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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그리고 그의 특별한 시계들

제임스 본드, 그리고 그의 시계들.

BYESQUIRE2021.09.30
 
 

“뭘 할 수 있지?”

 
〈골드핑거〉(1964)에서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착용한 숀 코너리.

〈골드핑거〉(1964)에서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착용한 숀 코너리.

2012년 10월, 제임스 본드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 34호실의 벤치에 앉아 있다. 본드는 얼마 전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났고, 석 달간 일을 쉬기까지 한 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MI6의 건강검진을 패스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영국 화가 JMW 터너의 작품을 보고 있다. 자신을 회복시켜줄 위안거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드는 ‘해체를 위해 예인된 전함 테메레르’(1838)에 집중하고 있는데, 과거 엽서나 행주에 인쇄된 것을 보고 좋아했던 작품일 수도 있다. 놀랍도록 아름답지만 불명예스러운 작품이었다. 트라팔가 전투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했던 전함이 템스강을 따라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으니. 그리고 이 순간 자체가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한 만신창이가 다른 만신창이를 지켜보고 있으니. 그때 본드의 새로운 공급책이 정곡을 찔렀다.

 
〈퀀텀 오브 솔러스〉(2008)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다니엘 크레이그.

〈퀀텀 오브 솔러스〉(2008)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다니엘 크레이그.

“저는 저 그림을 보면 좀 멜랑콜리한 기분이 듭니다.”
본드의 옆으로 다가온 Q가 한숨을 쉬며 한 말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당시 개봉한 007 시리즈 〈007 스카이폴〉(이하 ‘007’ 생략)의 한 장면이다. 본드는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고, Q는 벤 위쇼다. 위쇼는 크레이그에게 중국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표와 새로운 장난감들이 든 작은 상자를 전해주러 왔다. 위쇼의 말대로,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사실은 이 장면 내내 째깍째깍 느껴진다. Q는 방금 학교를 졸업한 듯한 모습인 반면, 본드는 내셔널 갤러리 레스토랑에서 얼리버드 디스카운트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연륜 있는 모습이다. 상징적이다. 본드는 경험과 나이를, Q는 혁신과 능력을 어필한다. Q는 컴퓨터로 줄 수 있는 피해가 본드가 현장에서 1년 내내 할 수 있는 것보다 크다고 주장했다. 본드의 쓸모는 방아쇠를 당기는 정도로 축소된 것이다. Q가 건네준 새 권총과 무전기에 본드는 실망한 표정이 된다.
“폭발하는 펜이라도 기대하셨나요?”
Q가 물었다.
“이제 우린 그런 거 안 해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에서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착용한 로저 무어.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에서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착용한 로저 무어.

그런 건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본드는 언제부터 슬프게도 구식 원칙과 싸우며 과거에 머물러 있었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시한폭탄은 은신처에서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째깍대며 시간의 흐름을 알린다. 현대적인 그의 적들은 역사적인 유적을 대하듯 그를 존중한다. 물론 새로운 본드 영화를 기다리는 우리의 시간만큼 시간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는 건 없다. 한참이나 연기됐고 기대감은 어깨를 짓누를 정도로 커졌다. 영국, 아니 세계 영화산업 자체를 구원해줄 수 있을 거란 기대까지 받고 있으니까. 새로운 007 시리즈는 본드의 황혼기를 보여준다. 가엾은 본드, 그는 자신에겐 ‘죽을 시간조차 없다(No time to die)’는 걸 알게 된다. 신작의 제목, 〈노 타임 투 다이〉 그대로다.

 
〈어나더 데이〉(2002)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피어스 브로스넌.

〈어나더 데이〉(2002)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피어스 브로스넌.

죽을 시간조차 없는 본드에겐 시계가 있다. 수동, 자동, 디지털, 갈고리가 달린 것, 레이저빔을 쏘는 것, 자성이 있는 것, 무전 기능이 있는 것, 텔레비전 역할을 하는 것, 스위스산, 미국산, 일본산, 그 수많은 시계들. 머천다이즈로 만들어 마케팅할 수 있고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시계들. 그 어떤 프랜차이즈보다도,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시계들은 언제나 본드의 팬들이 원하는 것을 선사했다. 물론 스위스 제네바나 르 브라쉬스의 천재들이 만드는 놀랍도록 섬세한 기계식 시계도 좋지만, 알고 보면 본드의 팬들에게 가장 절실한 건 오직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터지는 시계 정도다.

 
〈카지노 로얄〉(2006)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크레이그.

