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가옥 '오초량'이 지켜낸 시간의 진본성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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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가옥 '오초량'이 지켜낸 시간의 진본성

주변지의 아파트 개발로 존폐 위기에 처했던 부산 초량동 일본식 가옥이 오랜 개보수 끝에 ‘오초량’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192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이제 곧 100년을 맞는다. 그간 이 집을 둘러싼 역사와 국가와 개발의 광풍을 생각해봤다.

박세회 BY 박세회 2023.05.29
 
 
현재는 1925년 건립된 1층과 1931년 북서쪽 부지에 증축된 2층이 남아 있다. 1954년 1층 일부를 철거한 후 남측 부지에 2층 규모의 양옥을 증축했으나 지금은 그 기둥만 흔적으로 남았다.

현재는 1925년 건립된 1층과 1931년 북서쪽 부지에 증축된 2층이 남아 있다. 1954년 1층 일부를 철거한 후 남측 부지에 2층 규모의 양옥을 증축했으나 지금은 그 기둥만 흔적으로 남았다.

지난달 일맥문화재단은 이제 곧 백 살을 바라보는 등록문화재 ‘부산 초량동 일본식 가옥’에 ‘오초량’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고 전시 공간으로 재개관했다. 풀밭에 난 오솔길을 뜻하는 지명 ‘초량(草粱)’ 앞에 감탄사 ‘오!’를 붙인 작명이다. 그 이름처럼 오초량은 초량을 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보이는 부산, 신발원이 있고, 중국인 학교가 있으며, 텍사스 거리인데 막상 가보면 러시아 식당이 즐비한 그곳이 바로 지금의 초량이다. 그러나 오래전, 그러니까 이 일본식 가옥이 지어지기 전의 초량은 “어기(漁期) 때면,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생선 냄새가 진동하는” 어촌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의 항구가 일본인에게 열리면서 조선보다 20년 빠른 일본의 근대가 남포를 중심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밀물의 속도는 인식의 변화보다 빨랐다. 개항 당시 82명에 불과했던 거류지(조계지)의 일본인들은 불과 2년 후 1500여 명으로 급증했다. 1884년에는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미국인 호러스 알렌이 자신의 일기에 “부산은 완전히 왜색 도시다. 도시 변두리에 가지 않고는 조선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다”라고 썼을 정도다.
이때까지도 초량은 조선인 마을이었다. 알렌 씨가 조선 사람을 볼 수 있다고 말한 도시 변두리였던 셈이다. 당시 외국인의 눈에 개화된 도시 부산은 남포와 중앙까지였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근대의 상징인 철도가 들어서고 산이 깍여나가며, 초량도 변했다. 1905년에 개통한 경부선이 컸다. 경부선은 초기엔 남대문역에서 초량역까지 달렸다. 당시의 제1 부두인 중앙동 일대에 닿지 못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이 해안에 바짝 붙어 초량동과 중앙동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 조계지 일본인들은 북쪽으로 확장을 원했다. 부산에 살던 일본인 거류민단의 요청으로 높이가 50m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이 두 산이 깎여나갔다. 산을 깎은 흙으로 초량의 앞바다를 메웠다. 이때부터 중앙동을 집어삼킨 개항의 파도가 초량에도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부산의 탄생〉의 저자 유승훈은 남쪽 용두산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와 북쪽에 있는 초량 및 부산진 조선인 마을 사이에 생활권역을 구분하던 경계가 이때 사라졌다고 말한다.
아르네 야콥센의 테이블과 체어가 있는 다다미 거실엔 스벤트 랭킬드의 장식장과 키요웨어의 도기, 정수경의 유리공예 작품과 키미누의 목공예 작품이 배치되어 있다.

아르네 야콥센의 테이블과 체어가 있는 다다미 거실엔 스벤트 랭킬드의 장식장과 키요웨어의 도기, 정수경의 유리공예 작품과 키미누의 목공예 작품이 배치되어 있다.

