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아트 타운은 6호선을 타고 오른다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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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아트 타운은 6호선을 타고 오른다

홍대, 합정, 상수, 망원을 지나 이제는 은평구에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이고 있다. 과연 은평은 새 시대의 아트 타운이 될 수 있을까?

박호준 BY 박호준 2022.12.04
발단은 연신내였다. 오랜 친구가 처음으로 마련한 전셋집이 은평구 대조동, 6호선 연신내역 인근에 위치했다. 요새 전세 구하기가 어디 쉬운가. 이사를 축하하기 위해 한 손에는 와인을, 한 팔에는 휴지 세트를 끼고 스마트폰 지도를 따라가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빌라촌 한가운데, 오래된 주택 건물 1층에 갤러리가 있었다. 통창 너머로 전시된 작품들이 보였다. 삼청동이나 한남동보다는 을지로나 상수동에 있을 법한 모양새. 갖출 건 다 갖췄지만, 문지방이 높지 않아 누구든 들어서기 어렵지 않은, 꽤 그럴듯한 갤러리가 있었다. 와인을 마시며 신나게 수다를 떨던 중  문득 생각이 나 친구에게 대체 왜 주택 1층에 갤러리가 있는지 물었다. 꽤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 갤러리, 주변에 은근 좀 있어. 문 연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긴 한데….” 호기심이 생겼다. ‘30cm 왕돈까스’나 ‘어울림마트’ 같은 간판이 즐비한 베드타운에 어떤 이유로 갤러리가 문을 열게 된 걸까? 갤러리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긴 한 걸까? 최근 들어 ‘은근 좀 있을’ 정도로 생기고 있다면 뭔가 이유는 있을 터였다.
 