〈카지노 로얄〉(2006)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크레이그.

본드의 시계는 두 번 정도 “쾅!” 하고 터졌다. 〈문레이커〉(1979)속 로저 무어는 문레이커 발사대에서 세이코 M354-5010 메모리 뱅크 캘린더에 숨겨둔 폭탄을 이용해 위기를 탈출한 바 있다. 이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스펙터〉(2015)에서도 시계는 기폭장치로 쓰였다. 다들 알다시피 본드는 온갖 장비들을 둘러봤는데, 전시돼 있는 근사한 애스턴 마틴 신형 모델이 009에게 배정돼 좀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런던의 럭셔리 쇼핑 구역인 ‘본드가’에서 5000파운드 정도면 살 수 있는 오메가 씨마스터 300을 얻은 건 그에게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유어 아이스 온리〉(1981)에서 세이코 7549-7009를 착용한 무어.

〈유어 아이스 온리〉(1981)에서 세이코 7549-7009를 착용한 무어.

오토매틱 크로노미터 마스터 코액시얼 칼리버 8400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숫자와 패턴이 새겨진 블랙 다이얼, 블랙 세라믹 리퀴드 메탈 양방향 베젤과 롤리팝 초침, 007-브랜드 버클, 블랙과 그레이 컬러의 나토 스트랩과 스테인리스스틸 스트랩을 함께 갖춘 멋진 시계였고 7007점만 한정 생산됐다. 이 시계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언리미티드〉(1999)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브로스넌.

〈언리미티드〉(1999)에서 오메가 씨마스터를 착용한 브로스넌.

“뭘 할 수 있지?”
본드의 질문에 Q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시간을 알려줘요.”
“M이 이러자고 한 건가?”
본드가 다시 묻자 Q도 다시 대답한다.
“경고 하나만 해드리자면, 알람이 꽤 시끄러워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실진 모르겠지만.”
“알 것 같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알게 된다.
“쾅!”
본드와 매들린 스완 박사가 사하라사막의 거대한 구덩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때, 본드는 씨마스터의 크라운을 돌렸다. 아워 마커가 빨갛게 빛나고, 곧 수류탄이 터졌다. 우리의 영웅, 본드와 스완 박사는 런던으로 돌아와 있다.
 
크레이그가 개봉 예정작인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착용하고 등장할 오메가 씨마스터 새 모델

크레이그가 개봉 예정작인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착용하고 등장할 오메가 씨마스터 새 모델

폭발적인 시계이긴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시계 목록에 들어갈 만큼 멋진 건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기에 당신이 만약 실용성, 특이함, 아름다움을 기준으로(이 세 요소를 모두 갖춘 시계는 절대 없지만) 제임스 본드 영화 속 역대 최고의 시계 일곱 개를 꼽는다면 내가 선정한 목록과 비슷할지 의문이다.
 
〈뷰 투 어 킬〉(1985)에서 세이코 6923-8080을 착용한 무어.

〈뷰 투 어 킬〉(1985)에서 세이코 6923-8080을 착용한 무어.

타임피스 크로니클(Timepiece Chronicle), 제임스본드워치스(JameBondWatches), 호딩키(Hodinkee), 본드 라이프스타일(Bond Lifestyle), 워치타임(WatchTime)을 비롯한 약 3400개의 시계와 장비 관련 사이트에서 상세한 디테일을 학구적으로 열심히 다뤄준다는 건 상당히 감사한 일이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참 많은 듯하지만. 아래 시간의 흐름 순으로 정리했다.
 

 

그루엔 프레시전 510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6538을 착용하고 본드를 연기하는 숀 코너리. 실비아 트렌치 역의 유니스 게이슨과 함께 〈살인번호〉(1962)에 출연했다.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6538을 착용하고 본드를 연기하는 숀 코너리. 실비아 트렌치 역의 유니스 게이슨과 함께 〈살인번호〉(1962)에 출연했다.

숀 코너리가 〈살인번호〉(1962)에서 착용하고 등장했던 시계로, 007 시리즈 최초의 시계다. 코너리가 도박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차고 있던 것으로, 주얼이 17개인 34mm 골드 넘버다. 어쩌면 코너리의 개인 소장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라진 그루엔은 1908년부터 손목시계를 만든 미국 기업으로, 처음에는 독일제를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스위스 부품을 썼다. 중가 시계 시장의 선도 기업 중 하나였으며, 손목 모양에 딱 달라붙는 커벡스 모델이 인기를 견인했다.
 
