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북극에 가닿기를 : 북해를 보고 온 4명의 이야기
북극에 대륙은 없다. 그래도 가닿고 싶어 수고로운 여정을 기꺼이 감내하며 북쪽 땅끝에서 북해를 만나고 온 사람들이 있다. 차디찬 땅끝에서 오로라를, 박명을, 황혼을 보고 온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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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로 뒤덮인 지류빙하 스비나펠스요쿨을 배경으로 석양이 깔리고 있다.
불과 얼음의 나라
우물쭈물하다가는 기회를 놓칠 것 같았다. 꿈을 꿈에서 끝내지 않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했다. 마침 런던에 살고 있었고 겨울 휴가도 받았겠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런던에서 아이슬란드까진 3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한국에서 출발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아이슬란드 여행길에 오른 배경이다. 무작정 캐리어에 짐을 싸고 공항으로 향했다. 12월의 아이슬란드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추웠다. 추운 건 기본이고 날씨가 시시각각 변했다. 고작 몇 분 간격으로 어두워졌다 맑아졌다 비가 내렸다 안개가 꼈다 난리였다. 매서운 추위를 견디지 못한 휴대폰은 자꾸 꺼졌고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니 손이 시렸지만 우산을 놓을 수 없었다. 4시면 어두워지는 짧은 해 때문에 가로등 하나 없는, 고작 몇 미터 앞만 겨우 보이는 길을 걷고 있으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낯선 기분을 즐긴다.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가 그려진 화폐를 사용하며, 가늠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루어진 대화를 듣고, 신선한 공간을 접하는 것 말이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수많은 폭포와 들판, 설산과 온천이 보였다. 얼음과 불의 나라로 불리는 아이슬란드는 대기엔 차가운 바람이 살을 베어낼 듯 휘몰아치지만, 땅은 물을 끓일 만큼 뜨겁다. 온천이 많다는 얘기다. 이가 덜덜 떨릴 만큼 추운 아이슬란드의 간헐천 게이시르에서 뜨거운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누구에게든 생경할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고, 게이시르는 5분마다 세차게 뜨거운 물줄기를 뿜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몇십 분을 셔터에 손을 얹고 기다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얼음으로 가득했던 다이아몬드 비치(Diamond Beach)다. 다이아몬드 비치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검은 모래 해변으로 떠밀려온 작은 빙하 조각들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보여서 그렇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뎠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빙하 조각이 바람과 파도에 부서지는 모습은 아름답고 쓸쓸했다. 멀리 떠다니는 빙하 역시 언젠가 해안으로 밀려와 작게 나눠져 이 검은 모래 아래로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공허하고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날씨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뒤흔드는 게 아이슬란드의 자연이 지닌 진정한 힘이다.
레이니스피아라 해변에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파도들이 몰아치는 걸 볼 땐 무서웠고 굴포스에서 들었던 폭포 소리는 고민을 씻어낼 만큼 시원했다. 북극에서 불어온 찬 바람이 피부에 닿고 두 다리가 굳건히 뜨거운 땅을 밟고 서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코끝이 찡했다. 코로나로 여행길이 막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을 회상할 때면 마음이 찌릿찌릿하다. 추위 속에서 오로라를 기다리며 목 아프도록 밤하늘을 올려다봤던 일, 해가 지고 나면 할 일이 없어 따뜻한 방에서 밤새 보드게임을 했던 소소한 기억들이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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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채민은 런던에서 3년간 스냅 사진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국내에서 웹 디자인을 하고 있다.

거대한 빙산을 앞에 두고 배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행복의 경관은 현실이 된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때문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이 돌연 그린란드로 떠나 경험했던 값진 순간들을 나도 맛보고 싶었다. 무언가 휘황찬란한 일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0시간을 날아 그린란드 대륙에 닿을 수 있었다. 일루리사트 공항에서 내가 마주친 겨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코털까지 얼게 만드는 추위 탓에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혹독한 그린란드 여행의 시작이었다.
