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워치 시대, 기계식 시계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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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이얼, 클랩시드라, 그노몬 등 원시적인 형태의 시계를 뒤로하고 기계식 시계가 전면에 등장한 때는 대략 13세기였다. 천체를 탐구하던 과학자가 기계식으로 구현한 소우주 모형에서 시작한 시계는 생활에 꼭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정밀한 도구로 발전했다.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온 기계식 시계의 아성을 무너뜨린 건 194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쿼츠 무브먼트였다. 손으로 자주 감아줘야 하는 태엽보다 오랜 시간 안정적인 동력 공급이 가능한 전지, 물리적 진동을 이용하는 휠과 스프링보다 1만 배 빠른 고진동 쿼츠 진동자 등을 이용한 이 새로운 구동장치는 기계식보다 정확했고, 심지어 얇고 작게 만들 수 있어서 파격적인 디자인도 적용될 수 있었다. 1969년 세이코가 양산형 모델, 쿼츠 아스트론을 내놓은 이래 스위스 시계 회사들도 앞다투어 쿼츠 시계를 내놓았고, 결국 1970년대 말 전통적인 방식만 고집하던 회사들은 대거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를 시계업계에서는 쿼츠 파동(quartz crisis) 시기라 부른다.
혼돈의 세월이었지만, 기계식 시계는 살아남았다. 1983년 본격적으로 출범한 스와치 그룹은 패셔너블한 스와치 쿼츠 시계로 마련한 재원을 바탕으로 블랑팡, 브레게 등 전통적인 시계 브랜드를 되살렸다. 같은 시기 파텍 필립, 롤렉스 등 독립 시계 제작사들은 오히려 기계식으로 가장 복잡한 기능을 탑재한 시계는 물론 심해 방수가 가능한 탐험용 시계 등으로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며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도모했다. 1990년대, 기계식 시계는 더 이상 시간만을 알려주는 전문 도구가 아니었다. 부와 취향을 드러내는 패셔너블한 액세서리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에는 스와치, 리치몬드, LVMH 등 거대한 글로벌 그룹이 시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시계는 바야흐로 전통, 역사, 문화적 가치, 스타일을 대변하는 다의적인 오브제가 됐다.
한동안 기계식과 쿼츠로 양분됐던 시계 시장에는 이제 똑똑한 스마트워치가 더해졌고, 이들은 서로 손목 위를 선점하려 하고 있다. 스마트워치는 사실 시계라는 이름보다는 몸에 부착할 수 있는 전자장비, 웨어러블 컴퓨터란 개념에서 시작됐다. 이미 1977년 휴렛 패커드가 HP-01이라는 알람, 타이머, 스톱워치, 계산기를 넣은 장치를 소개했고, 1983년 세이코가 소개한 데이타-2000은 쿼티 키보드를 부착해 문자도 입력할 수 있었다. 최초의 무선 스마트워치는 1994년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해 만든 아이맥스의 데이터링크로 여겨진다. 디지털 다이얼을 가진 쿼츠 시계와의 차이점을 꼽으라면 바로 컴퓨터 등 다른 기기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명 ‘삐삐’라 불렀던 페이저, 디지털 스케줄러였던 PDA, 노트북과 휴대폰 등 전자통신장비들의 발전과 함께 스마트워치는 보조장치로 존재를 확고히 했다. 2008년 LG가 프라다폰과 함께 ‘손목시계형 패션 아이템이자 휴대폰 액세서리’로 소개한 프라다링크와 이듬해 삼성이 내놨던 손목시계형 휴대폰, 그리고 2013년 ‘미래를 위한 제품’이라고 공개한 ‘갤럭시 기어’가 대표적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계업계는 스마트워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기계식 시계의 부활과 함께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리며 세계 진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요긴했으나 지금은 잘 쓰지도 않을 타종 기능이나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을 한데 담아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수억 원에 내놔도 예술품에 버금가며 판매가 되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상황이 바뀐 건 2014년 9월, 애플이 애플워치를 내놓은 때였다. 그제야 시계업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스와치 그룹의 닉 하이에크 회장은 “별로 긴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위블로의 수장이었던 장-클로드 비버 대표도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스마트워치와 너무 많이 닮았다. 솔직히 말하면 학생이 디자인한 것 같다. 럭셔리는 항상 시대를 초월한 것이 있다. 스마트워치는 전자장비일 뿐 시계와는 다르다”라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뭔가 준비하는 눈치였다.
