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스타일리스트 선생님과 헤어 메이크업 선생님들이 잘 만들어주시고 포토그래퍼님이 포착도 잘해주셔서. 저는 그냥 얻어먹기만 한 것 같아요.
슈퍼모델로 커리어를 시작했잖아요. 어릴 때는 태권도를 했고, 연기는 대학에 가서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사실 저는 딱히 어떤 것도 꿈꿔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회사에 다니고, 남편을 만나서 아기 낳고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그냥 알고 있는 삶의 바운더리가 그랬어요. 제가 도전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뛰어난 부분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태권도도 여섯 살 때 언니 따라서 갔다가 시작하게 된 거고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기에는 태권도 4단이지 않나요?
제가 어릴 때부터 키가 컸어요. 늘 또래보다 컸고, 유연성도 있어서 태권도를 곧잘 했던 거죠. 사실 저는 정말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얼떨결에 대회 나갔다가 금메달도 따니까 부모님이 계속 하라는 거예요. 제가 또 하라고 하면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키는 대로 다 소화하는 그런 면이 있거든요. 결국 중학생 때까지 하다가 4단을 따면 그만두게 해주겠다고 해서 4단을 딴 거죠.
하하하. 그럼 슈퍼모델 활동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제가 학구열이 굉장히 높은 외고에 진학해서 정말 이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운동은 그만뒀지만 그래도 그때 체력은 남아 있으니까.(웃음) 그래서 운동하느라 뒤처진 학업을 많이 끌어올렸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가 되니 한계가 왔어요. 지쳐 있으니까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TV 방송에서 슈퍼모델을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하니까 너 나가보라고. 현역 모델까지 포함해 지원자가 2000명이 넘는 프로그램이었고, 저는 어차피 예선에서 떨어지겠지 하고 나간 건데 덜컥 붙은 거죠. 그때도 저는 정말 빨리 집에 가고 싶었어요. 수행평가를 포기하고 올라온 거였고, 다음 날은 6월 모의고사였고, 그 주 주말에는 독일어 자격증 시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내려갈 거라고 해도 엄마, 아빠, 선생님까지 다 너 이거 해야 한다는 거예요.
(웃음) 또 본인의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성취가 시작됐군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아냐. 정신 차려. 너는 공부를 해야 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어요. 저는 또 늘 시키는 대로 해오던 사람이니까 제멋대로 결정은 못 하겠고. 그래서 ‘그것들 다 포기하고 하는 건데 이거 떨어지면 내 인생은 끝이다’ 하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임한 거죠. 결국 운이 많이 따라서 최종 선발이 됐고, 그러고 나니까 선생님이 연극영화과 지원을 준비해야 할 것 같대요. 4개월 동안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 시험도 망쳤으니까. 그리고 선생님이 방송을 보니 제 적성에도 맞는 것 같다고요. 그래서 급하게 입시 준비해서 연극영화과에 가게 된 거죠.
어, 아니에요. 저는… 제가 연기를 잘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한 번도.
첫 영화 〈미성년〉의 김윤석 감독은 주역 캐스팅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어요. “기교가 좋은 배우보다 서툴더라도 자기 목소리가 있는 사람을 뽑고 싶었다.”
그런 목표는 있었어요. 제가 단기간에 입시 준비를 하면서 말하자면 ‘입시 연기’라는 걸 배웠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느새 몸에 배어버린 거예요. 대학에 와서 김고은 선배님이나 박소담 선배님 같은 분들, 또 여러 독립영화들을 보면서, 그제야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자기만의 목소리로 감정을 펼치면서 어느 순간 관객에게도 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게끔 하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배우가 있잖아요. 나도 그런 걸 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후로 1, 2년 동안 계속 그런 훈련만 했어요.
연기적 지향점이 김윤석 감독과 맞았던 거네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전까지 오디션 1차도 통과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정말 많은 오디션을 봤는데 다 떨어졌고. 2차까지 가서 탈락하면 뭐가 문제인지 묻기라도 할 텐데 아예 연락도 오지 않는 나날이 계속됐던 거예요.
‘오디션에 계속 떨어진다’는 게 약간 수사적 표현처럼 되어버렸지만 저는 사실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 같아요. 내 ‘진짜’를 쏟아내 보여주는데 계속 거절을 당한다는 게, 자칫 수렁에 빠질 수 있는 일이니까.
제가 그랬어요. 수렁에 빠져 있었죠. 언제든 거절을 당할 수 있다는 마음이 쌓이니까, 모델 일을 할 때는 되게 밝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분하고 다운된 사람이 됐고요. 스스로 계속 안 예쁘고 못났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가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매일 새벽 기도도 하고, 예배도 나갈 수 있는 건 다 나갔어요. 겨우 만나뵙게 된 한 감독님이 책을 좀 읽으면 대본 보는 눈이 좋아질 것 같다고 하셔서 그때부터는 아예 책을 끼고 살기도 했고요. 제가 사실 책을 별로 안 읽는 편이었는데,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도 책을 좋아해요. 사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큰 자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 못 했고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계속 책만 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제가 책에 들어가서 혼자 연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연기를 너무 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시켜주니까.(웃음)
〈미성년〉의 주연 발탁 연락이 왔을 때는 정말 기뻤겠네요.
