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두 유 노 김치?' 시대의 종말과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평가도 슬금슬금 바뀌기 시작했다. 비평적인 기사들은 더는 나오지 않는다.

BY김현유2021.10.21
 
볼드모트가 점점 늘어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어떤 특정 이름을 비판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BTS. 맙소사. 볼드모트라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BTS라니. 아미는 어디에나 있다. 〈에스콰이어〉에도 신분을 숨긴 아미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몇몇 음악평론가들은 BTS의 빌보드 차트 1위가 팬덤에 의해 부풀려진 다운로드 공세로 인한 성공이라고 썼다가 약간의 곤욕을 치렀다. 그들에 따르면 스트리밍이 대세인 시대에 BTS는 팬덤의 적극적인 다운로드로 차트를 정복했으니, 약간의 반칙이라는 것이다.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가 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한 이야기다. 역시 평론가들이 문제다 어유.
 
 
위 문단을 쓰고 지금 이 문단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데까지 1시간이 걸렸다. 위의 문단이 혹여나 내가 남의 말을 빌려 BTS를 돌려 까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고민한 탓이다. 하지만 역시 고백해야겠다. 나는 BTS의 팬은 아니다. BTS는 내가 ‘한번 파볼까?’ 고민하는 사이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Dynamite’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한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약간 멍해졌다. 그건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내 마음속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의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있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오스카라고? 시간 여행자가 2년 전의 나에게 찾아와 “봉준호가 오스카 작품상을 받아”라고 말했다면 “그래. 박근혜도 사면되겠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아. 설마.
 
BTS가 빌보드 차트를 여러 번 정복하자 이건 일종의 ‘뉴노멀’이 됐다. 나는 BTS가 〈더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에 나와 1964년 비틀스의 에드 설리번 쇼를 재현하는 걸 보고 “아무리 그래도 비틀스는 좀”이라고 생각했던 매우 시니컬한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고백한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BTS는 진짜 비틀스가 됐다. 나는 더는 BTS의 성공에 시니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됐다. 얼마 전 나는 유튜브 서핑을 하다가 ‘Butter’ 뮤직비디오를 오랜만에 봤다. 놀라웠다.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분명히 ‘지나치게 많은 팬에게 소구하고 싶어 하는 평범한 팝 댄스’라고 생각했다. 다시 그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끝내주는 팝이었다. 이건 내가 마침내 시니컬한 비평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행복한 국뽕러가 됐다는 증거일까?

 
국뽕이라는 단어는 아마 201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개 ‘애국심에 도취되어 자국이 만드는 콘텐츠는 무엇이든 찬양하는 행태’를 비꼬기 위해 활용되는 단어였다. 인터넷에는 비공식적으로 ‘국뽕 순찰대’라는 것이 존재한다(내가 지어낸 단어지만 그 비공식 조직은 분명히 존재한다). 국뽕에 조금이라도 빠진 듯한 글을 보면 곧바로 달려가서 정신 차리라며 찬물을 뿌리는 그들은 국뽕이 쇼비니즘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종의 의인들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국뽕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급격하게 변했다. 한국 문화는 국제적 대폭발을 일으켰다. BTS와 블랙핑크는 세계 최대의 밴드가 됐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오스카를 휩쓸었다.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유엔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조정했다. 지금까지 ‘국뽕 순찰대’의 일원으로서 충실히 자신의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을 관리하던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혼돈의 시대가 왔다. 더는 “두 유 노 김치? 두 유 노 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갑자기 도달한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처음 넷플릭스에 올라오자 한국 소셜미디어에는 엄청난 불평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국, 일본 문화에서 빌려온 ‘데스 게임’ 장르를 한국적인 신파와 결합한 범작이라는 것이 대개의 의견이었다. 내 의견도 비슷했다. 나는 특히 6화가 별로였다. 구슬치기를 활용해 캐릭터들의 스토리를 편하게 입으로 풀어내며 시청자를 울리려고 작정을 한 기계적 에피소드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자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넷플릭스 순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평가도 슬금슬금 바뀌기 시작했다. 비평적인 기사들은 더는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한국의 문화 상품은 한국에서 비평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얻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국뽕 순찰대’로 활약해온 당신은 어쩌면 이 거대한 물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한류는 결국 당신이 보낸 끝없는 볼드모트 리스트였단 말입니까.
 
성공의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10월 10일 영국 〈더 타임스〉는 ‘어떻게 한국 문화가 세계를 정복했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오징어 게임〉이 (영국 드라마인) 〈브리저튼〉을 꺾고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시리즈가 될 예정이라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는 아주 영국적인 표현으로 기사는 시작된다. 그런데 이 기사조차도 ‘왜 한국 문화인가?’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사실 그걸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방시혁과 봉준호도 성공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여전히 “모르겠다”고 답한다. 일종의 겸양이겠지만 사실이기도 할 것이다. 나름대로 분석해보자면, 한국은 2000년대 이후 끊임없이 콘텐츠 경쟁력을 키워왔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일본을 대체하는 문화적 강국으로 성장한 지 오래다. 〈오징어 게임〉은 팬데믹 시대에 언어와 배급의 장벽을 뛰어넘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등장으로 대폭발을 일으킨 한류의 정점, 혹은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미국 작은 도시의 베이커리에서 달고나 세트를 5달러에 팔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설명이 되느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현상 앞에서 약간의 비평적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이 글을 원래 ‘〈오징어 게임〉을 현란하고 찬란하게 깔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오징어 게임〉 6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외국인들이 올린 동영상을 보며 마음이 달라졌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한국적인 신파라며 비웃었던 바로 그 구슬치기 장면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다. 당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나도 어리둥절하다. 우리가 그토록 거부했던 한국 콘텐츠의 기묘한 특징들이 국제적인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린 셈이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한국인은 에스파의 신곡을 들으며 “전혀 다른 노래 다섯 개를 희한하게 이어 붙였네”라고 한탄한다. 해외 음악 유튜버들은 같은 걸 들으며 “전혀 다른 노래 다섯 개를 기막히게 이어 붙였네”라며 감탄한다. 그들의 감탄은 역수입된다. 오랫동안 진절머리 쳤던 SMP(SM엔터테인먼트 특유의 음악)가 뭔가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놀라다가 결국에는 SMP가 슬그머니 마음속에서 다시 좋아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국뽕의 시대에 국뽕 순찰대의 임무는 완벽하게 사라진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동네 축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할 말은 있기 마련이다. 다만 〈오징어 게임〉으로 정점에 오른 한류가 마침내 어떤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건 국뽕 순찰대 여러분에게도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국뽕을 통해 마침내 국뽕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됐다는 징조니까 말이다.
 

 
Who's the writer?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