이듬해 바젤월드는 매우 흥미로웠다. 많은 기자가 약속한 듯 “스마트워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2의 ‘쿼츠 파동’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공통 질문을 했다. 스마트워치가 시장을 장악해 기계식 시계에 또 다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당시 파텍 필립의 티에리 스턴 회장, 티쏘의 프랑수아 티에보 대표, 반클리프 아펠 니콜라스 보 등 여러 수장들이 비슷한 대답을 내놓은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은 시계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 많기에, 스마트워치의 출현을 환영한다. 그 유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손목에 무언가를 착용하는 일이 습관이 되면, 아무것도 얹지 않았을 때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결국 언젠가 더 좋은 시계를 구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쿼츠 파동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이다.
모두가 이렇게 수동적인 낙관론을 내세운 건 아니었다. 몇몇 브랜드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우선 ‘커넥티드(connected) 워치’라는 하이브리드 시계를 내놓았다. 2015년 프레데릭 콘스탄트와 알피나가 소개한 오를로지컬 스마트워치(Horlogical Smartwatch)가 그 예다. 연간 5000만 개의 시계를 판매하는 파슬 그룹도 이를 대비해 2015년 스마트홈 제품을 생산한 미스핏(Misfit)을 3000억원에 인수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이브리드 시계들은 자체 앱을 통해 스마트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아날로그 다이얼을 고수해 동력 소모가 적었다. 기존 쿼츠 시계와 동일하게 배터리를 2~3년에 한 번만 교체해주면 되는 일석이조의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2015년의 대미는 그 무렵 태그호이어의 CEO였던 비버 대표가 장식했다. 전혀 눈을 돌리지 않을것 같았던 그가 바젤월드 마지막 날, 태그호이어 부스 앞에서 인텔 및 구글과 손잡고 스마트워치를 개발할 것이라는 깜짝 발표로 업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이후 그가 총괄했던 LVMH 그룹 산하 다른 브랜드도 동참했다. 태그호이어에 이어 위블로가 국제축구연맹(FIFA)과 연계한 빅뱅 커넥티드 워치를, 루이 비통이 기존 땅부르 시계 케이스와 스트랩을 호환할 수 있는 모델을 내놓았다. 뒤늦게 LVMH 그룹에 합병한 불가리도 2017년 디아고노 마그네슘 콘셉트 시계라는 이름으로 와이즈키(Wisekey)라는 스위스 사이버 보안 회사와 손잡고 암호화된 디지털 지갑을 탑재한 시계를 발표했다. ‘불가리 볼트’란 앱을 통해 비밀번호, 은행계좌, 신용카드 등 개인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을뿐더러 집과 자동차의 경보 시스템도 개폐, 활성화할 수 있다는 설명은 스마트워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듯했다.
리치몬드 그룹에서는 몽블랑이 제일 먼저 나섰다. 2015년 1월 1일 당시 제롬 랑베르 대표가 새해 인사와 함께 기존 시계 스트랩에 끼워서 그대로 착용할 수 있는 E-스트랩을 소개했고 뒤이어 커넥티드 워치를 출시했다. 몽블랑 특유의 디자인을 그대로 담은 스크린에 고급스러운 케이스와 몽블랑 스타 로고가 박힌 충전기는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스와치 그룹도 티쏘와 스와치를 통해 스마트워치를 소개하고 결제 시스템도 추가했다. 스와치는 1983년 출범 직후 여러 사업에 투자했는데, 이미 1993년에 스와치 액세스라는 비접촉식 기술을 개발한 바 있다. 이를 발전시켜 2017년 삼성페이나 애플페이처럼 시계로 결제가 가능한 ‘스와치페이(SwatchPay)’를 출시한 것이다. 당시 스와치는 다른 결제 수단보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시계라서 잃어버릴 확률이 적다는 점을 강조하며 홍보에 나섰다. 미국에서도 타이맥스가 이와 유사한 타이맥스페이를 출시했다. 이 무렵 시계업계의 오스카상,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에서는 스마트워치를 수상 카테고리에 넣을 것인가를 주제로 갑론을박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에서는 2018년부터 스마트워치 포함, 500만원 이하의 시계를 출품할 수 있는 챌린지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물론 지난 3년간 스마트워치가 수상한 적은 없다.
