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삽입 시대의 김희천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김희천은 오랜 시간 ‘가상’을 탐구한 작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가상은 없고 기술이 삽입된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해온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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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엔 건축을 전공한 김희천 작가가 선정됐다. 에르메스 재단은 2000만원의 우승 상금과 함께 신작을 위한 전시 제작비를 별도로 지원한다.
작가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벨’을 볼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재밌는 경험을 했어요. ‘바벨’(2015)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와 텍스트를 찾으며 그 작품이 어떨지 상상해본 거죠.
‘바벨’은 제 첫 작품이에요. 뭔가를 만들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잘 몰랐던 때죠. 아마 그래서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작업으로 펼쳐진 것 같아요. ‘바벨’을 내기 직전 해 여름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당시 아버지께서 남기신 GPS 정보, 구글 지도 위에 정확하게 레이어링되는 흔적들을 보곤 했어요. 제가 학부에서 미술이 아닌 건축을 전공했다 보니 건물이나 장소를 캐드로 구체화한 도면을 자주 봤고, 도시 역시 항공사진으로 보는 데 익숙했거든요. 아버지의 흔적들을 제게 익숙한 방식으로 엮어가면서 우리가 경험한 도시라는 게 뭘까, 라는 질문을 던진 거죠.
아버지의 흔적으로 세운 도시를 먼 곳에 사는 연인에게 스페인어로 전하는 형식이라는 점이 또 특별했죠.
당시에 사귀던 친구가 아르헨티나에서 살았어요. 그 친구는 (아버지를 잃은) 제 마음을 살피고, 저 역시 그 친구에게 제 마음을 설명했죠. 그런데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작업에서 제가 모국어로 독백을 하면, 아버지의 얘기다 보니 지나치게 감상적인 접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적당한 거리감을 두면서도 진솔하게 얘기하는 방식을 생각했죠. 그래서 스페인어로 그 친구에게 전하는 형식의 내레이션을 하게 됐어요. 대화 정도는 가능하지만, 깊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언어는 아니라서 적당한 거리감이 생기겠다고 생각한 거죠.
‘바벨’에서 감상적이지 않게 거리를 조절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택했다는 얘기에서 ‘탱크’의 거울상을 떠올렸어요. 몰입적인 영상 사이에 그 일그러진 거울상이 등장해 화자의 거리감을 일깨워주는 느낌이었죠.
그렇게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그 상을 쓴 건 다른 질문에서 시작됐어요. 멕시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가 사진을 찍으면 좀 핼쑥하게 나오더라고요. 그 친구가 저를 찍어준 사진을 봐도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아주 살짝 보정을 해주는 성형 앱을 쓰고 있었더라고요. 이건 엄마한테 보여줘도 내 사진이 맞기는 하지만,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이 이상하기도 하고 또 신기했죠. 해당 앱의 작동 원리는 카메라에 찍힌 사람들의 얼굴 형태를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얼마나 줄이거나 늘리면 내가 아니라고 느껴질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탱크’에서는 결국 시뮬레이션에 대한 얘기를 던지는데, 그 거울상은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어요.
좋은 질문이네요.
‘우리는 누구인가, 진짜 나란 무엇인가’라는 건 사실 (그 역사가) 길고 오랜 질문이잖아요. 모두가 품고 있는. 그래서 그런 질문을 디지털,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환경에서 던져봤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NHK의 <아사이치>라는 아침 방송에서 한국의 증명사진에 대해 다룬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일본은 증명사진을 관공서에서 찍어 포토샵을 할 기회 자체가 없는데, 한국은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일본인 디렉터가 한국에서 증명사진을 찍어보는 내용이었어요. 적당히 수정된 사진을 보고 ‘현실의 나마저 이렇게 예뻐진 것 같다’라고 말했죠. 내 모습의 연장선에 있는 최상의 모습이라는 얘기겠죠?