코너리의 드레스 워치는 힙하지는 않았지만, 올드 스쿨 고전주의에는 딱이었다. 늦은 시간에 즐기는 바카라와 유혹에 완벽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액션 배우를 위한 시계는 아니었다. 당시 영화 속 본드는 뭔가를 때려 부숴야 할 때는 보다 튼튼한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6538을 착용했다. 이 역시 코너리의 개인 소장품이었을 수 있으나, 촬영 직전 프로듀서 커비 브로콜리가 자신이 차고 있던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6538을 코너리에게 건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은 007 팬이 과연 있을까. 어쨌든 그루엔은 이 편을 마지막으로 사라지진 않았다. 잘 살펴보면 〈위기일발〉(1963), 〈골드핑거〉(1964), 〈두 번 산다〉(196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에도 그루엔은 조용히 등장한 바 있다.
 
 

브라이틀링 톱 타임 REF 2002

007이 브라이틀링을 착용했던 유일한 영화 〈선더볼〉(1965)의 브라이틀링 톱 타임

007이 브라이틀링을 착용했던 유일한 영화 〈선더볼〉(1965)의 브라이틀링 톱 타임

007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였던 〈썬더볼〉(1965)에서 본드는 처음으로 ‘용도가 있는 시계’를 얻었다. Q의 설명대로 ‘유용하고 방해가 되지 않는’ 큼직한 브라이틀링 가이거는 도둑맞은 원자폭탄 두 개의 방사선을 감지해 스펙터 요원인 에밀리오 라르고가 품은 흉악한 의도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세! 이 시계는 아주 독특한 물건으로, 브라이틀링의 트레이드마크인 라운드 페이스 주위에 금속 타원이 둘러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중고품 시장에서 25파운드(한화 약 4만원)에 팔린 뒤, 그로부터 45년 뒤인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0만4000파운드(약 1억6900만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낙찰될 때까지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다. 추락하는 파일럿이나 길 잃은 탐험가를 위한 SOS 발신 기능을 갖춘 브라이틀링의 이머전시 모델은 007과 잘 어울렸을 법하지만, 브라이틀링은 〈썬더볼〉 이후 본드의 손목을 장식한 적이 없다.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5513 

〈죽느냐 사느냐〉(1973)의 마그네틱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5513.

〈죽느냐 사느냐〉(1973)의 마그네틱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5513.

로저 무어의 007 시리즈 데뷔작에 등장했던 시계로, 장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007 시리즈 속 성차별 논란의 발단이 된 시계이기도 하다. 논란에 앞서, 우리는 본드 영화에 디지털 시계가 처음으로 등장한 ‘멋진 신세계’를 살펴봐야 한다. 〈죽느냐 사느냐〉(1973)의 앞부분에서 한 여성과 침대에 있던 로저 무어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붉게 빛나는 은제 해밀턴 펄사 P2의 디스플레이를 본다. 5시 48분. 디스플레이는 아주 잠깐 등장하고,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로저 무어는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한다.
 
문을 열자 등장한 건 머니페이였다. 머니페이는 로저 무어에게 뉴욕행 티켓과 Q가 ‘수리한’ 그의 예전 시계를 전달했다. 모든 수리가 이렇게 훌륭하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온 그의 롤렉스는 근처에 있던 접시 위의 스푼을 끌어당길 정도로 강력한 자성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 자성은 여성의 드레스 지퍼를 내리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본드의 손목과 성차별 사이의 직접적이고 야비한 연관관계가 시작된 셈이다. 드레스 지퍼를 내리는 것 외에, 베젤에는 다른 용도도 있다. 본드의 손을 묶은 밧줄을 끊은, 회전 톱 역할이 그것이다. 톱 기능을 갖춘 시계는 2015년 필립스 경매에서 31만 파운드(약 5억201만원)에 낙찰됐다. 일각에서는 이 시계를 두고 ‘역사상 가장 눈에 띄었던 시계’라고 말하지만 이 케이스는 시계 메커니즘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물건치곤 높은 가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이코 DK001 쿼츠 LC REF 0674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에서 세이코 0674 LC를 차고 본드를 연기하는 로저 무어, 조스 역할을 맡은 리처드 킬.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에서 세이코 0674 LC를 차고 본드를 연기하는 로저 무어, 조스 역할을 맡은 리처드 킬.

