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007의 적수가 되어 돌아온 라미 말렉을 만났다

<보헤미안 랩소디> 속 프레디 머큐리 역으로 전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라미 말렉이 제임스 본드의 새로운 적수가 돼 돌아온다. 한국에서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새로운 007 시리즈, <노 타임 투 다이>에 대한 이야기다.

BYESQUIRE2021.09.29
 
 

bad guy 

 
007에겐 언제나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었다. 이번에 제임스 본드의 타깃이 된 건 라미 말렉이었다. 아마존 프라임의 드라마 시리즈 〈미스터 로봇(Mr. Robot)〉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지난 2018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퀸의 프런트맨 프레드 머큐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업계를 뒤흔들고 스타덤에 올랐다.
 
새로운 007 시리즈 영화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를 비롯한 다섯 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는 말렉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말렉은 〈보헤미안 랩소디〉 전부터도 아주 평가가 좋은 배우였습니다.” 영화는 코로나19로 인해 네 차례나 개봉일을 미루다 드디어 이번 9월 개봉을 확정했다. 크레이그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 요원, 본드를 연기하는 건 이번 영화가 마지막이다. 오래 전부터 007 시리즈에 관여해온 프로듀서 바버라 브로콜리, 마이클 G. 윌슨 그리고 〈노 타임 투 다이〉의 감독 조지 후쿠나가와 더불어 크레이그 역시 본드의 적수가 되어줄 새 배우를 물색했다. “새로운 악역을 위해 우리가 꼽은 배우 명단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말렉은 최우선 순위였고요. 다행히 말렉은 우리와 함께할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말렉이 딱히 007 시리즈의 제작진을 피해 다녔던 건 아니다. 크레이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갓 오스카를 수상한’ 전도유망한 배우였다. 그는 본드의 적수를 찰떡같이 소화할 터였다. 여러 이미지가 공존하는 페이스는 그가 가진 매력 중 하나다. 눈꺼풀을 내리깔면 그의 크고 푸른 눈은 무심한 듯 서늘한 느낌을 준다. 조명 아래 턱을 숙이면 턱과 광대뼈가 튀어나온다. 그가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사를 읊을 때면 어딘가 사악한 느낌도 든다. 한마디로 그는 다양한 색깔을 가진 매혹적인 배우다. 사실 말렉이 007 시리즈를 위해 시간을 마음껏 낼 수 있었 건 아니었다. 처음 제의를 했을 당시, 그는 뉴욕에서 〈미스터 로봇〉의 마지막 시즌을 촬영하고 있었다. 날짜를 수차례 조정한 끝에야 말렉은 몇 주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다른 배우들의 촬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곧장 영국 런던 서쪽에 위치한 파인우드 스튜디오로 날아온 그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출연 분량 대부분을 찍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만난 말렉은 매우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가 큰 눈을 빛내며 말할 때, 나는 귀여운 소년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럼 꼭 되게 해보자!’는 생각을 해요.” 말렉이 웃었다. “굉장히 집중하는 편이죠. 특히 제가 흥미를 느끼는 일이라면 더더욱요.” 말렉을 만난 곳은 뉴욕 트라이베카의 멋지고 비싼 호텔 라운지였다. 새로운 007 시리즈의 개봉이 네 차례나 뒤로 밀리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2019년 12월의 이야기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렸다. 말렉은 늘 입는다는 흰 셔츠와 깔끔한 네이비 스웨터, 어두운 색 바지와 검은 부츠 차림으로 등장했다. 소탈한 모습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으나, 우리는 곧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베레모를 쓰고 작은 개를 대동한 금발 여성이 들어와 우리 맞은편에-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앉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녀는 호텔 투숙객이었을까? 열성 팬이었을까? 혹은 스펙터 요원? 내가 말렉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된 건 그가 〈노 타임 투 다이〉에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007은 거대한 프로젝트다. 지난 2019년 10월, 〈텔레그래프〉는 “제임스 본드가 영국 경제를 구했다”고 표현했다. 007 시리즈를 위시한 영국의 영화산업 호황이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 경제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로 007 시리즈는 엄청난 규모다. 또 모든 디테일을 아주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하기에, 출연 배우가 말해도 되는 것 이상의 정보를 흘리는 건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말렉이 맡은 ‘사핀’은 아직까지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사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말렉은 곧장 “저는 굉장히 조심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흘러나온 루머처럼 두 편 연달아 출연 계약을 한 건지도 알려줄 수 없는 건 물론이다. 앞서 크레이그는 영화 홍보차 출연한 토크쇼에서 “대본 리딩 중 말렉에게 키스를 했다”는 일화를 털어놓은 바 있다. 말렉이 ‘어떤 말’을 했다는 이유였다. 말렉은 여기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보게 될 거예요.” 그는 조금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베이지 코튼 슈트, 오렌지 컬러 롱 슬리브 셔츠, 브라운 가죽 로퍼, 블랙 실크 타이 모두 구찌.