어유, 아주 멋진 말이네요. 저는 거울상을 다루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거울을 항상 바라보죠. 셀카를 찍을 때도 거울 보듯이 찍고요. 그런데 그렇게 사진을 찍어놓고 좌우 반전을 하면 굉장히 어색해 보이거든요. 뭔가 좀 더 못생겨 보이고 낯설게 느껴지지요. 그게 실제 자신의 모습인데도 말이죠. 그런 것처럼 보정된 사진을 계속 보면 오히려 보정된 모습이 자신이라고 느끼고 반대로 실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술을 잘 활용하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최근에는 챗GPT라든지 이미지 제너레이터 등의 툴이 나오고 있어서 여러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툴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겠죠?
저는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너무 과도하게 열광하면 저는 그게 위험신호처럼 느껴지거든요. 과대평가하거나 과대 해석하기 좋은 상황 같아요. 예를 들면, NFT 기억하시죠? 사람들이 NFT에 얼마나 열광했어요. VR도 그랬죠. 마치 신세계가 열린 것처럼 특히 미술계에서 그랬어요. 마치 모든 걸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매체인 것처럼 얘기했고, 정말 많은 돈이 VR로 쏟아졌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좋은 작업은 정말 없었어요. 사람들이 열광하면 할수록 그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 그 열광 속에 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초조함 때문에 작품을 내는 경우가 많아서 그래요. 저도 한때 VR 작업을 왜 안 하냐는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김희천에게 가상은 뭔가요?
저는 사실 이 얘기를 참 오래 해왔어요. ‘가상 세계’라는 말이 주는 어떤 이미지라는 게 있죠. 예를 들면 이 현실 세계에서 내가 도피할 수 있는, 내가 지금 여기서 접속할 수 있는 어떤 세계를 상상하잖아요.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못 하는 걸 가상 세계에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예를 들면 VR이라는 기계가 가지고 있는 어떤 방향성을 보면, 실은 우리가 헤드마운트를 쓰고 화면을 보지 않고 화면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지요. 예전에는 마우스로 시점을 바꿨지만, 지금은 헤드마운트를 쓰고 머리를 흔드는 것만으로 바꿀 수도 있고요. 결국은 프로세스가 점점 짧아져 현실과의 간극이 점차 최소화되는 것, 그래서 심지어 우리가 VR을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는 상태가 VR이 가장 이뤄내고 싶은 경지일 거예요. 접속의 감각을 없애는 것이죠. 제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이미 이러한 디지털 기술들이 삽입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만큼, 사실 가상 세계라는 것과 현실 세계를 구별할 수 없고, 기술은 우리가 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비가시화되고 있다는 겁니다. 현실에서 도피해서 갈 수 있는 다른 세계가 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이 앞에 있는 세븐 일레븐이 <포켓몬고>의 포켓스탑이면 그곳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에도, 또 플레이하지 않는 동안에도 세븐 일레븐이면서 포켓스탑인 것이죠.
비가시화라… 어쩌면 이런 생각과도 맞닿을 수 있겠네요. 최근 저는 찾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많아졌다는 생각을 해요. 뭔가를 찾기만 하면 실체에 매우 가까운 정보를 얻을 수 있죠.
맞아요. 예를 들어 여행에 가서 그 도시에 있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공연을 보러 가면 신이 나잖아요.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서 정말 살아 숨 쉬는 뮤지션의 공연을 보는 거죠. 그런 게 예전에는 작동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인터넷이 닿는 곳이면 거의 모든 정보가 다 올라와 있어서 탐험하지 못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직 신이라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죠.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여행을 가면 구글에서 추천하는 맛집에는 굳이 가지 않았어요. 그런 곳은 진짜 맛집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게 맞았죠. 우연히 현지인 식당을 찾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새는 그 별점마저도 정교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구글이 모르는 맛집, 로컬만 아는 식당은 존재하는가, 라는 생각을 점점 해요.
