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의 여행을 위하여
」인류의 조상들은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인류의 방랑은 문명 초기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어쩌면 낯선 곳으로 떠나 여행을 즐기고 싶어 하는 건 우리 핏줄 깊숙한 곳에 새겨진 본능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에, ‘여행은 우리의 본능이다’라는 말로 이 글을 시작하면 꽤 문학적으로 보일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조상들이 이동을 하긴 했지만 그 동기가 달랐다. 비옥한 목초지를 찾으러, 새로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이동했다. 뭐가 됐든 그들의 이동은 그저 삶을 이어가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지금의 우리가 즐기기 위해 하는 여행과는 전혀 다른 행위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최악의 해였던 2020년도 포함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2020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렇기에 무시할 수 없는 팩트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팬데믹은 여행업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소비자인 우리 모두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여행 관련 데이터 전문 분석 기업 포워드키스(ForwardKeys)는 2020년 1월부터 10월까지, 싱가포르 내에서 여행 예약과 관련한 새로운 패턴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중국행 항공권의 87%가, 한국행의 69%가 출발 2주일 전에 예약됐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러시아였는데, 70%가 출발을 고작 나흘 앞두고 항공권을 예약했다.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여행 계획이 어떻게 변경될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예약을 늦게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겁니다.” 포워드키스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디렉터인 제임스 웡의 말이다.
경유보다 직항을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경유’는 감염 리스크를 높인다. 비행기 안에서도 더 많은 사람과 접촉해야 하고 경유지 공항에서도 수많은 이들과 만난다. 비용을 더 들이면서 경유를 줄이는 것은 감염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간 허브로 기능해온 경유지와 해당 지역의 면세점 운영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웡은 팬데믹 이후 수요가 자연스럽게 늘어나기 전까지는 각 항공사들이 탑승객 유치를 위해 항공권 가격을 낮게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출장 수요 회복세는 느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역별 분석을 살펴보자. 지난 2020년 10월 15일, 싱가포르와 홍콩 간 ‘트래블 버블’ 발표가 나왔다. ‘버블’은 제한을 허용한 작은 클러스터를 뜻하는 말로, ‘트래블 버블’은 방역이 우수한 지역 간에 협약을 맺어 격리 없이 자유 여행을 허용하는 것이다. 발표가 나오자마자 두 국가를 넘나드는 항공권 검색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50% 수준으로 치솟았다. 예매는 30%가 늘어났다. 3주 뒤 트래블 버블의 세부 사항이 발표되자 검색 건수와 예매는 모두 급증했다. 이런 트렌드는 백신이 나타나면 사라질 일시적 현상일까, 사라지지 않을 변화일까?

갈망은 줄어들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짧은 휴가를 떠나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은 싱가포르에만 있는 건 아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 먼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니어케이션(Nearcation)’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자동차 여행이 불가능해진 지역 사람들 사이에선 보복 소비 현상이 널리 이어졌다. 중국에서 록다운 이후 쇼핑 붐이 일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홈케이션(Homecation)’이라는 콘셉트에 빠진 이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베케이션(Vacation)’이라는 단어가 무수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여행 데이터 업체인 OAG가 발표한 ‘세계 여행자 정서 조사’에 따르면,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가운데에도 여행 욕구는 줄어들지 않았다. 조사 결과 소비자의 69% 정도는 2020년 8월부터 6개월 안에 해외여행을 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재미있는 건 이들 중 다수가 비행기에서의 코로나19 감염 가능성을 우려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행자의 38%, 미국의 40%, 유럽의 45%는 비행기가 가장 감염되기 쉬운 곳이라고 답했다. 또 가운데 좌석을 비워두는 것 외에도 모든 승객과 승무원이 마스크를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인 안전 조치라는 것에 의견이 모였다. 여행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가장 덜 우려하는 것이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라는 점은 예측할 만한 결과다. 이들 중 56%가 ‘크게 두렵지 않다’고 응답했다.
창이 공항에 머물며 A380기 기내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상품과 목적지 없이 다시 공항으로 돌아오는 항공권의 가격이 치솟은 걸 보면 여행의 부재가 여행에 대한 욕구를 더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두려움까지 넘어설 정도다.
소비자들이 비행기 탑승 중 감염에 대한 부담감만 떨쳐낼 수 있다면, 여행업계의 전망은 이전보다 더욱 밝아질지도 모른다.