베이지 코튼 슈트, 오렌지 컬러 롱 슬리브 셔츠, 브라운 가죽 로퍼, 블랙 실크 타이 모두 구찌.

우리가 인터뷰를 진행하기 일주일 전, 뉴욕에서는 〈노 타임 투 다이〉 기자회견이 열렸다. 크레이그와 말렉을 비롯해 마들렌 스완 역을 다시 맡은 프랑스 배우 레아 세두, 007 시리즈에 처음 출연하며 라이벌 스파이 노미 역을 맡은 영국 배우 라샤나 린치가 참석했다. 행사 내내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만 하려 애썼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부담이 상당할 것 같았다. 말렉은 질문을 피했다. 오히려 기자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저는 오히려 기자분들께 여쭤보고 싶어요. 정말 알고 싶으세요? 이 영화의 특별함을 아시잖아요. 007 시리즈의 25번째 영화고,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시리즈예요. 제가 이 영화를 망쳐주길 바라세요?” 음. 아뇨. 그럴 리가. 하지만 조금은 알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본드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하고, 일단 말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선, 그의 이름에 대한 세간의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그의 이름 라미(Rami)는 ‘래미’가 아니라 ‘라미’라고 발음해야 한다. 헷갈릴 만하다. 그의 일란성쌍둥이 형제인 ‘새미(Sami)’는 ‘사미’가 아니라 ‘새미’니까. 라미와 새미 형제는 캘리포니아주 산페르난도 밸리에서 자랐는데, 할리우드와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꽤 먼 곳이었다. 아버지 사이드는 보험 판매 일을 했고, 어머니 넬리는 회계사였다. “두 분은 이집트의 ‘아주 초라한’ 가문 출신이었어요.” 말렉의 말이다. 1970년대, 라미와 새미 쌍둥이의 누나 재스민이 태어난 직후 말렉 가족은 라미와 새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현재 재스민은 의사, 새미는 교사로 일하고 있다. 가족들 중 배우는 전혀 없었던 셈이다. “연기자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최고의 스토리텔러 중 한 명이었어요.” 말렉의 아버지 사이드는 지난 2006년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자석처럼 아버지 옆에 달라붙곤 했어요. 나와 새미, 혹은 나와 누나 이렇게 둘 이상이 있을 때면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거든요. 그리고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땐… 정말 기발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건 재능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해요.” 사이드는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고전영화와 문학을 집에 잔뜩 비치했다. 아서 밀러의 희곡부터 007 시리즈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의 소설까지, 범위는 다양했다. “글쎄요, 저는 ‘미국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자주 생각했거든요. 미국에서 태어났고 살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적응 중이고요. 이런 생각들은 밀러의 희곡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교양 있는 집안의 자제 같다고 말하자 말렉은 웃으며 답했다. “밀러의 희곡뿐만 아니라 〈더 프레시 프린스 오브 벨 에어(The Fresh Prince of Bel-Air, 미국 흑인 사회 이슈를 다룬 시트콤)〉도 거의 전편을 다 봤어요. 그 얘기를 빼먹으면 안 되겠네요.”
 
말렉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동시에 사기꾼(?) 같은 면모를 갖춘 아이’였다고 설명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독서 장려를 위해 선생님들은 새로운 이벤트를 준비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피자 상품권을 받을 수 있었어요. 보통 아이들은 책을 읽기 싫어했고요. 그래서 저랑 새미가 머리를 썼죠. 아버지의 테이프 녹음기를 가지고 와서, 우리가 같이 책을 읽고 녹음했어요. 그 테이프를 친구들에게 판매했고요. 친구들은 필요한 점수를 얻고, 공짜 피자도 먹을 수 있었어요. 우린 돈을 벌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말렉이 웃었다. 그렇다면 말렉 형제는… 오디오북을 발명한 걸까? “기회가 눈에 띄면 놓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꾀를 잘 쓰는 편이었죠.”
 