현재 시계업계와 통신업계의 스마트워치는 각각의 자리를 지키면서 상생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통신업계의 스마트워치가 최신 기술 탑재에 매진하는 동안 시계업계의 스마트워치는 가성비 경쟁보다는 독창성, 희소성을 부여해 차별화하는 전략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골프 에디션’에 이어 올해 8월, ‘수퍼마리오 에디션’을 한정판으로 내놓아 완판을 기록한 태그호이어의 커넥티드 워치다. 다만 전자통신업체와 경쟁할 만큼의 큰 목표치를 두고 있진 않아 그저 구색 맞추기처럼 보이거나, 신규 진입한 브랜드가 많지 않다는 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고가의 시계업계에서는 이미 해온 것들에 더 매진하는 모습이다. 팬데믹 상황이라 잠시 주춤한 듯했지만 보복 소비, 명품 지식이 많은 MZ세대의 구매력 상승, 시계를 재테크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맞물리며 일부 모델이 선납을 하고도 1년 이상 순번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선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최근 시계업계는 스마트워치와의 차이 중 하나로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매년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나와서 몇 년 사용 못 하고 폐기 처분되는 스마트워치와 달리 고가 시계는 잘 관리하면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으니 그 자체로 환경을 보호한다는 논리다. 이는 시계나 포장재 개발, 제작, 유통까지 재활용 등을 고려하는 적극적인 행보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시계업계는 그 어느 때보다 예술성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기술의 평준화로, 기능적으로는 고가와 저가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럭셔리군은 무브먼트부터 다이얼, 케이스까지 에나멜, 조각, 미니어처 페인팅 등 장인이 긴 시간 일일이 수공으로 마감해야 하는 공예 기법으로 채운 희소성 높은 한정판 제품을 내놓고 있다. 덕분에 보기 어렸웠던 엄청난 가격의 시계들이 국내에도 들어오고 있다. 이런 극강의 시계를 기꺼이 구입하는 고객이 있는 한, 일부 인지도 높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분명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사실 변화해야 할 시점은 문턱에 와 있다. 조사연구기관 갤럽이 2021년 6월에 발표한 ‘2012-2021 스마트폰 사용률&브랜드, 스마트워치, 무선 이어폰에 대한 조사’가 이를 방증한다. 2015년 스마트워치 사용률이 1~2%에 그쳤던 반면, 2019~2020년에는 11~12%로 늘었고 2021년에는 19%로 급등한 것이다. 25~54세 직장인에게 물어본 ‘가장 좋아하는 시계 브랜드’ 순위에 롤렉스, 까르띠에, 태그호이어와 함께 삼성 갤럭시와 애플이 들어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통에 기반을 둔 업계에서는 분명하게 구분 짓고 있지만, 일반 대중은 이미 스마트워치를 이름 그대로 시계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시계업계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변화의 과정은 당연하다. 시계업계는 그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안주하는 분야가 아니다. 장인의 손길은 마지막에 화룡점정을 찍을 뿐 애초에 시계는 그 탄생부터 미세 공학, 최신 소재, 최고의 세공 기술 등의 집합체였다. 업계는 계속 새로운 설비를 들이며 기술을 개선해왔다. 몇 년 전부터 농담처럼 ‘시계 브랜드에서 무브먼트를 만들면 집에 있는 3D 프린터로 내가 원하는 케이스를 만들어 끼워서 다니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 업계에서는 이미 3D 프린터로 프로토타입은 물론 시계 케이스도 만들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블록체인 기술도 도입돼 바쉐론 콘스탄틴, 위블로, 율리스 나르덴, 브라이틀링 등은 이미 시계에 대한 디지털 정품 인증서를 제공하고 있다. 변화가 매우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인 셈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랑에 운트 죄네 등 전통적인 시계 브랜드가 스마트워치를 생산하게 될까? 아직은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글쎄’ ‘아마도’에서 ‘이미 나왔어’로 바뀔 것으로 예상한다. 아니, 사실 진심으로 기대한다. 하이브리드 방식을 발전시켜 언젠가 스마트칩(반드시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교체 가능해야 한다!)을 넣은 바쉐론 콘스탄틴의 패트리모니 시계를 구입할 날을…. 그때가 되면 서랍 속에 폐기됐던 스마트워치를 싹 치워버리고 기분 좋게 그 시계를 구입할 것이다.
Who's the writer?
정희경은 제네바시계그랑프리(GPHG) 심사위원을 지냈다. 스위스 고급시계재단(FHH)과 함께 일하며, 시계업계에서 컨설팅과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