6호선을 따라 올라온 아티스트들
갤러리의 이름은 ‘공간 루트’였다. 문 앞에 적힌 인스타그램 주소로 접속해보니 100여 장의 사진이 나왔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새로운 전시를 선보이고, 중간중간 북토크 같은 것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공개된 연락처라고는 인스타그램 주소가 전부였기에 다이렉트 메시지(DM)를 남겼다. 그러나 24시간이 지나도록 답신은커녕 읽었다는 확인조차 뜨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고 싶진 않았기에, 무작정 6호선을 타고 연신내로 향했다.
‘공간 루트’는 연신내역 4번 출구에서 5분가량 걸어가면 보인다. 통유리로 된 벽 너머 언뜻 보이는 그림들 사이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진행 중이던 전시 〈Eternal Space〉의 이원석 작가였다. 작가는 예고 없이 등장한 내 존재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다시 차분함을 찾고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흥미가 동할수록 마음 한편에선 다른 궁금증이 커져갔다. 이쯤 되면 아마 당신도 궁금할 것이다. 대조동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왜 전시가 열리고 있을까?
공간 루트의 김경동 대표는 ‘관장님’이라는 호칭을 두 손을 휘저으며 사양할 정도로 어색해했다. “사실 저는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대기업의 부동산 계열사에 다닌다. “원래는 그 공간을 임대로 주려고 했거든요. 동네가 동네다 보니, 생활 밀착한 가게를 내겠다는 연락이 많이 왔어요. 그런데 제가 공간 루트 위층에 있는 주택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에요. 이미 동네에 그런 가게가 많은데, 여기에 또 그런 가게를 만들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빈 공간을 활용해 지역에 도움이 될 만한 장소를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고, 문화 콘텐츠가 부족한 동네라는 생각에 빈 공간에 갤러리를 열기로 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상업 갤러리의 룰 같은 걸 전혀 몰랐으니, 실제 운영이 가능할지 반신반의했어요. 작가들이 계속 들어올지도 확신할 수 없었죠.” 그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이가 인근 ‘니은서점’의 노명우 북텐더였다. “문화예술 콘텐츠로 이 지역을 바꿔보자고 의기투합했죠. 그분은 본업이 사회학 교수인데, 저처럼 동네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동네에 독립 서점을 내신 거거든요.” 니은서점이 공간 루트에 작가들을 소개하고, 좁은 니은서점 대신 공간 루트에서 북토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은평 메디치들의 협업이 작은 규모로 시작됐다. 올해 초의 일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최근 들어 이 지역에 거주하거나 작업실을 연 아티스트들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지난번 그룹 전시를 한 번 했는데, 작가님들이 다 이 근처에 사신다는 거예요. 전시 작가들과 친한 다른 작가들이 전시를 보러 왔다가 은평구로 이사 오려고 알아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그렇다. 작가가 없는데 갤러리만 덩그러니 생길 리는 없다.
불광역 인근의 갤러리 ‘아트 스페이스 신사옥’ 역시 먹자골목 한가운데, 뜬금없는 장소에 위치해 있다. 김경동 대표가 젊은 예술인들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준 건물주라면, 아트 스페이스 신사옥의 옥정호·이지영 대표는 직접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다. 어째서 은평구까지 와서, 그것도 먹자골목 한가운데 갤러리를 차렸느냐는 질문에 옥정호 대표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죠.” 두 사람은 부부로, 원래 마포구 연남동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을 해왔으나 지대가 높아지자 상대적으로 낮은 이 동네로 올해 초에 넘어왔다.
“둘 다 작가다 보니까,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부터 했어요. 와서 보니까, 주변에 시각예술 하는 작가분들이 많더라고요.” 앞서 아트 스페이스 신사옥에서는 〈은평 대소동〉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은평구에 거주하는 작가들을 모아 은평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전시를 진행했던 것이다. “전시를 열고 난 다음에, 다른 작가들한테 연락이 많이 왔어요. ‘나도 은평 사는데 왜 초대 안 해줬냐’면서.” 대부분은 그들이 떠나온 연남동 외에도 상수, 망원에서 ‘떠밀려’ 온 젊은 아티스트들이었다.
조각을 하는 안민환 작가는 아티스트들은 집값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연히 누구나 예민하겠지만, 작가들은 거주할 공간뿐 아니라 작업실도 필요하니까요.” 안민환 작가는 올해 초 은평구에 작업실을 구했다. “본가는 마포구였는데, 왠지 마포구에는 작업실을 구해도 오래 있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세를 올릴 테니까요.”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서울에 구하고는 싶은데, 아예 집이랑 작업실을 다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나마 지대가 낮은 은평구를 택한 거죠.” 그의 말처럼, 거주 공간 외의 작업실이 필요한 아티스트들에게 집값은 중요한 요인일 수밖에 없다.
아티스트들이 6호선 라인을 따라 서울의 서북부로 올라오는 현상은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인디 뮤지션과 시각예술가들이 모이는 아지트들의 집산지 홍익대학교 인근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은  2호선과 상수역과 망원을 지나는 6호선이 대표적이다. 지난 10년 사이 문래에 인디 밴드들의 공연장이 성행하고 갤러리가 생기고 크래프트 맥주 펍이 성행한 것은 홍대입구역을 지나는 2호선을 따라 아트 타운이 자랐기 때문이다. 당시 2호선을 따라 갤러리와 공연장이 이주할 때 흥미로웠던 사실은 당산과 영등포구청역은 건너뛰었다는 점이다. “은평 역시 문래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망원을 지난 6호선 인근에는 아파트와 재개발구역뿐이니, 마포구청역과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역 등은 건너뛰고 연신내와 불광 쪽에 둥지를 찾은 거죠. 제대로 살펴보려면 지대 분석을 해봐야겠지만요.” 한 부동산 전문가의 말이다. 예측됐던 이주는 이제 현실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는 조은비 작가는 지난 5월 은평으로 이사 와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다. “처음에 알아본 곳은 합정이었는데 점점 상수, 망원 쪽으로 올라가게 됐죠. 결국은 6호선 따라 여기까지 올라오게 됐네요.”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다.