말렉은 인디애나주 에번즈빌 대학교에 진학했다. 전공은 순수예술이었지만, 부모님을 속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문과 대학에 진학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연기도 중간중간 배우겠지만, 진지하게 대학 교육을 받을 거라고 설득해야 했죠.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까웠지만요.” 재학 중, 그는 영국 링컨셔주 그랜섬에 위치한 할랙스턴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기도 했다. “마거릿 대처의 고향이자, 아이작 뉴턴이 학교를 다녔던 지역이죠.” 말렉이 강조하듯 말했다. 자랑스러워서는 아니다.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입국 심사를 하는 직원이 어느 지역에서 지낼 거냐고 물어봤어요. 설명해줬더니 ‘잉글랜드의 겨드랑이에서 살게 된 걸 환영한다’고 답했죠. 잊지 못할 표현일 거예요.”
 
영국에서 한 학기를 보낸 그 무렵부터, 말렉은 영국 문화에 관심을 품게 됐다. 당시 그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앞서 말렉은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드 머큐리의 여자 친구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메리 오스틴을 연기한 배우 루시 보인턴과 실제 연인으로 발전했는데, 그녀 역시 말렉의 영국화(化)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녀가 런던 남부 출신이기 때문이다. 실제 말렉은 많은 것을 ‘영국식’으로 대체했다. 그는 구운 고기와 감자, 채소 등으로 구성된 영국식 브런치 메뉴인 ‘선데이 로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다만, 영국 음식 그 자체보단 친구들과 함께 모인 브런치 자리의 분위기를 더 선호한다고 덧붙이긴 했다). 그는 프레드 머큐리가 라이브 에이드에서 입은 흰색 민소매 셔츠를 가리키는 ‘와이프 비터(wife-beater)’라는 미국 단어에 대해서는 “끔찍하다”고 말했다. 단어 그대로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 연상되기 때문일 터였다. 그 단어 대신, 그는 ‘싱글렛(singlet)’이라는 영국식 표현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말렉은 자신이 입은 바지를 가리키며 “저는 이걸 ‘팬츠(pants)’라고 부르지 않아요. 런던에서 지내고 나니 어처구니없이 들리더라고요”라고도 말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이건 ‘트라우저(trousers)’죠.” 말렉이 웃었다. “저는 아무래도 영국 스타일로 많이 조정된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뉴욕에서 잠시 연극을 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뒤에는 TV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괜찮은 역할들이 들어왔고, 그는 영화로 무대를 옮겨 좀 더 다양하고 작은 역할에 도전했다. 규모가 있는 재미있는 영화 속 작은 역할(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 3부작의 아크멘라), 규모가 있는 흥미로운 영화 속 작은 역할(영화 〈마스터〉에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사위 클라크), 작고 흥미로운 영화 속 작은 역할(호평받은 독립영화 〈숏텀12〉의 네이트), 썩 좋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흥행한 영화 속 작은 역할(〈트와일라잇: 브레이킹 던 파트 2〉의 이집트 뱀파이어) 등.
 
학창 시절 빛났던 말렉의 ‘사기꾼 기질’은 이때도 여전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 오디션 때의 일이다. 주연배우 호아킨 피닉스와 친분이 있던 말렉은 앤더슨 감독이 아직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앤더슨 감독은 말렉에게 “잘될지 모르겠으니, 다음 영화에서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은 말렉은 재빠르게 받아쳤다. “감독님은 영화를 7년에 한 편 만들잖아요. 난 다음 영화까지 못 기다려요.” 앤더슨 감독은 그 자리에서 크게 웃었고, 결국 클라크 역을 말렉에게 맡겼다.
 
도트 패턴 실크 셔츠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도트 패턴 실크 셔츠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2014년에는 〈미스터 로봇〉이라는 새로운 TV 드라마에서 연락이 왔다. 줄곧 ‘작은 역할’을 맡던 그를 ‘큰 역할’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었다. 주인공 엘리엇 앨더슨은 정신 건강에 복잡한 문제가 있고 마약에 의존하지만 매우 똑똑한 컴퓨터 엔지니어로, 낮에는 사이버 보안 기술자이지만 밤에는 해커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 과정 속에서 대기업의 추악한 음모에 휘말리게 되는 게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다. 아주 흥미롭고 멋진 캐릭터였지만, 여기에 부합하는 배우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디션은 한 달 넘게 이어졌고, 100명이 넘는 배우가 도전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말렉은 맨 끝에 등장했어요.” 〈미스터 로봇〉의 제작자 샘 에스마일의 말이다. “말렉이 약간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두 페이지 정도의 모놀로그를 시켜봤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부분이었어요. 사실 그때까지 저는 이 부분을 고쳐 쓸 생각이었어요. 너무 장광설이라, 실제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저에겐 굉장히 불쾌하게 느껴졌거든요.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도 약해져 갔고요.” 에스마일의 생각은 말렉의 연기를 보는 순간 완전히 바뀌게 됐다. “놀라울 정도로 나약한데, 동시에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어요. 그 장면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배우는 말렉뿐이었어요. 말렉은 분노하고, 고함을 치면서도 그 안에 가려진 고통을 드러냈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연기를 봤는데, 이 캐릭터가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어요.”
 