영원히 바뀐 것이 있다
리날디 본인도 이 낯선 시기의 새로운 트렌드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작년 9월에 CPO를 맡게 된 그는 이전에는 에디션 오텔과 원&온리 리조트 등 최상위 럭셔리 호텔 브랜드에서 근무했다. 그는 고객과 직원들의 ‘웰빙’에 집중하는데, 일반적으로 직원들에 대한 복지는 고객들에 대한 것보다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리날디가 직원에 대한 적정 수준의 복지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직원을 해고하면 결국 리조트가 발붙이고 있는 지역사회와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서비스의 하락으로 돌아올 수 있죠.” 코로나19는 서비스, 그중에서도 위생 관련 준칙의 수준을 상향시켰다. 리날디는 팬데믹 이후에도 위생 준수 규칙을 포함한 ‘언택트’ 정책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스 메뉴를 각각 분리해 원하는 메뉴만 선택해 먹을 수 있는 ‘알라카르트’식의 아침 식사가 그 예 중 하나다. 이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다수의 음식점에서 팬데믹 이후에도 서버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입구에 손소독제를 배치하리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회적, 물리적으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현실은 여러모로 ‘접객’과는 대척점에 있죠. 접객은 따뜻하고 품위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짓는 일입니다. 이제 많은 호텔리어가 전통적인 의미의 접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할 겁니다.” 현재 카펠라의 기술 팀 및 서비스 팀은 고객들의 기대에 맞춰 새 시설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지 원점에서 다시 생각 중이다.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를 고려한 새로운 사항들이 적용되면 예상보다도 큰 영향이 일 것이다.

‘착한 여행’의 경험이 중요해
에어비앤비 같은 홈스테이 플랫폼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통적인 의미의 ‘숙박 시설’이 수행해야 하는 청결 기준을 규제할 수 없고, 소비자들 역시 신뢰도가 낮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엘리베이터나 로비 등 다른 여행자들이 동시에 이용하는 시설이 없는 만큼 타인과의 교류가 적다는 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소비자들에게 ‘보건과 안전 수칙’을 밝힌 호텔 브랜드들의 행보는 ‘지속 가능한 운영’ 방침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호텔 자체적으로 일회용품 어메니티 사용을 줄이고 현지 생태계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고객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여행업계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트립어드바이저의 CCO 카니카 소니의 말이다.

이제 목표는 ‘리제너레이션’
공동 창업자인 어맨다 호가 내린 정의다. 이 개념은 코로나19가 심화되던 지난 3월, 여행 칼럼니스트 일레인 글루샥이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여행을 가는 목적은 ‘문화 교환’이라는 본래 의도에서 아주 멀어진 지 오래다. 솔직히,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을 중심으로 여행지를 선정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특별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곳보단 남들에게 자랑하기 좋을 만한 곳을 고르지 않았던가. “여행업계의 상당 부분은 현지 지역, 그리고 현지인들과 단절돼 있어요.” 호는 이것이 소비자들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한다.
“코로나19는 기후변화의 리허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바뀌고 고쳐야 해요. 팬데믹은 우리가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의 삶이 아주 힘들어질 거라는 증거입니다.” 호가 덧붙여 이야기한다.
호에 따르면 리제너레이티브 트래블과 함께하는 호텔들은 팬데믹을 '잠시 멈추고, 영업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호텔들은 전 세계 체인에 지역사회 출신 직원들을 계속 일하게 해주는 동시에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환원하라는 제안을 실행하고 있다.
바와 리저브 리조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WWF(세계자연기금) 인도네시아 지부의 ‘사이닝 블루 프로그램’에도 가입한 바와 리저브 리조트는 리조트 인근 해양 지역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바와 아남바스 재단을 통해 인근 섬 주민들의 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필리핀 샤르가오스 네이 팔라드 하이드어웨이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학교를 지원하고, 영속농업 농장에서 자체적으로 농산물을 재배한다.
리제너레이티브 트래블이 편안한 휴가와 가치 있는 여행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 애쓰고 있지만, 지속 가능성에서 리제너레이션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모든 관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체 시스템상의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땅도 있어야 하고, 지역사회와 야생동물에게도 긍정적 영향이 돌아가야 한다. “이전에 비해 재생이 더 이뤄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급진적인 투명성이 필요합니다. NGO, 호텔, 정부 등 모든 관련자가 협력해야 하고요.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성도 키워야겠죠. 다양성과 포용을 위한 정책 강화도 필요할 겁니다.” 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남은 건 당신의 선택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의 개입을 기다리는 시민들도 많다. 경제는 어떻게든 굴러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을 규정하는 건 지금도 개인 여행자들의 몫이다.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은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여행과 관광을 하며 쓰는 돈이 여행지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의식한다면 더 많은 정보를 찾아 세상을 ‘리제너레이션’하는 기업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항공, 관광, 숙박 업계 전반이 말 그대로 멈춰버린 건 21세기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는 엄청난 구조조정을 목격했고 이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여행하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고, 또 앞으로의 패러다임을 바꿔보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