은평구 출신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다 비교적 최근에야 은평구에 작업실을 구한 판화 작가 정원 역시 6호선을 따라 올라온 아티스트들이 늘어난 게 실감이 난다고 했다. “원래는 한두 명 정도밖에 없었거든요. 요즘에는 물어보는 사람도 많아요. 합정, 상수, 망원의 집값이 너무 올라서죠.” 그는 늘어난 아티스트만큼 지역 자체에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것보다도 전시 공간이 하나둘 생기는 게 신기해요. 작가들이 모이니까 그런 거겠죠?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연을 할 수 있는 펍이나 카페도 지난 1~2년 사이 엄청나게 늘었어요.” 우리는 도시가 생명체처럼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의 말대로 대조동 인근에는 최근 작가들이 사랑방처럼 모여드는 카페 ‘다용도실’과 바 ‘엔젤리즘’ 등이 문을 열었다.
시각예술을 하는 아티스트만 은평에 모이는 건 아니다. 방송 기획 작가로 일하고 있는 김예지 씨는 올해 초 은평구로 이사 온 뒤 〈고등 래퍼〉나 〈쇼미 더 머니〉 등 힙합 경연 프로그램에 도전자로 출연했던 래퍼들을 동네에서 자주 목격했다고 말했다. “집값은 말할 것도 없고, 교통편도 좋잖아요. 여기서 지하철 타면 한 번에 DMC까지 가니까요. 방송국에 자주 가야 하는 입장에선 최고죠.” 앞서 다른 아티스트들도 접근성을 이 지역의 장점으로 꼽았다. 지도상으로는 서울의 서북쪽 끝이지만, 지하철을 타면 상수동이나 인사동 쪽으로 나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최대 장점 중 하나다.
집값과 접근성 외에도 은평구를 택하는 요인이 있을까? 조은비 작가는 단연 집값이 가장 중요했지만, 자리를 잡고 보니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좋은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은평문화재단에서 예술가들에게 지원을 꽤 잘 해줘요. 금전적인 것보다는 다른 작가들하고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을 펼쳐주신다고 할까요.” 안민환 작가 역시 은평문화재단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재정적인 부분보다는 접근성이나 친밀도가 높다고 할까요. 프로그램 등도 굉장히 잘 되어 있고요.” 이들은 작품 활동 외에도 은평문화재단을 통한 교류 덕분에 생계와 관련이 있는 지원금이나 플리마켓 오픈 등의 정보도 공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 아트 시티 은평?
조은비 작가와 안민환 작가뿐만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은평문화재단’을 언급했다. 문득 지난해 방송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명장면이 생각났다. “연신내에 계시잖아요?” 댄서 아이키가 리헤이를 향해 했던 말이다. 이후 아이키는 은평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인정받아 은평구 홍보대사로 위촉됐고, 김미경 구청장과 함께 구청 대회의실에서 ‘Hey Mama’를 추기도 했다. 위촉은 은평구청 측에서 먼저 제안해 이뤄졌다고 한다. 김 구청장은 “일상 회복을 앞둔 시점에서 아이키가 가진 경쾌하고 발랄한 이미지가 은평구민에게 행복한 에너지를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 은평구에서 열린 각종 문화 행사에는 아이키가 참석했다는 목격담이 쏟아진다.
은평구의 출연금으로 조성된 은평문화재단이 아티스트들 사이에 계속 언급됐다는 건, 지자체가 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노력했다는 의미다. 혹시 젊은 아티스트들을 유치해 ‘영 아트 시티’라는 타이틀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니냐는 질문에 은평문화재단의 권정원 매니저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건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지역만의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재단의 실무자들이 아티스트들이 모이고 있다는 걸 재빠르게 캐치했고, 그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원래 서울문화재단에서 기획을 했던 권정원 매니저는 지난 3월 은평문화재단에 합류했다. 아티스트들이 막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 그리고 공간 루트와 아트스페이스 신사옥 등 문화 공간들이 은평구에 문을 열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아티스트들이 모이고 있는 게 보이는데, 발화점이 부족했어요. 사실 누가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수많은 아티스트가 있다고 한들 그들 사이에 교류가 생기거나 활동 공유가 일어나지 않잖아요.” 그 말대로 은평문화재단은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 결과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에 다른 작가들이나 일반 시민들을 초대하는 행사인 ‘릴레이 오픈 스튜디오’와 오래된 캐비닛에 은평에 대한 예술가의 시선을 담은 ‘캐비닛 프로젝트’ 등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진행하는 이벤트가 이어지고 있다는 게 권정원 매니저의 설명이다.