에스마일은 말렉의 연기를 극찬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죠. 말렉은 디테일을 굉장히 중시하는데, 제 기준에 디테일은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위대한 배우들의 특징이죠.” 에스마일만 말렉의 연기에 감명을 받은 건 아니다. 말렉은 앨더슨 역할로 2016년 에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게다가 말렉은 성실해요. 언제나 에너지가 가득하고, 우리가 만드는 작품에 흥미나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디테일을 언제나 찾아내요.”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촬영 현장에서 언제나 환영받진 못할지도 모른다. 어떤 스태프에겐 말렉의 집착이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적어도 저는 말렉과 아주 비슷한 성향이었어요. 촬영이 잘 되어갈 때면, 우리는 둘 다 너무 신나서 언제까지고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 했죠.” 에스마일이 웃으며 한 말이다. “저는 그게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현실적인 실용주의자가 되려고 현장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 역할을 해줄 분들은 따로 있죠.”
 
〈보헤미안 랩소디〉 프로듀서에겐 〈미스터 로봇〉 속 말렉의 집착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말렉에게 프레디 머큐리 역할을 제안했던 걸 보면 말이다. 사실 이건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2010년, 〈보헤미안 랩소디〉 제작이 발표됐던 당시에는 배우 사샤 바론 코헨이 주연을 맡을 예정이었다. 코헨은 살아 있는 퀸 멤버들과의 의견 차이를 이유로 2013년 하차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말렉이 들어갔다. 하지만 〈미스터 로봇〉의 엘리엇과 프레디 머큐리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인데? 내 멍청한 지적에 말렉이 답했다.
 
“아,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보헤미안 랩소디〉 프로듀서들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저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요. 그들은 8년, 10년에 걸쳐 수많은 배우들을 물색했죠. 제일 안 풀렸던 어떤 부분에 제가 딱 맞아떨어졌을 수 있어요. 이미지나 느낌이 아니라, 어떤 감성을 본 게 아닐까요. 프레디 머큐리의 천성에 존재했던 어떤 나약함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마지막으로 그는 겸손하게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프로듀서들은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라면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말렉은 프레디 머큐리 역할을 맡은 뒤, 영화가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다. 런던으로 날아가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고, 프레디 머큐리의 작은 행동까지 따라 할 수 있도록 체형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밤에는 프레디 머큐리의 독특한 치열을 따라 한 가짜 치아를 끼고 연기 연습을 했다. 이런 철저함은 말렉의 특징이다. “솔직히, 저 스스로에게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해로울 정도죠.” 그도 인정하는 바다. “그래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시도해봐야 한다고 믿어요. 아, 물론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죠. 그런데 그중엔 저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남들한테 맡길 수가 없어요. 마음이 불편해지거든요.”
 
