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킷, 셔츠, 타이 모두 디올 맨. 타이핀 벨앤누보.
정명석은 아무래도 기영 씨가 그전에 맡아온 캐릭터들과는 결이 다른 부분이 있었죠.
일단 정신적 스트레스가 큰 캐릭터였어요. 외워야 할 것도 많고, 그것들의 개념이 어렵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그전 작품들은 육체가 더 힘들었죠. 제스처가 커야 했으니까. 바꿔 말하면, 예전에는 보여주는 것 위주로 연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영우〉를 하면서 새로운 걸 많이 느꼈어요. 명석이도 우영우한테 많이 배운 것 같고, 강기영도 박은빈한테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은빈 씨는 연기를 대하는 태도나 현장 분위기를 만드는 노력이 정말 대단해요. 항상 내가 실수하는 것 같고, 내가 틀리는 것 같고, 은빈 씨는 정말 똑 부러지거든요.
제가 〈우영우〉 촬영 직전에 은빈 씨를 인터뷰했는데, 정말 올곧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연기에 대한 자세도 단순히 ‘열정’이라 에두르기 힘든 묘한 에너지와 방법론을 갖고 있고요.
맞아요. 굉장히 똑똑한 배우인데, 또 어떻게 표현해야 대중이 재미있어 하는지도 아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엄청나게 큰 능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똑똑한 데다 그런 부분까지 갖고 있으니까, 와, 너무 커 보이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브로맨스를 많이 했잖아요. 사실 남자끼리 티키타카를 주고받는 장면은 아무래도 좀 과감하고, 서로 거칠게 주고받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촬영을 할 때 느끼는 재미가 은빈 씨랑 연기할 때 똑같이 느껴졌어요. 이걸 던지면 이게 돌아오고, 저걸 던지면 저게 돌아오고. 그래서 너무 즐거웠죠.
연기 잘하는 분들과 합을 맞출 수 있다는 게 그런 부분이 너무 즐겁죠. 같이 촬영하면 완전히 새로운 뭔가가 창조되니까. 예를 들어 제가 “자, 나가시죠” 했는데 저쪽에서 똑같은 제스처를 하면서 “나가시죠” 하면 그 순간은 대본 볼 때는 없었던 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없었던 뭔가가 반짝반짝 생성이 되니까 늘 새롭죠.
〈우영우〉는 특히 매 화 달라지는 배우들의 면면이, ‘우리나라에 좋은 배우가 이렇게 많구나’ 새삼 감탄하게 되는 드라마이기도 했죠.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을까요?
정말 다 잘해주셨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이도경 배우님이에요. 1화 노부부 폭행치상 사건 때 남편 박규식 역할로 나왔던. 선배님이 그날 촬영장에 박규식 씨가 되어서 오셨더라고요. 머무는 내내 박규식 씨로 계시다가, 박규식 씨로 나가셨고요. ‘히스테릭하고 폭력적인 노인’이라는 그 캐릭터에 대한 몰입을 한 번도 안 깨신 거예요. 보통 그런 역할을 하면 커트를 하면 풀어지고, 큐 하면 다시 몰입하는 식이거든요. 그런데 선배님은 정말 딱 박규식 씨 같아서 촬영을 안 할 때도 다가가질 못하겠더라고요. ‘이렇게까지 몰입을 하시는구나’ 하고 많이 놀랐고, 지금도 기억이 많이 나요. 이봉련 배우처럼 에너지가 좋은 배우도 생각나고요. 영화 〈엑시트〉 때부터 느낀 거지만 누나도 합을 맞출 때마다 대본에 없던 뭔가가 자꾸 만들어져서, 그게 참 즐거워요.
그들 사이에서 정명석 변호사를 소화하는 강기영 배우는 어땠을까요? 아까 얘기했듯 그전까지 해온 캐릭터와는 좀 다른 측면이 있었는데.
뭔가를 배우려면 어쨌든 기회가 주어져야 하잖아요. 해보면서 습득해야 하니까. 그런데 제가 재미난 캐릭터를 많이 하다 보니까, 결이 다른, 이런 점잖은 역할은 제안이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물론 더러 있기는 했죠. 그런데 그때는 또 제가 그런 역할을 ‘불편한 옷’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한테 안 맞는 옷이라고. 그랬는데 마침 명석이를 연기하면서 많이 배웠죠.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기본기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시청자가 봤을 때는 사실 잘 안 보일 수 있는 것들, 연극영화과 같은 데에서나 얘기하는 것들, 예를 들어 호흡 같은 부분에 집중한 거죠. 그래야 안정적으로 대사를 할 수 있으니까.
