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는 것이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되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버버리는 단연 런던 패션위크의 하이라이트였다. 지금 입고 싶은 옷이되 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선함. 그런 밸런스가 버버리 캣워크를 차분하게 지배했다. 다니엘 리가 조율한 아름다운 색감, 다채로운 패턴, 질 좋은 소재, 20세기 초 버버리 텐트를 모사한 쇼장, 브랜드의 압도적인 네임 밸류까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단 몇 분간의 쇼임에도 많은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새로웠지만 여전히 타탄체크와 잉글리시 로즈 같은 버버리의 유산이 적절하게 녹아 있었고, 화려한 프린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에도 룩 자체는 여전히 품위가 있었다. 다니엘 리가 왜 스타 디자이너인지를 되새기게 해준 런웨이.
JW 앤더슨은 이번 시즌의 힌트를 자신에게서 찾았다. 지난 15년의 각 컬렉션 요소를 가지고 오되 그것을 너저분하게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니멀하게 압축했다. 여기에 발레와 게이 나이트라이프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탐구한 안무가 마이클 클라크(Michael Clarke)와의 협업으로 새로운 느낌을 더했다. 페니스 일러스트를 티셔츠에 프린트하는가 하면 아예 마이클 클라크의 이름을 옷에 새기기도 했다.
“우리 안에는 괴물이 살고 있습니다.” 마블의 〈변호사 쉬헐크〉에서 착안한 쇼가 끝난 후 디자이너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다. 이 런웨이는 헐크로 변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찢기고 너덜해진 옷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만화적인 이미지와 과하게 부풀려진 실루엣, 인체의 근육을 모사한 형태의 옷이 다수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드워드 크러칠리의 런웨이가 있던 날 본 트윗이 기억난다. 가죽 코드피스(15~16세기의 남자 바지 앞의 샅주머니)를 찬 모델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인생이 나한테 장난을 씨게 걸어오는 거 같다.” 이 런웨이가 낯설게 보인 이유는 코드피스처럼 전근대 요소와 근대를 대표하는 테일러링, 요즘 패션의 큰 축인 스트리트웨어를 뒤섞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난치고는 좀 진지한 런웨이였다.
피코트에 실크 모자와 실크 스카프를 매치하고 등장한 배우 이언 매켈런은 이번 런웨이에 가득했던 고전미와 낭만에 대한 복선이었다. 피셔맨 스웨터, 데크 슈즈, 세일러 해트 등이 다수 등장했지만 거친 면모 대신 부드럽고 매끈한 정서로 바다 남자를 조형했다. 이를 위해 실크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올이 풀린 스웨터를 모델의 맨몸에 입혀 건강하고 농염한 분위기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