다나카 히데요시(田中筆吉)는 조선에서 한몫 잡아보려던 오카야마현 출신의 촌사람이었다. 나이 22세이던 1897년 1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건너온 그는 ‘다나카구미’(田中組)를 조직해 경부선 철도 공사에 뛰어들었다. 이후 마산에 출장소를 세우고 마산선을 완성시켰고, 진해에 출장소를 세우고 진해선을 완성시켰다. 경부선, 마산선, 진해선에는 합자 회사로 성장한 다나카구미의 땀이 묻어 있다. 그는 철도만 건설한 것이 아니라 여러 토목사업에도 손을 댔는데, 그중 하나가 20세기 초 우리 국토에서 벌어진 가장 큰 매축사업 중 하나였던 부산진 매축사업이었다. 참고로 일본은 조계지 인근의 바다를 매축하는 방식으로 땅을 마련했다. 군산, 목포, 인천 등지의 원도심 땅 중 다수가 매축지인 이유다. 부산도 마찬가지다. 남포와 중앙동 일대는 물론 영도 대풍포 매축공사, 부산 남항 매축공사, 적기만 매축공사가 이때 이뤄졌다. 부산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다나카 히데요시가 1927년 이후에 벌어들인 돈만 따져도 100만원이라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1000억원 이상이다. 기술을 가진 이는 적고, 인건비는 저렴하고, 토목공사의 기회가 지천에 널린 황금의 땅 조선에서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해낼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 다나카 히데요시가 1925년에 짓고 거주한 집이 바로 부산 초량동 일본식 가옥, 지금의 ‘오초량’이다.
‘오초량’을 찾았을 때 나는 처마 끝에 붙은 청동 장식을 보며 감탄했다. 가늘지만 단단해 보이는 서까래로 지탱되고 있어 다른 지지물이 필요 없어 보이는 처마의 귀퉁이 아래에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청동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처마가 처지지 않도록 하는 기능적인 측면도 있지만, 굳이 저렇게 격자문양의 트러스트 구조를 비싼 재료로 예쁘게 만들어 달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서울 서촌의 문화공간 보안여관의 대표이기도 한 일맥문화재단 최성우 이사장이 말했다. “1910년에 국권 피탈이 되고 나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수많은 사업을 벌였고, 거기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기 시작했죠. 그게 극치에 달한 시점을 1925년쯤으로 봐요. 이 집이 지어진 시기죠. 한국에서 성공한 토목업자가 자신이 사들인 땅에 얼마나 좋은 집을 짓고 싶었겠어요.”
필요를 위해서만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물이 모이면 여분의 아름다움이 넘치기 시작한다. 오초량에 깃든 디테일들이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방과 방을 나누는 나게시(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횡부재)와 천장 사이에 있는 틈에 세밀한 살로 만든 목판을 채워 넣고, 그것도 모자라 나뭇잎사귀를 새겼다. 종이 창호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꽃문양을 섬세하게 음각한 유리창을 넣었다. 실용의 관점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이런 디테일들이 이 집을 소중하게 한다.
네이트 코너게이는 한국의 콜로니얼 시대 건축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한국을 사랑해 한국의 역사를 공부했고, 한국의 건축물과 사랑에 빠졌다. 군산, 인천, 목포, 광주, 부산,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적산가옥을 촬영해 그 집의 역사와 함께 거의 논문 수준의 정보로 가득 찬 글을 영문으로 웹에 게시한다. 웹사이트의 이름은 ‘콜로니얼 코리아’. 그가 특히 한국의 식민 시대 건축물과 사랑에 빠진 이유는 무척 흥미롭다. “식민기 건축물에 관한 제 흥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진본성에 대한 열망입니다.” 〈코리아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본성은 원 상태 그대로를 최대한 유지한 공간에서 나옵니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한옥을 다 헐고 그대로 본뜬 건물을 새로 짓는다면, 그것은 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과 같은 공간일까요?”