더블 재킷 YCH by GGUMIM. 팬츠 드리스 반 노튼. 브로치, 링 벨앤누보. 이너 슬리브리스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기영 씨는 굉장히 독창적인 ‘구제불능 캐릭터’ 연기를 구축한 배우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자유로운 표출을 못 하는 게 혹시나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기본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군요.
아이, 중간중간에 답답한 느낌 많이 받았죠.(웃음) ‘이걸 풀어내야 하는데’ 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때로는 이게 한계인가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그 한계가 앞으로도 깰 수 없는 한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에는 이만큼 풀었으니까 다음에는 조금 더 풀어내보자 하는 마음이에요. 한 번에 다 풀 수는 없는 거니까.
〈우영우〉 안에서 찾자면 동그라미 같은 캐릭터를 많이 맡았었죠.
맞아요. 그래서 (주)현영이 보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어, 저런 거 진짜 재미있는데’ ‘와 저거 진짜 재미있게 잘 살린다’ 하고요.
그런 익살 연기는 으레 임기응변의 영역으로 인식되기 쉬운데,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함께 했던 박서준 배우는 강기영이 준비를 정말 많이 해오는 배우라고 한 적 있더라고요.
열심히 했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내 대사만 많이 본 시기인 것 같아요. 상대방 대사도 물론 보긴 했지만 제 캐릭터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거죠. 준비를 한 것도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재미있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고. 이제는 그 에너지로 상대방에게 좀 더 집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는 리액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준비를 많이 하는 게 능사는 아닌 게, 상대방의 새로운 뭔가를 받아들였을 때 금방 바꿀 수가 없어요. 그래서 비운 상태로 가서 같이 채우는 것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죠.
강기영이라는 배우가 큰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제가 그런 식의 웃음, 그런 식의 재미를 좋아하는데, 그걸 연기로 풀었을 때 잘 전달된 부분이 있었죠. ‘어, 내 주위에도 저런 애가 있는 것 같은데’ 싶은 인물을 연구하고 연기로 옮기니까 좋아해주셨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런데 그런 건 이제 많이 했으니까요. 그건 그것대로 두고, 지금의 강기영은 안 해본 걸 더 배워보고 싶어 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우영우〉를 보신 분들이 또 새로운 모습이 궁금하다고 해주시니까 저도 도전해보고 싶고요.
들뜨는 건 경계하지만 가능성은 용기 있게 받아들였군요.
물론 불안함도 있죠. 하지만 그보다는 많은 기회가 올 것 같아서 일단 설레는 상황이에요. 어떤 역할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지 너무 설레어서 불안함은 잠시 잊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소속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연기를 잠깐 쉬었거든요. 새로운 배역이 들어왔을 때 하자, 하고 기다렸던 거죠. 말씀드렸듯이 재미있고 유쾌한 역할들도 좋지만 이게 너무 많이 보여지면 좀 식상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기다림의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아이도 막 태어났으니 막막한 부분도 있었고요. 그런데 〈우영우〉가 이렇게 잘되어주니까, 아이가 복덩이지 싶더라고요. 저는 사실 이 모든 게 가정을 꾸리면서 잘 풀린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내는 제가 정말로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줬고, 이제 8개월 된 베스트 프렌드도 엄청나게 큰 힘이 됐으니까요.
인스타그램에 아들 발과 본인 발을 나란히 찍은 사진을 올리고 이렇게 써두기도 하셨죠. ‘새로 태어난 놈, 다시 태어난 놈.’
네. 그건 사실 제가 쓰고도 ‘이거 되게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요.
(웃음) 댓글 반응도 좋았으니까요. 주변에서도 좋아해줬고, 저희 엄마도 굉장히 좋아하셨고요.
네, 오늘 제가 궁금한 건 다 여쭌 것 같습니다.
수고는 기영 씨가 했죠. 오늘 많이 힘드셨죠?
진이 좀 빠지긴 했는데요. 화보 촬영하고 나면 늘 그런 것 같아요.
워낙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저희가 촬영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들 이것저것 요청도 많이 드렸잖아요. 얼굴에 바람을 쏴봐도 되겠냐거나, 과일을 게걸스럽게 먹어주면 어떻겠냐거나. 사실 그때 답변도 감명 깊었거든요. “새로운 시도 해보는 것 다 좋으니까 그냥 편히 시켜주세요. 해보다가 어려운 게 있으면 그때 말할게요.” 이렇게 말씀하셨죠.
제가 워낙 다 해보고 살았습니다.(웃음) 다 해야 했고.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걸러내는 것들이 내게 필요했던 거라면 어떡하지?’ 안 해보고 그냥 편의에 맞게 골라내다가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잖아요. 해봤는데 진짜 못 하겠으면 그때 가서 얘기하는 게 낫죠.
강기영이라는 사람이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잘 보이는 이야기 같네요.
그래요? 꼭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예스.(웃음) 다시 태어난 놈입니다. 정리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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