말렉의 꼼꼼함은 예전부터도 유명했다. 말렉은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HBO 미니시리즈 〈더 퍼시픽〉의 프로듀서 톰 행크스로부터 쪽지를 받은 적이 있다. 타자기 수집가로 유명한 행크스가 직접 자신이 소유한 타자기로 쳐서 보낸 쪽지였다. 말렉은 답장을 쓰려고 행크스가 사용한 것과 같은 타자기를 샀다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터뷰 중에도 나는 그의 꼼꼼함에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실, 며칠 전부터 기자님이 쓰신 글을 몇 편 찾아 읽었어요. 제가 어떤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될지 알고 싶었거든요.”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코헨의 하차 후 말렉이 프레디 머큐리 역할을 맡는 것으로 확정됐지만, 〈보헤미안 랩소디〉 제작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산재해 있었다. 2주 정도의 촬영 분량을 남긴 상황에서 돌연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해고됐다. 싱어 감독이 떠나자 말렉은 예상하지 못한 위기에 봉착했다. 좌초할지도 모르는 배에서 사실상 심벌이 된 것이다. 흔들리는 배를 안정시키는 건 어느 정도 주연 배우인 그의 몫이었다.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제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낼 수 있었어요. 저는 지금도 그때의 제가 자랑스럽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용기와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말렉이 벅찬 듯이 말했다. “제가 찾길 바랐던 제 내면의 용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감동적이었고, 희망적이었어요. 저만 겪은 것도 아니었어요. 함께 위기를 극복한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셨으니까요. 지금도 그때 끝까지 힘을 모아 일했던 분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문제는 많았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는 대성공을 거뒀다. 전 세계적으로 9억400만 달러를 벌어들여 음악 전기 영화로는 역대 최대 성공작이 됐다. 주인공이었던 말렉은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랍계 배우로서는 최초 수상이었다. 수상 직후 말렉은 전년도 수상자인 배우 게리 올드만의 포옹을 받았다. “제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그가 놀랐던 게 기억나네요. 꽤 흐뭇했어요. 저는 올드만의 훌륭하고 완벽한 연기를 평생 봐온 사람이니까요.” 나와 말렉이 만난 때는 2020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딱 한 달 남겨둔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미스터 로봇〉으로 세 번째 남우주연상 후보 지명을 받은 상태였지만, 수상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이미 꽤 만족스러워요. 더 많은 걸 바라면 너무 과할 것 같아요.” 그해 TV 시리즈 남우주연상은 〈석세션〉의 브라이언 콕스에게 돌아갔다.
 
말렉은 〈보헤미안 랩소디〉에 처음 임할 때, 약간의 공포를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촬영이 끝날 무렵 그는 의기양양했다.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았기에, 완성물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험이 더 큰 일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보호막이 된 것 같아요. 촬영 내내 어느 정도 자신감을 느꼈어요. 앞으로도 나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죠. 그 덕분인지, 이렇게 ‘큰일’을 맡게 됐을 때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어요.” 말렉의 큰 두 눈이 빛났다. “007 시리즈 말이에요.” 우리가 기대했던 제임스 본드에 대한 이야기가 막 나올 참이었다.
 
〈노 타임 투 다이〉는 공식적인 25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이자,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하는 마지막 007 시리즈다. 크레이그는 본드를 맡은 배우 여섯 명 중 가장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박스 오피스 성적만 놓고 보자면 단연 최고였으니까. 그 말은 그만큼 기대가 큰 영화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은 〈보헤미안 랩소디〉에 비하면 비교적 순탄했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제작이 시작된 지 6개월 만인 2018년 8월, 대니 보일 감독이 하차한 것이다. 사건사고도 이어졌다. 2019년 5월에는 자메이카에서 촬영 중이던 크레이그가 부상을 입고 발목 수술을 받아 촬영이 연기됐고, 6월에는 파인우드 스튜디오 내부에서 진행된 폭발 장면 촬영에 문제가 생겨 또 한 차례 촬영이 미뤄졌다.
 
램스킨 레더 재킷, 코튼 포플린 클래식 셔츠, 램스킨 레더 팬츠, 화이트 레더 슈즈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램스킨 레더 재킷, 코튼 포플린 클래식 셔츠, 램스킨 레더 팬츠, 화이트 레더 슈즈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전작들의 성공을 따라잡을 뿐만 아니라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은 크레이그만의 몫은 아니었다. 전작 〈스펙터〉는 2015년,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역대 최대 흥행작 〈스카이폴〉은 2012년에 개봉했다. 비교 대상이 10년 이내에 기록을 세운 셈이다. 게다가 둘 다 따라잡기 만만치 않은 샘 멘데스 감독의 작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역 캐스팅은 당연히 중요했다. 말렉은 하비에르 바르뎀과 크리스토프 왈츠 등에 이어 악역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MI6의 가장 전설적인 적수이며, 패러디물로도 수차례 ‘재탕’된 악역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도널드 플레젠스 분)의 사악함에 도전하는 것이다.
 
