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스 루이 비통에 도착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의 아홉 번째 버전.
지금 이 광경은 당신이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 예약만 하고 가면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참고로 저 작품의 한 면이 5m가량 된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의 가장 높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두 개의 사각형. 그리고 그 건너 면과 옆면에 붙어 있는 이 색상 사각형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 '베티(Betty ,Edition 75)' 앞에서 미술계의 거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종종 '생존하는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작가'로 불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자그마치 1932년생, 89살이다. 이 대가의 예술 인생은 '모든 걸 다 해낸 작가'라 요약할 수 있겠다. 보통 한 작가는 한가지 양식 혹은 주제를 파고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김창렬 하면 물방울이 떠오르고, 잭슨 폴록 하면 액션페인팅이 생각난다. 사실 이렇게 새로운 양식을 하나 만드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공부를 예로 들면 대충 개론서를 보고 해당 학문 전반의 지식을 익히면 '학사', 그 분야를 두루 공부하고 자신이 깊게 파고들 분야를 정하면 '석사', 정한 분야에서 정말 깊게 파고들어 남들이 전혀 생각도 못 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면 '박사'라고 한다. 김창렬은 물방울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잭슨 폴록은 액션 페인팅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한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 혹은 '주제'를 파고드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감이 올 것이다.
자신의 작품 '추상 이미지'(Abstraktes Bild, 937/1-4)' 앞에 서 있는 게스하르트 리히터.
그런데, 이 게르하르트 리히터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따지면 정말 너무 많은 논문을 써서 온갖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리히터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사진 회화'를 보자.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럴 것이다. 평생 살면서 여러 번 봤을 테니까.
또 그의 추상 이미지를 보자.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당연하다. 유럽 여행에 갔다가 대도시 미술관에 들른 기억이 있다면 그의 추상 이미지 작품 중 하나를 반드시 봤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전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각자의 계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201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만들어낸 자신의 '스트립스' 시리즈 작품 앞에 앉아 있는 리히터.
그를 두고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생각해보라. '물리와 화학, 생물학과 미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박사를 받은 사람' 정도의 느낌이라고 보면 맞다.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플럭서스,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이즘의 기류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며 최상의 성취를 이루어 오던 리히터가 처음을 '컬러 차트' 시리즈에 발을 들인 건 1960년대다. 1960년대면 그의 나이가 아직 30대이던 시절. 산업용 페인트 색상표를 보고 영감을 받아 '4900가지의 색채'의 원형이 되는 '192가지 색채'를 작업한 바 있다.이후 컬러의 수는 점차 2의 진수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1974년에는 1024색까지 나왔다.
쾰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을 맡은 리히터는 13세기 창문 장식에 사용하던 72가지 색채 팔레트를 선별하고 이를 활용해 총 11,500장이 들어가는 수공예 유리 장식을 완성했다. 2007년에 완성된 이 작업이 그간 색채 팔레트 작업을 멈추었던 리히터가 '4,900가지 색채'로 그 세계를 확장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1024에서 멈춘 색채의 행진이 다시 이어진 데는 쾰른 대성당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1248년 건축이 시작되어 1880년까지 무려 600여년에 걸쳐 건축된 쾰른대성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한쪽 면의 창이 전부 훼손되어 일반 유리로 대체되어 있었다. 이 창을 복원하기로 한 커미션 위원회가 찾은 아티스트는 현대 독일 예술의 거장인 리히터였다. 성화가 그려진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예상했던 위원회에 리히터가 제안한 것은 자신이 1970년대에 이룩한 '컬러 차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2006년 공식적으로 커미션 의뢰를 받은 리히터는 아티스트 피(fee)를 전혀 받지 않고 중세 시대 창문에 쓰던 72가지 색채로 제작된 11,500장의 수공예 유리면들로 창을 디자인했으며, 또한 각 색상을 특별히 고안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무작위로 배열했다. 이 작품의 제목이 바로 〈DOMFENSTER〉이며, 이번 루이비통의 전시에서는 그 작업 과정을 기록한 동명의 29분짜리 다큐멘터리 영상 〈DOMFENSTER〉를 감상할 수 있다.
200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전시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4900가지 색채'의 버전 2. 이 작품에는 11개의 버전이 있고, 이번에 루이 비통 전시에 온 작품은 '버전 9'이다.
돔펜스터의 기초가 된 〈4096 Colours〉 는 1024가지 색이 네 번 반복된 것으로, 이번에 루이 비통에 전시된 〈4900 Colours〉의 효시와도 같다. '4900'이란 숫자는 사실 5열 5횡 총 25개의 색상 패널로 이루어진 블록 196개를 뜻한다. 이 196개의 패널을 어떻게 전시하느냐에 따라 버전이 달라진다. 총 11개의 버전이 있는데 〈4900 Colours, Version II〉는 200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에서 100개의 칼라 스퀘어로 이루어진 패널(plate) 49개로 전시된 바 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 도착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의 아홉 번째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