이번에도 로저 무어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에서 로저 무어는 이 시계를 통해 MI6로부터 소환 연락을 받는데, 때문에 이 시계는 영화 초반부터 주목을 받았다. 요일과 날짜가 나오는 은제 방수 시계가 한때는 가장 핫한 아이템이었다고 생각하면 웃기게 들릴 수 있지만, 텔렉스와 다이모를 결합한 라벨 스티커 프린터가 들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놀라울 일도 아니다. 오히려 쿼츠의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이코 시계는 그 이후에도 007 시리즈에 많이 등장했다. 〈문레이커〉의 ‘스마트’ 메모리 뱅크 캘린더 M354-5010, 〈유어 아이스 온리〉(1981)의 H357-5030 듀오-디스플레이가 있었고, 〈뷰 투 어 킬〉(1985)에는 라운드 페이스 세이코가 세 개나 등장했다. 로저 무어는 클래식 시계를 차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성차별적인 용도에 사용된 세이코 스포츠 100 G757-5020을 차고 〈옥터퍼시〉(1983)에 출연했는데,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5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세이코 액정 TV 워치

무어가 출연한 〈옥터퍼시〉(1983)에서 단 한 번만(스파이 목적은 아님) 사용한 세이코 액정 TV 워치.

무어가 출연한 〈옥터퍼시〉(1983)에서 단 한 번만(스파이 목적은 아님) 사용한 세이코 액정 TV 워치.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다. 본드는 이 시계를 단 한 번만 사용했다. 극의 진행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장면이었다. 이 시계가 한 일은, Q의 장비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가슴을 줌인해 오랫동안 보여준 것이었다. 혹시 놓쳤을까 봐 말해주자면, 가슴이 나오는 동안 디스플레이상의 시간은 18일 화요일 19시 10분 38초에서 19시 10분 39초로 바뀐다. 몇 월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골드핑거〉에서 코너리가 착용한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6538.

〈골드핑거〉에서 코너리가 착용한 롤렉스 서브마리너 REF 6538.

 

오메가 씨마스터 300

〈스펙터〉(2015)에 등장하는 ‘폭발하는’ 오메가 씨마스터 300.

〈스펙터〉(2015)에 등장하는 ‘폭발하는’ 오메가 씨마스터 300.

피어스 브로스넌은 시계로 재미있는 일을 많이 했다. 〈골든아이〉(1995)에서 처음 등장한 오메가 씨마스터에는 레이저 총이 달려 있었고, 그로부터 4년 뒤 나온 〈언리미티드〉에서는 이 씨마스터에서 갈고리를 쏠 수 있었다. 나도 내 시계에서 갈고리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모두가 가끔 그런 상상을 하지 않을까? 갈고리가 나오는 손목시계를 가진 사람은 본드뿐이지만.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 코액시얼 마스터 크로노미터

다음 작품 〈노 타임 투 다이〉에서 크레이그가 착용하는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 코엑시얼 마스터 크로노미터.

다음 작품 〈노 타임 투 다이〉에서 크레이그가 착용하는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 코엑시얼 마스터 크로노미터.

가장 최근에 등장한 시계이자, 어찌 보면 가장 눈이 갈 일이 없는 시계이기도 하다. 기능도 적고, 무게도 가볍다. 하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이 이제까지의 본드 시계 중 최고임을 보여준다. 본드가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이 시계를 어떻게 사용할지,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긴 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이버들이 사용하는 시계였고 다이얼 발광이 강하니 물속에서 이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42mm, 블랙 다이얼, 티타늄 케이스, 티타늄 밀라니즈 메시 스트랩 등 구체적인 스펙을 통해 비바람에 상당히 강한 시계라는 걸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번쩍대며 기능을 잔뜩 욱여넣은 근육질의 씨마스터 프로페셔널의 시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흘러간 듯하다. ‘적을수록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이 등장한 거니까. 이 새 모델의 케이스 뒤에는 ‘62’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최초의 본드 영화인 〈살인번호〉가 개봉했던 1962년을 기리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시계들 중 단 한 개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본드 프랜차이즈에 투자를 너무 안 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을까 봐 말해두는데, 2020년 9월에 나는 경매를 통해 제임스 본드 시계를 하나 샀다.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산 건 아니고, 이베이였다. 오메가나 롤렉스는 아니었고, 해밀턴이나 세이코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가 산 건 쓰레기였다. 하지만 그냥 쓰레기는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지온 애니메이티드 토킹 007 워치’였는데, Q가 모든 걸 포기하고 H 사무엘에서 얌전히 일하게 만들 만큼 놀라운 기능‘들’이 있었다. 어찌나 많은지 설명서 여기저기에는 ‘시험해보세요! 눌러보세요!’라는 문구가 난무했다.
 