다만 은평문화재단이 판을 깔아줄 수밖에 없는 건,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이기는 했으나 자생적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들이 모인 이유가 ‘작품 활동’ 때문이 아니라 ‘집값’ 때문이기에, 몸만 옮겨온 아티스트들을 위한 교류의 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대나 상수, 망원동에는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이 모이는 거점이 되는 공간이 있는데, 이 지역은 그런 건 없죠.” 기획자이자 일러스트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마을지도 만들기’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온 박예솔 작가의 말이다. “홍대를 예로 들면, ‘호미화방’에 가면 인근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쉽게 만날 수 있거든요. 방문하는 것만으로 필드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건너 건너 알게 되기도 하고요.” 즉 기존의 아트 타운에는 예술가들의 생태계가 형성돼 있었는데, 은평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에서 영원히 작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잘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연히 언젠가 떠날 수도 있다는 느낌?” ‘지킬’이라는 예명으로 사운드 메이킹을 하며, 지난해부터 은평에 자리를 잡은 이지훈 씨도 공감했다. “조그만 대안 공간이 골목골목 생기고 있는 추세지만, 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 부족한 건 아쉬운 부분이죠.”
자생적인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대신 구에서 깔아준 멍석 위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정원 매니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말했다. “은평문화재단이 지역 아티스트들을 모아 네트워킹을 시작한 게 불과 올해 초였고, 애초에 조직 자체가 설립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관이 주도했다기보단 세 가지 요소가 너무나 적절한 시기에 잘 맞아떨어져 이 지역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봐요.” 권정원 매니저가 말한 세 가지 요소는 안락한 주거와 창작 활동을 찾아 모여든 예술가들과 그들이 지역에 자리 잡고 활동할 수 있도록 기민하게 반응한 은평문화재단, 그리고 여기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다. “이전의 예술 생태계가 일반 시민들에게는 괴리된 상태로 성장한 것과 달리, 이곳 지역 주민들은 아티스트들이 늘어난 것을 굉장히 반가워하고 관심도 많아요. 공간 루트나 니은서점 같은 공간도 그런 취지에서 예술가가 아닌 분들을 통해 생겨났잖아요. 아직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오히려 곳곳에서 재미있는 예술 공간이 점조직 형태로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주시면 좋겠어요.”
실제 작가들 역시 권정원 매니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은평문화재단은 다른 곳에 비해 규모도 작고, 이제 막 시작하는 느낌이 있죠. 솔직하게 말하면 영향력이 그렇게 크진 않아요.” 정원 작가의 말이다. “전시 공간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 손에 꼽힐 정도니까요. 은평에 거주하더라도, 작품 활동은 다른 지역에서 하는 분들이 훨씬 많기도 하고요.” 문제는 공간이다. 은평구에 자리를 잡은 아티스트는 늘어나고, 관에서 이들의 작품 활동과 네트워킹을 지원하고 있으나 아파트와 빌라로 가득 찬 오랜 베드타운에 자생적 클러스터가 생기려면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할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네트워킹은 친분이 있는 아티스트끼리, 각자의 작업실에서 작은 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다. 프랑스 문화 격변의 중심에 살롱이 있듯, 서울 문화의 격변기엔 펍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홍대 신의 인디 창궐을 이끌었던 ‘스팽글’과 ‘드럭’, 2000년대 이후 인디 뮤지션들의 아지트 역할을 해온 ‘곱창전골’ ‘스트레인지 프룻’ 등에서 음악만 흘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아티스트가 그곳을 들락거리며 교류했고, 그 교류 자체가 토양이 됐다. 은평 아트 시티는 어쩌면 지금 열심히 밭을 갈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젠트리피케이션
은평을 아트 타운으로 조망하는 기사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에 정작 아티스트들의 반응은 갈렸다. 더 많은 사람에게 나의 작품이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 뒤엔 또다시 옮겨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6호선을 따라 올라온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니까요.” 조은비 작가의 말이다. “가장 저렴한 공간을 찾아 작업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힙 플레이스’가 되어 있곤 했어요.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월세가 올라가죠. 아티스트들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모습을 몇 번 봤죠.” 그는 그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더하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할 수 있도록 해줘야 그 지역이 계속 예술가들의 거주지로 살아남아 유지가 될 텐데, 조금만 떠버리면 상권이 순식간에 밀고 들어오거든요. 결국 예술가도 떠나고, 상권도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서로 고무적일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언젠가는 더 올라가야 할지도 몰라요.” 안민환 작가가 말했다. 6호선은 독바위역에서 빙글 돌아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서울에서는 더 올라갈 공간이 없는 것이다.
이지훈 씨 역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은평구는 재개발이 계속됐기 때문에 과열될 가능성이 높죠. 예술가들이 모이는 것과는 별개로요.” 은평구 토박이였던 정원 작가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이미 은평구는 제가 어렸을 때의 모습에서 정말 많이 변했어요. 아티스트들이 모여들어 생겨난 카페나 바, 갤러리 같은 공간도 있지만 GTX 개통 등의 이슈 때문에 상권이 형성된 부분도 있거든요.” 정원 작가는 한 가지 희망 사항을 덧붙였다. “그런 상권의 발달이 지금 늘어난 아티스트들과 시너지를 내서 문화 형성에 일조한다면 가장 최선의 길이 아닐까 싶어요.”
아트 타운이 형성되기도 전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니 진짜 문제는 어쩌면 속도일지 모른다. 은평이 어엿한 아트 타운을 먼저 형성할 것인가, 아니면 철로와 콘크리트의 밀물이 토양이 싹트기도 전에 이 지역을 집어삼킬 것인가?
 