마치 디지털 음원의 압축률이 너무 좋아져서 스트리밍 음원과 아날로그 음반 소리를 구별하기 힘든 것처럼요.
그게 나쁜가 하면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재미는 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저는 제 자신이 너무너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는 생각도 해요. 기술이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너무 잘 포착하고 꽤 그럴싸하게 그에 맞는 좋은 정보를 가지고 와버리니까, 제가 가진 취향, 제가 가진 삶의 바운더리가 너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둘러보면 기술이 저를 너무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제 자신을 너무 잘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러고 나면 제 인생이 너무 궁금하지 않은 때가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아진 지가 꽤 오래됐고, 새로운 걸 경험하거나 새로운 뭔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회의하게 됐어요.
저도 제 음악 취향이 정말 특별한 줄 알았는데, 얼마 전 스포티파이에서 제가 정말 듣고 싶었던 노래만 서너 곡을 연달아 틀어줘서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비슷한 느낌이겠죠?
기술 제안이 너무 설득력 있으니까 이제는 음악 정도는 뭐 그냥 들려주는 대로 듣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전 그게 조금 이상해요. 우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요. 내가 진짜 이 기술이 포섭하고 있는 외곽선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우리도 결국 이 정보의 바다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점이군요.
사람들이 그런 기술을 디스토피아로 많이 소비하잖아요. 디스토피아로 소비할 때 더 매력적으로 보이니까요. 마치 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할 것처럼요.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전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이 기술과 함께 잘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10년 동안 김희천이 세상과 기술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변화가 있었나요?
초반에는 이 세계와 스크린 혹은 가상 세계라는 것들 사이의 관계, 그 세계들이 어떻게 놓여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건 없다(웃음), 가상 세계 혹은 기술이라는 게 비가시화되고 있고, 그런 세계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관심이 좀 바뀌었어요.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윤리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김희천이 말하는 윤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윤리적인 잣대’ 혹은 ‘도덕적인 잣대’를 얘기할 때의 윤리라기보다 작품을 내기 전에 고민을 충분히 했는가, 그런 과정이 없이는 작품을 내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윤리를 얘기한 거였어요. 친구랑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미술 작업을 하다 보면 자칫 ‘내가 이 세계를 이해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내가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거나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이 세계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해요. 내가 이 세계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 순간 기만하게 되지요. 기술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기술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 그게 미술이 된다고 생각하고 착각에 빠질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내가 작가로서 질문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기만적이지 않았는가에 대해 다시 묻는 게 중요하지요.
이번에 2023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탔습니다. 미술상을 타면 재단의 후원으로 2024년 전시를 준비하죠.
내년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뭘 할지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혀 모르겠어요.
아까 잠깐 지금 하는 작업 얘기를 꺼내기도 했었죠.
5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게임 사회>라는 전시에 낼 작품이에요. 게임과 사회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지에 대한 전시죠.
조금만 더 설명해주세요.
문제가 있어요. 제가 생각보다 작업을 진짜 갑자기 바꿔요. 갑자기 설정을 확 바꿀 때가 되게 많아요. 그래서 절대 안 바뀔 것들만 얘기해볼게요. 아주 오래전에 ‘툼 레이더’라는 게임이 처음에 나왔을 때 라라 크로프트 등 로폴리곤 형태의 캐릭터들이 섹시한 매력으로 인기를 끈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래픽이 발전하니까 라라 크로프트의 팬들이 실망을 하기 시작한 거죠. 낮은 해상도의 라라를 보고 저마다 자기 버전의 라라를 머릿속에 구체화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달랐던 거죠. 옛날 게임들이 재밌었던 지점 역시 비슷합니다. 내 머릿속에 생각할 여지가 있었던 셈이죠. 지금의 게임들은 너무 구체적이잖아요. 지금 한 이야기가 이번 작품의 핵심이라기보단, 그런 종류의 작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 에르메스 재단
- ART DESIGNER 최지훈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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