말렉은 영화에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따로 리허설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촬영장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시간의 압박이 있었죠. 제가 거의 백지 상태로 합류한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말렉이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덧붙였다. “아, 완전히 백지는 아니었을 거예요. 〈미스터 로봇〉을 막 끝낸 상태였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크레이그는 말렉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저는 이 영화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말렉이 가능한 한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죠.” 크레이그가 했던 말이다. “정말 거대한 작품이지만, 여기에 압도되지는 않았으면 했습니다. 007 시리즈보다 대작인 영화는 많지 않기 때문에, 처음 합류한 배우들이 본래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말렉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더군요. 머뭇거림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렉은 크레이그와의 교류에 대해 “서로 존중했으나 철학적인 공격을 주고받았다”고 설명했다. “우리 둘 사이가 정말 치열한 1대 1의 싸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연기를 끌어내려고 했어요. 지나치게 크레이그를 짜증나게 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 밀어붙였다고 생각해요.” 말렉의 이런 설명이 이해가 가느냐고 크레이그에게 묻자 곧장 “전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물론 크레이그는 웃고 있었다. 영화의 공식 트레일러 영상은 12분이 넘는다. 이를 통해 말렉이 맡은 역할인 ‘사핀’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첫 등장 신은 12.5m 상공에서 촬영됐다.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처럼 얼굴에 수많은 흉터가 새겨진 그가 체코 vz. 58 공격소총을 휘두르며 눈 덮인 북유럽의 숲을 돌아다니는데, 억양만 들어서는 어느 나라 출신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여기서 잠깐, 예리한 사람이라면 트레일러 어디에서도 사핀의 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피터팬의 후크 선장처럼, 사핀도 손을 잃어버린 걸까? 이 밖에 트레일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핀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일본의 전통 연극 ‘노’에 쓰이는 가면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영화의 제목은 〈노 타임 투 다이〉다. 단순히 ‘죽을 시간이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노’라는 이름을 가진 악당에게 ‘이제 죽을 시간’이라고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노’라는 이름을 가진 악당은 과거 한 차례 007 시리즈에 등장한 적이 있다.
 
말렉의 대답이 뭐가 될지는 나도, 말렉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말렉이 맡은 캐릭터가 혹시, 1962년 개봉한 첫 제임스 본드 영화 〈살인번호〉 속 조세프 와이즈맨이 연기한 악당 ‘닥터 노’인 것이냐고. “그런 얘기, 들어봤죠.” 말렉이 유쾌하게 말했다. “과연 닥터 노일까요? 개봉 전까지 생각해볼 만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겠죠.” 앞서 크레이그는 말렉이 맡은 역할에 대해 “아주 복잡한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지켜보고 있자니 굉장했다”고만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말렉이 닥터 노가 아닐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마일은 말렉과 장편영화 몇 편을 준비 중이다. “저는 말렉이 007 시리즈에 어떤 기여를 할지 굉장히 기대돼요. 트레일러를 보고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을지, 어떤 연기를 어떻게 해낼지에 대한 저만의 예상도 있고요. 그 예상이 맞아떨어질지는 불확실한 일이죠.” 에스마일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예상은 뒤집어질 거예요. 말렉은 분명 아주 흥미롭고 강렬한 방식으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겠죠. 아주 특별한 연기, 아주 특별한 악역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 말렉은 아직 〈노 타임 투 다이〉를 못 본 상태였다. 그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릴 첫 시사회까지 기다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두 달 정도는 완전히 쉬면서,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려 한다고 밝혔다. “저도 처음 보는 거고, 관객들도 처음 보는 거잖아요. 저도 관객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죠. 그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첫 시사회까지 기다릴까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약간 머뭇대는 그였다. “말은 이렇게 해도, 진짜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처음 보게 되면 최종적인 제 의견을 내기엔 좀 늦어질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정도 스케일과 역사를 가진 영화에서 애초에 제가 얼마나 의견을 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말렉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더 큰 힘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듯, 편안한 미소였다.
 
인터뷰를 마친 뒤, 말렉은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렉에게 물었다. “이번 영화는 세계적인 대작인 007 시리즈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마감하는 중요한 제임스 본드 영화잖아요. 크레이그에게 최고의 작별작을 만들어줘야겠다는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연하죠.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저는….” 말렉이 잠시 말을 멈췄다. “본드잖아요. 절대적으로 최선을 다해야죠.” 그는 크고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본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도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눈이 내리는 뉴욕의 거리 사이로 사라져가는 말렉의 뒤를 지켜봤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9월 29일 개봉.
 

Keyword

Credit

  • INTERVIEWER Miranda Collinge
  • PHOTOGRAPHER Dexter Navy
  • STYLIST James Sleaford
  • HAIR & MAKEUP Kumi Craig
  • PHOTOGRAHPER’S ASSISTANT Tyrell Hampton
  • PHOTOGRAHPER’S ASSISTANT Justin Mulroy
  • PHOTOGRAHPER’S ASSISTANT John Temones
  • STYLING ASSISTANT Rachel Clark
  • TRANSLATOR 이원열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