지한다.
시대와 세계의 넓고 깊은 단면을 포착하는 일. 혹은 타인의 삶에 자신의 주관과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는 일. 스트리트 포토그래피는 예술일까, 기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