나게시 위와 천장 사이를 가리는 목판에는 정교한 나뭇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게시 위와 천장 사이를 가리는 목판에는 정교한 나뭇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한국에서 적산가옥이 갖는 문화재적 위상과도 연관이 깊다. 우리나라에는 30여 개의 적산가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엄밀하게 말해 사유재산인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보존의 강제성이 없다. 보존의 강제성이 없어 많은 적산가옥이 방치됐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방치되다 보니 그 공간에 쌓이는 시간만은 훼손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많은 공간이 지나친 개보수를 거치며 너무도 빠르게 현대의 때깔을 입은 것과 비교된다. 완벽하게 새로 지은 한옥마을의 한옥들에서 진본성을 느끼기란 힘든 법이지 않은가. 많은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적의 재산’으로 치부되어 ‘무관심과 국수주의적인 무시 속에 방치’된 적산가옥이 오히려 진본성에 목마른 그의 오아시스였던 셈이다.
오초량이 코너게이의 눈에도 띄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이 집을 찾은 것은 아마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심의 여지없이 부산의 중심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본식 가옥 중 하나는 고관로 13번 나길에 있는 집이다. 불행히도 이 집 안에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문화재청에 있는 사진과 담벼락 밖에서 보이는 외벽과 지붕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원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코너게이는 이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잘못 생각한 사실도 있다. “알아보니 어쩌면 이 집 안에 발을 들이는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황래성이라는 사람이 회장으로 있는 일맥문화재단에서 1971년에 이 집을 샀기 때문이다. 전화도 걸어봤는데, 기관 소유가 확실하다.” 1971년에 황래성 씨가 이 집을 샀기에 우리는 오초량에 방문할 수 있다.  일맥문화재단은 부산 섬유산업의 토대를 이룬 태창기업의 창업주 고 일맥 황래성 선생이 1975년 설립한 재단이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외조부모님과 우리 가족이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죠. 2000년 외조모께서 작고하신 후 일맥문화재단에 기부되어 현재에 이르렀어요.” 최 이사장이 말했다. 참고로 이 지면을 빌려 코너게이 씨가 오초량을 방문할 수 있도록 최대한 애를 써보겠다고 약속한다. 판권에 있는 이메일로 메시지를 남겨주시길.
보존의 강제성이 없다는 사실은 진본성을 유지하는 데는 미필적 도움을 줬을지 모르나 반대로 개발의 홍수에서 문화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함정이기도 하다. 고관로 오초량 일대 대다수는 한국식 건물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나무 벽과 급격한 경사의 일본식 지붕을 얹은 건물이 여럿 있었다. 한 변이 130m인 이 정방형 땅 전체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됐다. 시공사는 이미 오초량이 있는 필지를 포함해 고층 아파트 4개 동을 지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일맥문화재단은 그 땅을 팔지 않았다. 결국 40층짜리 아파트 3개 동이 오초량의 3면을 둘러쌌다. 시간의 숨통과도 같은 오초량의 시야를 회백색 콘크리트 빌딩이 막아선다는 것도 애석했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물리적인 위험이었다. 분진이 날려 집 안 곳곳이 엉망이 됐고, 지반 공사가 이어지자 집이 기울기 시작했다. “북쪽 건물이 거의 15도쯤 기울어 내려앉는 바람에 벽에 금이 가고 목조가 다 못 쓰게 되었어요. 1층 목조가옥은 그 피해가 더 심각해서 거의 해체하고 다시 지었습니다.” 최 이사장의 말이다. 다시 짓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90년이 넘은 목재를 다시 쓰는 일은 새로 짓는 것보다 힘들다. “살릴 수 있는 한 최대한 살렸어요. 부러져서 쓸 수 없는 목재들은 최대한 비슷한 것을 찾아 원래 나무에 붙였죠. 거의 80%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재료들을 찾고 마감했어요. 필지를 팔고 건물을 그대로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지만, 전 단 한번도 옮길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러면 부산역에서부터 텍사스 스트리트, 차이나타운, 백제병원, 초량시장, 정란각, 산복도로까지 이어지는 부산 원도심의 루트에서 이가 하나 빠지는 격이잖아요.”
동래 한량무의 마지막 전승자 문장원 선생의 사진이 일본식 주택의 분더카머라 할 수 있는 도코노마에 걸려 있다.