이 시계를 손목에 차보니, 쿼츠가 기계식 시계를 곤경에 빠뜨렸던 게 쉽게 이해됐다. 나의 007 시계는 시간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소리로도 알려줬다. 알람 기능도 있었다. 하지만 지온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정교하게 픽셀 처리한 애니메이션을 시계에 넣은 것이다. 본드가 문을 끽 열고 - 드물게도 높은 톤의 목소리로 - “굿 모닝, Q, 오늘의 임무는 뭔가?”라고 묻는 애니메이션과, 사각턱의 본드가 시계를 턱까지 올리고 “머니페이, M에게 연결해줘”라고 말하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본드만 나오는 건 아니다. 머니페이가 “제임스, 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라고 묻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이거야말로 궁극의 첨단이었다. 제아무리 애플워치6가 혈중 산소 레벨을 알려주고 갤럭시워치4가 혈압을 알려준다지만, 버튼 한 번에 본드가 의자에 묶여 있는 모습이나 염소 수염을 기른 악당이 “굿 모닝, 미스터 본드, 잘 주무셨나? 하하하!”라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한다.
 
이 시계의 가장 놀라운 점은 판지로 된 보증서 뒷면에 적혀 있었다. 만들어진 곳은 중국이지만, 지온의 본사는 런던 NW2 크리클우드의 노스 서큘러 로드 근처에 있다. 공식적으로는 영국제인 것이다. 본드 시계의 역사상 가장 특이한 시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드는 새빌로, 부스 진, 애스턴 마틴 등 대부분의 경우 영국제를 선호하지만 시계만큼은 스위스와 일본 제품을 더욱 좋아했다. 그렇지만 크리클우드에서 온 이 장난감은 영국제다. 본드의 픽셀 애니메이션을 담은 시계가 도착하기 하루 전, 나는 오메가의 CEO인 레이날드 애슐리만과 비대면으로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굉장히 스위스인답고, 약간 ‘괴짜’ 느낌이 있다. 나는 오메가가 본드 제국과 25년간 맺어온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각각의 시계가 어떻게 선택된 것인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영화에 나온 것과 아주 비슷한 오메가 시계를 사려면 본드의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제임스 본드를 만든 주인공인 이언 플레밍이 자메이카 절벽 위에 있는 집 골든아이에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모습. 롤렉스 익스플로러를 착용하고 있다. 1964년.

제임스 본드를 만든 주인공인 이언 플레밍이 자메이카 절벽 위에 있는 집 골든아이에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모습. 롤렉스 익스플로러를 착용하고 있다. 1964년.

“제 생각엔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애슐리만의 설명이었다. “어느 정도 퀄리티가 있는 시계를 찰 때 생기는 독특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멋진 사람이 된 기분이 들고요. 제임스 본드는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 캐릭터인데, 그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좋은 특징이 될 수 있겠죠.” 애슐리만은 본드와 오메가 사이에 영국적인 어떤 ‘연결’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스피드마스터가 아닌 씨마스터를 고른 건, 오메가 씨마스터가 처음 등장한 〈골든아이〉의 코스튬 디자이너였던 린디 헤밍의 의식적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 시계의 진정한 기원은 영국 군대와 다이빙에 있잖습니까. 헤밍은 본드 사령관에게 걸맞은 시계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또 씨마스터는 본드의 정중하면서도 강인한 성격과 어울리는 고상함과 우아함을 갖고 있죠.”
 
그러나 오메가 시계를 그토록 오래 써온 건 본드의 성격과 어울리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본드와 오메가의 조합은 어째서 ‘쿨하게’ 느껴지는 걸까? 애슐리만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예상한 대로 본드와 오메가가 공유하는 가치에 대한 것이었다. "믿을 수 있고, 정확하고, 보기 좋으며, 강하다." 애슐리만은 오메가와 본드의 관계 덕분에 오메가가 ‘혁신적이면서 첨단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시계가 어떤 역할을 할지는 물론, 영화에 얼마나 등장할지에 대해서도 오메가가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없다고 했다.
 
