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러 ‘생년 빈티지’(이하 생빈)를 골라 모은 것은 아니다. 한때 와인만 1500병쯤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술 모으는 걸 좋아하다 보니, 그중에 생빈도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지인을 통해 구매한 샤토 료나 역시 한 번에 4병 정도를 구매했다. 20년, 30년도 아니고 50년이 넘은 올드 빈티지 레드 와인은 조우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낚아채야 한다. 심지어 보틀 사이즈도 장기 숙성에 유리한 매그넘이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한 모금 머금었을 때 느꼈던 건 ‘어? 힘이 있네?’였다. 타닌감이 느껴졌다는 소리다. 1970년대 와인뿐만 아니라 1940년대 와인도 마셔봤지만, 오래 숙성된 와인의 경우 최적의 시기를 지난 와인은 맛과 향이 희미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술은 그렇지 않았다. 개인적으론 보이차와 페어링해 마시는 걸 즐긴다. 차와 와인의 궁합이 의외로 뛰어나다. -김윤철(몽다원 대표)
(2) 1974 Cadenhead’s Cognac
뒤늦게 생빈의 세계에 눈을 떴다. 태어난 해의 술이 대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앞자리가 3에서 4로 바뀌자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괜히 삶을 뒤돌아보게 되고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함께 나이를 먹어갈 생빈 하나쯤은 갖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가고 있을 때, 이 술을 만났다. 구매 전 짧은 테이스팅을 할 기회가 있었다. 농축된 살구 향과 사과 향이 올라오다가 희미한 초콜릿 향으로 이어졌는데 오래된 코냑에서 느낄 수 있는 ‘랑시오(Rancio)’와 어우러져 묘했다. 랑시오가 어떤 맛과 향을 설명하기 위해 ‘쿰쿰한’ ‘너티한’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어떤 단어도 랑시오를 완벽하게 묘사하긴 어렵다. 그저 마셔봐야 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유성운(락희앤컴퍼니 총괄이사)
(3) 1986 Château Chalon
20대 초반, 소믈리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기 어려운 내겐 조금 더 험난한 일이었다. 그때 함께 와인을 공부하고 시음했던 친구를 위해 생빈으로 이 술을 구매했다. 노란 와인이라는 뜻의 ‘뱅존’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술은 프랑스 알프스산맥에 위치한 ‘쥐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생산한 것이다. 뱅존은 화이트 와인의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보통의 화이트 와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숙성시키기 때문에 10년 이상 숙성을 해야 맛이 올라온다. 특히 1986년산은 호두와 허브, 휘발유 향이 인상적이다. 언젠가 마시게 된다면 같은 쥐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콩테(Comte)라는 치즈를 곁들이고 싶다. 잘 숙성된 뱅존과 치즈에 우리의 우정도 잘 숙성되길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말이다. -양윤주(소믈리에)

프랑스 리브잘트(Rivesaltes) 지역에서 만들어진 샤토 롬보는 세계 3대 주정 강화 와인인 포트 와인, 셰리, 마데이라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탓에 저평가 됐기 때문이다. 더 쉽게 말하면, 가격 대비 퀄리티가 우수하다. 와인과 달리 주정 강화 와인은 위스키처럼 병입하는 순간 숙성이 끝난다. 구입한 후 오래 묵혀둔다고 맛이 더 좋아지진 않는다는 이야기다. 50년 정도를 최대 수명으로 보는 레드 와인과 달리 롬보는 100년까지도 거뜬하다. 그런 면에서 생빈과 잘 맞아떨어진다. 서른다섯 살이 아직 사회에서 한창 일할 활동적인 시기인 것처럼, 1987년산 롬보 역시 여전히 힘이 충만하다. 완숙한 롬보를 즐기고 싶다면 1960~1970년대 빈티지를 찾는 편이 좋다. 국내에 물량이 꽤 들어와 있고 와인에 비하면 가격도 훨씬 저렴한 편이라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손에 넣을 수 있다. -조현철(소믈리에)
(5) 1993 Dom Pérignon Rose
와인이나 위스키와 달리 샴페인의 왕은 누가 뭐래도 돔페리뇽이 아닐까? 생빈을 한번 모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돔페리뇽을 찾아 나선 것도 그래서다. 올드 돔페리뇽을 두고 흔히 ‘브리오슈가 강하다’ ‘너티하다’ ‘캐러멜과 호박 향이 올라온다’는 표현을 한다. 전부 맞는 말이지만, 나는 ‘묵은지’에 비유하는 걸 더 선호한다. 어린 돔페리뇽이 갓 담근 김치라면, 1993 돔페리뇽은 잘 숙성된 묵은 김치다. 잘 익은 맛을 내기 위해 온도와 습도, 기울기를 신경 쓰는 건 물론이고 일정한 주기로 병을 돌려주고 있다. 이 술은 도쿄 여행 중 어느 전당포에서 우연히 구했다. 일반 돔페리뇽도 구하기 어렵지만, 로제는 더욱 귀하다. 행여 상하진 않을까 한국까지 가지고 오는 데 신경을 온통 곤두세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돔페리뇽 황금 라인으로 불리는 1988 빈티지를 구하는 게 꿈이다. -정지눈(와인바 투겟허 대표)
(6) 1993 Glendronach Master Vintage
‘찍턴’이라는 말이 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쓰는 말인데 제주도 면세점에 술만 사러 갔다 오는 걸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의 ‘찍턴’ 후기를 볼 땐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이 술이 제주 면세점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오후 반차를 신청하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던 건 단지 생빈이라서가 아니다. 새롭게 글렌드로낙의 마스터 블렌더가 된 레이철 베리가 선보인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전 마스터 블렌더였던 빌리 워커의 싱글 캐스크와 비교하면 맛과 향이 거칠고 여운이 덜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마시려는 게 아니라 수집 목적으로 샀다. 요즘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건, 글렌드로낙 싱글 캐스크다. 마스터 빈티지와 달리 증류 날짜와 병입 날짜가 적혀 있는데, 생일인 1993년 8월 10일에 증류된 제품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건 ‘찍턴’을 할 의향이 있다. -신준열(공무원)
(7) 2000 Christian Drouin
스물두 살이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초년생이거나 학생이지만, 술은 다르다. 밀레니엄을 여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2000년 빈티지는 주종을 막론하고 인기가 높다. 또래 친구들에게 ‘생빈을 모은다’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바텐더로 일하는 덕에 비교적 일찍 생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생일 선물로 받은 이 술은 평소 칼바도스를 좋아하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취향 저격’이다. 2000년 빈티지는 아직 마셔보지 못했고 1999년산을 마셨을 때 굉장히 달콤하면서 화사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칼바도스와 달리 이 술은 칼바도스 캐스크에서 16년 숙성 후 토카이 캐스크에서 추가로 4년을 숙성했다. 참고로 토카이는 귀부 와인의 원조인 헝가리 동북 지역을 가리킨다. 토카이 캐스크가 칼바도스와 만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조화를 만들어낼지 사뭇 궁금하다. -이선우(코블러연희 바텐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