빙산을 보기 위해 트레킹 루트를 걷다, 전날 쌓인 눈 탓에 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던 때였다. 누군가 남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목적지로 향했지만 그 발자국도 곧 희미해졌다. 되돌아갈 순 없으니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몸과 마음이 불안했다. 키만큼 깊은 눈 더미에 빠지기도 했다. 그땐 심장이 철렁했다. 간신히 기어 나와 숨을 고르기 위해 뒤를 돌아본 순간, 또 다른 여행객이 내가 밟아온 길을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어떤 생각으로 따라오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길 잃은 초보 여행자가 아닌가. 안 되겠다 싶어 그들에게 길을 양보했다. 당황스러운 해프닝에 웃다 마주한 그린란드의 빙산은 그 모든 고생과 살을 에는 추위를 잊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명확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왔다면 그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으리라. 이정표 하나 없는 땅에서 그 정상에 성공적으로 올랐다는 뿌듯함과 맑게 빛나는 빙하의 아름다움에 취해 살짝 눈물이 났다. 누군가는 북극해를 보면 우울해진다던데 나는 반대였다. 평화롭고 행복했다. 사실 빙하에 반사된 빛에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 그날의 기억은 무척 또렷하다.
비슷한 감정을 여행 중 한 번 더 느낀 적이 있다. 눈 쌓인 교회 앞에서 노을을 봤을 때였다. 교회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지만 눈을 헤치고 꽤 많이 걸어야 했다. 등에 땀이 한 줄기 흐를 때쯤 교회 앞에 도착했다. 교회는 눈만 없었다면 북극인지도 모를, 여느 여행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모습이었다. 이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걸 후회했다. 그러나 곧 해가 지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뒤를 돌아보니 하늘도 하얀 눈도 온통 핑크빛이었다. 살면서 노을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마음이 들떴다. 옆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린란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을 가진 곳이다. 영화 속 월터의 경험처럼 말이다. 어느 여행지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린란드는 특히 직접 찾기 전에는 그 진가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힘든 기억을 행복하게 바꿔놓는다는 것에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만 타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인생이 어딘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면, 그린란드에 찾아가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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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솔은 사진, 여행, 패션에 관심이 많은 쇼핑몰 운영자다.

추운 날씨에도 얼지 않는 테리베르카 앞바다에 파도가 치고 있다.
후유증이 남았다
여행의 시작은 오로라였다. 오로라 헌팅에 적합한 여행지 후보가 많았지만 쉬운 여행은 싫었다. 나에게 오로라 헌팅은 목적이 아닌 과정에 더 가까웠다. 비행기로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이나 편안하게 차로 운전해 갈 수 있는 곳은 내키지 않았다. 불편하더라도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자연 속에서 오로라를 발견하고 싶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그 문장에 홀린 듯 이끌려 기차 여행을 선택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도시를 벗어나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결심한 후엔 일사천리였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모스크바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무르만스크’행 야간 기차로 옮겨 탔다. 무려 33시간짜리 여정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옆 사람과 번역기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어부였다. 러시아와 한국의 서로 다른 술자리 예절에 대해 한참 이야기한 기억이 남는다. 덜컹거리는 기차가 아늑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도시락과 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며 캄캄한 타이가 숲을 가로지르는 일은 야간 기차가 아니면 못 했을 경험이었다. 최종 목적지인 테리베르카에 가기 위해서는 무르만스크에서 또다시 4시간 동안 택시를 타야 했다. 문제는 그 어떤 택시 기사도 나를 태워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 도로가 눈보라로 잠정 폐쇄되어 방법이 없었다. ‘아, 내가 정말 북극 가까이에 왔구나’라고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꼬박 이틀을 기다리고 나서야 간신히 테리베르카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틀 정도는 날씨의 변덕에 기꺼이 바쳐야 할 재물이었던 셈이다.
험난한 여정 끝에 도착한 테리베르카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 더 북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만 한다. 광활한 바다와 넘실거리는 파도가 마을을 더욱 앙상하게 깎아내는 듯했다. 기대했던 하얀 빙하와 푸른 바다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에는 검고 거친 야수가 보일 뿐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발견한 거대한 고요와 어둠. 세상 끝에 홀로 서 있었던 그 기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고유한 경험이 궁금한 사람에게만 테리베르카를 권한다. 어린 시절, 컴퓨터 게임을 하다 개발자가 아무것도 만들어놓지 않은 ‘무’의 공간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더 이상 앞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테리베르카의 바다는 그런 ‘무’의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세상에 대한 생각, 나에 대한 생각, 이곳에 오기까지 고생했던 여정들이 아련히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떠나갔다.