〈스펙터〉에 나오는 폭발하는 시계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영향이 컸다. 레이저나 톱 등 각종 기능을 갖춘 초창기 007 시리즈의 시계에 향수를 느꼈던 것이다.
“다니엘은 옛날의 재미있던 요소를 가져와 시계에 다시 특별한 기능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스펙터〉에서 시계가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걸 듣고 오메가 가족들은 정말 신이 났죠. 회사 사람들이 전부 모여 그 영화를 봤고, 시계가 제 기능을 하는 신에서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애슐리만의 말이다. 본드가 오메가 시계를 차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는 건 아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 속 본드가 선호했던 시계는 오메가가 아니고, 플레밍 역시 오메가를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메이카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 골든아이에서 찍힌 플레밍의 사진을 보면 그는 롤렉스 익스플로러 REF 1016을 차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는 슬림하고 무난한 선택이다. 블랙 다이얼, 형광 숫자, 홀로 엔드, 픽스드 링크 실버 브레이슬릿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나 생전에 교류했던 서신을 보면 그는 하이엔드 브랜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시계가 부와 지위를 상징한다는 맥락 역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본드 시리즈의 첫 소설인 〈카지노 로얄〉(1953)에는 시계를 가지고 여행을 하는 스위스인 범죄자가 등장한다. 국경을 넘을 때는 금괴보다 시계가 훨씬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1960년 6월, 플레밍은 〈문레이커〉 초기 판본에서 나치 출신 휴고 드렉스가 ‘파텍 필립’이 아닌 ‘파렉 필립’ 시계를 차고 있다는 오타를 발견한 독자에게 편지를 썼다. 플레밍은 정정해주어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앞으로 본드 소설에는 오데마 피게를 넣겠다고 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편지에서 플레밍은 본드가 ‘상당히 저렴해 소모품으로 쓸 수 있고, 늘어나는 금속 브레이슬릿이 있어 엄지 위로 올려 손 안이나 밖에서 무기로 활용이 가능한 시계를 선호한다고 쓴 적이 있다. 플레밍의 1963년 소설 〈007과 여왕〉에 그런 시계가 등장한 바 있지만, 플레밍은 일부러 롤렉스라는 단어 사용을 피했다. 팬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은 무게가 170g 정도라, 본드는 싸울 때 왼손이 느려질 것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어쩌면 그래서 2년 뒤 나온 〈썬더볼〉에서 이탈리아 출신 파일럿 주세페 페타치가 순금으로 된 롤렉스의 ‘늘어나는 금 브레이슬릿이 달린 오이스터 퍼페츄얼 크로노미터’를 착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플레밍은 악당들에게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시계를 채워주는 걸 즐겼던 게 분명하다. 〈위기일발〉에는 믿을 수 없는 캐릭터 래드 그랜트가 낡은 갈색 악어가죽 스트랩이 달린 커다란 금시계를 차고 등장한다. 플레밍에 따르면 ‘장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라드 페리고 모델인데, 스위프 초침과 날짜 등을 보여주는 작은 창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장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플레밍의 소설에는 잡다한 시계 정보가 비교적 부족한 편이다.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 그 부분은 대부분 영화가 채워줬다.
 
플레밍은 컬렉터가 아니었다. 그는 “신사의 시계는 새빌로 양복만큼이나 그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작 그에게 중요했던 시계는 롤렉스 익스플로러뿐이었다. 1964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지녔던 시계 역시 그것이 유일했다는 게 유족들의 증언이다. 본드라면 어땠을까? 본드는 오래된 롤렉스나 세이코, 오메가를 모았을까? 배터리를 교환하거나 오토매틱 와인더 세팅을 했을까? 갖고 싶던 시계를 아쉽게 놓치고, 경매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리면 그저 한숨을 쉬고 말았을까? 실제 증거는 없지만, 기록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 플레밍은 본드가 시계 없이도 잘 살았을 거라고 말한 바 있다.
 
〈살인번호〉가 출간된 지 10주 정도가 지났고, 이 책이 첫 본드 영화로 만들어지기 4년 전이던 1958년 6월, 그는 BW 구든이라는 독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적절한’ 시계라면 무엇이든 찰 겁니다. 하지만 시계가 없을 때도 믿을 만한 대안은 있죠. 제임스 본드는 지구 어디에 있든 태양을 보고 몇 분 만에 시각을 가늠하는 훈련을 했으니까요.” 본드가 젊었을 때는 장비와 제품들도 훌륭했지만, 그의 곁에는 언제나 가장 뜨겁고 가장 오래된 시계 역시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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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WRITER SIMON GARFIELD
  • TRANSLATOR 이원열
  • PHOTO 게티이미지스 코리아/ 1XRTS/ 유니버설 픽쳐스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