다용도실은 카페이고 갤러리이고 공연장이고 서점이고 옷가게이다.

다용도실은 카페이고 갤러리이고 공연장이고 서점이고 옷가게이다.

1. 다용도실
문화복합공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지난 4년간 다용도실은 ‘이웃사촌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음악 공연, 사진전, 플리마켓, 연극, 시 낭독 모임, 북토크, 드로잉 워크숍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펼쳐왔다. 예를 들면 은평 주민들이 찍은 은평의 사진을 모아 카페에 전시하는 식이다. 여러 활동 중 다용도실이 가장 힘을 쏟고 있는 분야는 음악 공연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무대에 오르는 싱어송라이터부터 건반과 현악기가 어우러지는 재즈, 피아니스트와 성악가가 합을 맞추는 가곡 공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테이블이 3~4개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코로나가 터지기 전엔 최대 30명까지 입장해 공연을 즐겼다. 꾸준히 무대를 꾸민 덕에 운영 초기 아티스트를 섭외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던 것과 달리 요샌 아티스트가 먼저 공연을 하고 싶다고 연락해 오는 경우가 더 많다. “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처음 왔는데도 마음이 편해진다고요.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바리스타이자 다용도실의 모든 이벤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박이레 대표의 말이다. 핸드 드립 커피도 맛있지만 제철에만 판매하는 참외우유가 다용도실의 베스트셀러다.
ADD 은평구 연서로20길 17 1층 INSTAGRAM @da_yongdosil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편하게 들락날락하는 게 루트의 매력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편하게 들락날락하는 게 루트의 매력이다.