동래 한량무의 마지막 전승자 문장원 선생의 사진이 일본식 주택의 분더카머라 할 수 있는 도코노마에 걸려 있다.

지금 오초량에서는 재개관 첫 전시 〈오! 분더카머(O! Wunderkammer)〉를 열고 있다. 내후년 백 살을 맞는 일본식 주택의 곳곳에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샬롯 페리앙과 장 푸르베, 피에르 잔느레의 빈티지 가구들이 백경원, 키미누, 정수경의 아트 피스들과 함께 놓여 있다. 디자인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환희의 신음을 내지를 물건들이 그것들과 묘하게 짝을 이루는 현대의 공예 작품과 간결하게 어우러진다. 그러나 기차 시간에 쫓겨 느긋하지 못하게 곳곳을 살펴보는 와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공간이 하나 있었다. 일본식 주택의 다다미에서 장식품을 두기 위해 한 단 올려 움푹 들어가게 만든 공간인 도코노마에 웬 흑백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한복을 입은 노인이 두 팔을 휘젓는 장면이었다. “동래 한량무의 마지막 전수자이신 문장원 선생이세요. 문장원 선생이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며 춤을 추시는 장면을 이한구 작가가 멀리서 찍은 거죠. 저렇게 찍자고 얘기하고 찍은 게 아니에요. 저 사진에 찍히시고 두 주쯤 후에 돌아가셨어요.” 최 이사장이 말했다. “일본식 도코노마에 우리 한량무를 추는 사진을 상징적으로 올려둔 셈이죠.”
오초량의 정원에는 예전에 2층짜리 양옥 건물이 있던 자리에 작은 석못을 팠다. 길게 뻗은 못의 맞은편에서 정원을 바라보면 40층짜리 아파트가 기괴한 대비를 만들어낸다. 그 장면 자체로 100년의 이야기에서 파생된 심상이 굳어진다. 코너게이가 얘기했던 ‘무관심과 국가주의적 무시’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한다. 도시개발에 관하여, 국가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광주 비엔날레에서 오석근 작가의 작품 ‘적산(敵産)_광주(光州)01’과 마주친 적이 있다. 지난 2022년 부산 비엔날레의 작가 소개글에 오석근의 작품 활동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 및 개항 도시 부산과 인천의 역사 그리고 우리의 생활 문화사가 품은 시간의 층층을 담아내는 것으로 부산에서는 특히 대저, 가덕도, 개항장 일대에 남은 적산가옥을 살핀다. 적산가옥은 표면적으로는 이념과 정치 언어로 호명되지만, 일본인이 만든 그 뼈대 속은 한국인들의 행위와 문화의 결로 가득하다. 적산가옥의 탄생과 표면, 내면을 뜯어보며 우리는 ‘집이라는 대상이 과연 민족과 국가를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와 최 이사장 역시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적산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네거티브 문화유산을 뜻하거든요. 이 집은 1925년에 지어졌고 1945년까지는 일본 사람이 살았지만, 그 후로 훨씬 더 긴 세월 동안 한국 사람이 살았던 공간이에요. 그러면 이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일까요?” 최성우 이사장이 내게 던진 질문이다.
북서쪽 부지의 2층 가옥과 40층짜리 아파트가 만들어내는 콘트라스트는 그 나름대로 여러 의미가 있다.

북서쪽 부지의 2층 가옥과 40층짜리 아파트가 만들어내는 콘트라스트는 그 나름대로 여러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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