기적이었죠. 일단은 1차 합격부터가. 오디션을 보고 3주가 넘게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최종에 올랐다는 연락이 왔으니까요. 사실 제가 그전에 단편영화 관계자 분한테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관계자들이 1차 오디션 영상을 다시 보느냐고요. 그런데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다 폐기한다는 거예요. 그때 충격을 좀 받았죠. ‘잠깐이라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한 건데 그게 그렇게 버려지는구나.’ 그래서 〈미성년〉도 글이 너무 좋아서 제발 단역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면서도, 또 동시에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이 테이프도 어차피 그냥 버려질 거야.’ 너무 하고 싶으니까 자꾸 한편에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사실 최종 합격 연락보다 파이널리스트에 들었다는 얘기가 더 감격스러웠어요. 누가 내 영상을 봤다는 거잖아요. 내 연기를.
너무 간편한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절박한 마음이 또 〈미성년〉의 윤아라는 캐릭터와 맞닿는 부분이 있었을 수 있겠네요. 처음 본 동생에게 자기 인생을 바치겠다고 할 만큼 사실은 사랑이 많은 아이인데, 주위 모든 것에 깎이고 깎여서 뾰족하고 냉담해진 캐릭터잖아요.
맞아요. 저도 세상에 나와서 겪은 게 다 거절이었잖아요. 거절, 거절, 거절, 거절… 그러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을 치게 됐고. 윤아도 세상에서 아무도 본인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보호막을 치고, 뭐든 이렇게 툭툭 사납게 나오는 친구였고요. 그래서 윤아 역할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촬영하는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잘 정도로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캐스팅이 된 건 너무 기뻤는데, 이게 사실 좀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단역도 안 해본 애가 무슨 주인공이야.(웃음) 저는 단계를 되게 중요시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이런 상업영화에 주인공으로 한 달 연습하고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 한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지만 촬영 들어가 보니까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거죠. 어버버 하다가 그냥 끝나버린 것 같고. 제가 이 인물을 너무 사랑하고 대본도 좋아했기 때문에 한 장면이라도 놓친다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첫 촬영 이후로 어떻게든 해내려고 발악했던 것 같아요. 그냥 계속 밤을 새우고, 에너지 드링크 마시고, 당 떨어지니까 사탕 먹고, 나중에는 살이 쭉쭉 빠져서 정말 해골처럼 다녔는데, 또 카메라 돌아가면 어떻게든 하려고 했죠.
레더 재킷, 슬리브리스 톱, 블랙 스커트, 블랙 힐 모두 프라다.
살아온 과정을 듣고 보니까 세진 씨가 ‘혹독했다’고 하면 정말 혹독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정말 그랬어요. 그래서 사실 편집실 가서 제 연기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굉장히 속상했어요. 저는 200을 쏟아부은 것 같은데 80밖에 안 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래도 감독님은 제가 컷 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놓치고, 그 인물을 표현하려는 걸 다 느끼셨던 것 같아요. 너의 그 태도가 참 좋다고 해주셨거든요. 그리고 개봉하고 보니까 관객들도 이 인물에 이입을 많이 해주셨고. 그래서 저는 지금도 그게 연기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마음. ‘이건 내가 정말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마음이다’ ‘그게 연기의 전부다’ ‘그게 관객으로 하여금 내가 그 인물로 믿게 하는 힘이다’ 그렇게 느꼈죠.
그런 마인드가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는 건 아닐까요? 근작인 〈하이클래스〉를 찍을 때도 졸도를 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스스로를 좀 몰아붙이는 편인 것 같기는 해요. 그때는 ‘엄마’라는 역할, 그 지점에 도달한다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것 같고요. 엄마라서, 모성애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한다는 건 알겠는데 아는 건 아는 거고 그 지점까지 가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황나윤은 그 감정을 진심으로 이끌어내지 못하면 정말 이상한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는 선택들을 하는 인물 같았고요. 그런데 감정을 체화하려고 하면 저는 또 무의식에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미성년〉 때도 제가 겁도 없이 달려들어서 인물을 파고들다가 정말 제 가슴이 칼로 난도질을 당하듯이 너무 아픈 순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무의식적인 방어가 생긴 거죠. 남편이 죽었고,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에게 다른 가정이 있었고, 그 여자가 죽인 것 같고, 제발 어떻게 된 건지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고… 그런 황나윤의 감정을 받아들이면 너무 힘들 테니까요. 한 번씩 촬영장에서 그 상황과 감정이 황나윤의 것이 아니라 박세진의 것이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너무 힘들고 뇌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 그 스트레스가 몸으로까지 표출된 거죠. (조)여정 언니랑 서로 뺨을 때리면서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장면을 찍던 날에.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작은 방안의 소녀〉의 희주도 쉬운 역할이 아니었잖아요. 학교폭력을 당하다가 히키코모리가 되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복수를 하게 되는 캐릭터였으니까.
맞아요. 사실 그래서 너무 힘들어요. 감정이 굉장히 다층적이고 내면이 층층이 쌓여서 그걸 하나씩 보여줘야 하는 역할을 많이 맡았던 것 같아요. 제가 그런 걸 하고 싶어 했고, 운 좋게 기회가 주어진 거긴 하지만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전력을 다하다 보니까 작품이 끝나면 저는 완전히, 그야말로 완전히 방전되는 거예요. 배우가 좋은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을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만약 다음 작품의 미팅을 하자고 하시는데 하필 그날 뭔가를 해서 내가 에너지가 전혀 없다. 그러면 그건 안타까운 일인 거죠.
스스로를 돌볼 필요는 느끼지만, 어쨌든 박세진이라는 배우는 아직 다른 방법은 모르는 거군요.
네. 저는 그래야만 하는 것 같아요.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저는 기계가 아니니까 어느 단계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 게 참 속상하고요. 그래도 저는 그게 근육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매번 단순히 소진되는 게 아니라 분명히 근육이 쌓여가고 있고, 어느 순간에는 저도 유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 거죠. 그렇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