2. 공간 루트
루트의 간판은 소나무다. 이 갤러리 지붕에 근사한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어서다. 단독주택 1층 차고를 리모델링해 갤러리로 사용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루트를 운영하는 김경동 관장은 미술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팔리는 작품 위주로 전시를 기획하는 기존 상업 갤러리와 다른 길을 걷고 싶다”는 또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재미난 건 루트를 찾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이게 뭐여?”라며 들어서는 동네 할아버지부터 선생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는 유치원생까지 각양각색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기존 갤러리에선 경험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질문 덕에 새로운 영감을 얻는 기회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후 총 9회의 전시를 여는 동안 루트가 추구했던 것은 ‘다양성’이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전시와 비교적 친숙한 전시를 번갈아 개최하는 식으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해왔다. 일단 전시가 확정되면 그 후부턴 작품을 고르고 배치하는 것을 전적으로 작가에게 일임하는 것도 루트가 추구하는 방침 중 하나다. 작품 전시 외에 근처 독립 서점과 연계한 북토크나 음악 공연도 진행할 예정이다.
ADD 은평구 연서로26길 19 INSTAGRAM @route_ysn

 
엔젤리즘은 미술과 음악이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험하는 곳이다.

엔젤리즘은 미술과 음악이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험하는 곳이다.

3. 엔젤리즘
어둑한 시간 불광천을 걷다 보면 형형색색으로 빛이 번쩍이는 곳이 하나 있다. 자동차 공업사 위층에 위치한 뮤직바 엔젤리즘이다. ‘노는 게 약이다’를 모토로 운영하는 이곳은 은평에 거주하는 아티스트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아지트 중 하나다. 엔젤리즘이라는 이름은 바가 생기기 전 해당 건물을 사용하던 사설응급구조대가 붙여놓은 천사 스티커에서 비롯됐다. 정기적으로 DJ 파티나 밴드 공연, 재즈 연주회를 여는 것은 물론 실험적인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하는데 ‘단전 콘서트’가 그 예다. 지난 6월, 제 50회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하루 종일 전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공연과 바를 운영한 것. 은평에 뿌리를 둔 친환경 디자인 그룹 ‘WYL’과 협업으로 진행한 콘서트에서 가수는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렀고 손님들은 미지근한 맥주를 마셨다. 조금은 낯설고 더러는 엉뚱해 보이는 행보 덕에 엔젤리즘은 코로나가 터진 후 문을 열었음에도 비교적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그냥 즐기자!’라는 아티스트들의 의견에 따라 대부분 공연은 입장료를 받는 대신 자유 모금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ADD 은평구 증산로 265 2층 INSTAGRAM @angelism.bar
 
기슭이 추구하는 바이브는 편안함이다. 그래서인지 혼술족이 많다.

기슭이 추구하는 바이브는 편안함이다. 그래서인지 혼술족이 많다.

4.기슭
기슭의 묘미는 낯섦에 있다. 기슭에 가려면 강남에서 30년 전쯤 자취를 감추었을 것 같은 오래된 철물점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을 지나야만 한다. 슬러시 기계와 동전 오락기를 세워둔 문구점도 보인다. 대표이자 바텐더인 이동환은 이런 ‘은평 바이브’를 기슭의 매력 포인트로 꼽는다. “어렸을 때 자주 먹던 슬러시가 연신내에 아직도 있는 걸 보고 슬러시 네그로니라는 칵테일을 만들어봤어요. 스푼으로 떠먹는 재미가 있죠.” 근처 전통시장에서 구매한 뻥튀기와 추억의 불량식품을 칵테일과 함께 내어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슭이 인스타그램 핫플레이스라면, 같은 지붕을 공유하고 있는 백반집은 연신내 아버지들의 사랑방이다. 벽 하나를 두고 클래식 칵테일을 즐기는 사람들과 막걸리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퍽 독특하다. “다른 지역과 달리 기슭엔 가족 단위로 찾는 손님이 꽤 있어요. 부모님과 함께 칵테일을 즐기는 모습은 바텐더인 저에게도 생경했죠.” 기슭은 북한산에 오르려고 은평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산 위에서도 마실 수 있는 논알코올 하이킹 칵테일 세트를 준비 중이다. 핫도그나 육개장 사발면을 이용한 먹거리도 준비되어 꼭 술에 취하고 싶은 날이 아니더라도 부담 없이 들르기 좋다.  
ADD 은평구 연서로38길 4-2 1층 INSTAGRAM @kissk_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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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김현유/박호준
    ILLUSTRATOR 양승희
    PHOTOGRAPHER 조해진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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