극지방 겨울에는 해가 무척 짧다. 뒤집어 말하면 밤하늘을 만끽하기 좋다는 이야기다. 보통의 여행객이라면 밤이 긴 겨울을 기피하겠으나 오로라가 있는 날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꽉 찬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북극해와 오로라. 그 두 가지를 본 것만으로도 비행기와 기차와 택시를 거쳐 겨우 도착한 지난한 여정 모두를 보상받고도 남았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면 그때의 여행이 떠오른다. 눈이 내릴 때마다 다시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지는 건 북극해가 내게 준 선물이자 후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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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은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극야의 낮은 새벽같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하다.
다섯 시간의 박명
2017년 겨울, 끝에 가까워지고 싶었고, 고르고 고른 내 세상의 끝은 스발바르제도였다. 쳇바퀴처럼 일과 집을 반복하는 삶에 자극이 필요했다. 극지방에서 보내는 겨울이라면 충분한 자극이 될 것 같았다. 베르겐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트롬쇠를 거쳐 스발바르제도에 발을 디뎠다. 78도에 위치한 지구 최북단 마을 롱이어뷔엔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에서 북극해를 돌아보는 크루즈가 출발한다. 대부분의 북극 여행은 북극점에 가까운 곳까지 가지 않는다. 북극해에 가까운 해안의 여러 국가 여러 마을에서 빙하를 보고 나면, 그것 역시 북극에 가닿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크루즈는 보통의 사람이 북극해 한가운데까지 가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공항 곳곳에 장식된 북극곰을 보니 진짜 북극곰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몸을 감쌌다. 공항을 나서자 한낮의 어둠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저 멀리 북극해도 보였다. 끝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람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어둠 때문에 바다는 더욱 차가워 보였다. 파고가 높지 않았는데도 우리나라에서 보았던 어느 바다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금세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아 무서웠다.
북극권에 위치한 롱이어뷔엔의 2월은 하루 종일 밤이었다. 3시면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가로등은 있었지만 숙소 밖을 나섰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차선책으로 스노모빌을 탔다. 방한복만 제대로 갖춰 입으면 차가운 바람을 뚫고 눈 덮인 산을 마음껏 돌 수 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스노모빌을 타고 길을 나섰는데 앞사람을 따라 한참 잘 달리다가 잠시 정신을 판 사이 대열을 놓치고 말았다. 잠깐이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혼자 달린다는 사실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 모든 충격과 공포의 순간들은 오로라의 경이를 본 순간 잊었다. 검은 물감을 쏟은 듯 짙은 어둠을 뚫고 초록빛의 오로라가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처럼 등장했다. 아…그 광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초록빛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와 일행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늘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극야의 하이라이트는 낮이다. 아침 10시가 되면 해가 지평선 아래에 걸치면서 은은하고 일정한 빛을 뿌린다. 태양과 대기가 일정한 각도를 이루며 태양 빛이 부드럽게 산란하는 상태, 박명(薄明), 영어로 트와일라잇(Twilight)이라 부르는 상태가 이어진다. 지평선 위로 그 온전한 모습을 아직 드러내지 않는 태양이 온 세상을 푸르스름하고 오묘한 빛으로 가득 채운다. 그 아름다운 하늘이 오후 3시까지 이어진다. 극지방에서도 2월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내내 아침을 기다렸다. 매일 하루 다섯 시간씩 매번 달라지는 아침 하늘을 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내 속 깊은 곳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지구의 끝에서 맞이한 2월의 여행은 꿈만 같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시내에서 2km나 떨어진 저렴한 숙소에 묵으면서 매 점심을 작은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24시간 중 19시간이 어두웠던 극야의 롱이어뷔엔을 돌아볼 때면 기분이 항상 설렜다.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스발바르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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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은 토목회사에서 11년째 근무 중인 직장인이다. 여행과 사진이 취미다.
Credit
- EDITOR 송채연
- PHOTO 홍채민/김한솔/김태준/김은영
- ART DESIGNER 주정화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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