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TECH

아스팔트 위의 피겨스케이팅이란?

아스팔트 위에서 타는 피겨 스케이팅. 드리프트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알고 보면 더 즐거운 드리프트의 미학을 소개한다.

프로필 by 박호준 2023.07.10
 
그건 드리프트가 아니다
‘카트라이더’로 드리프트를 처음 접했다. 2004년, 넥슨이 발매한 자동차 경주 게임 ‘카트라이더’는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간단한 조작 방식으로 금세 남녀노소에게 인기를 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드리프트를 해서 부스터 게이지를 모은다는 발상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궁금하지만, 전국의 초등학생들에게 ‘빠르게 달리다가 급하게 운전대를 꺾으면 차가 미끄러진다’는 개념을 주입하기엔 충분했다. 이후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도미닉 토레토가 비현실적인 드리프트로 악당을 따돌리고 만화 <이니셜D>의 주인공 후지와라 타쿠미가 관성 드리프트로 짜릿한 역전승을 펼치는 걸 보며 ‘아, 역시 드리프트가 최고야’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직히 말하면,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부러 넓은 공터로 차를 가져가 괜히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긴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드리프트가 아니다. 누군가가 유턴할 때 악셀을 급하게 밟고는 “나 드리프트 성공했어”라고 말했다면 그건 드리프트가 아니라 ‘언더스티어’나 ‘오버스티어’ 현상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언더, 오버 스티어란, 과속 또는 정확하지 못한 조작 탓에 타이어가 파열음을 내고 원하는 만큼 조작한 핸들의 양보다 적게 혹은 많이 움직이며 미끄러지는 것을 가리킨다. 적어도 ‘원돌이(한 지점을 타깃으로 후륜을 미끄러뜨려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카운터 스티어 하며 도넛 형태를 그리는 연습)’ 정도는 숙달한 후에야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기술이 드리프트다.
그래서 드리프트가 뭐냐고? 그건 마치 피겨스케이팅에서 스핀이 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도는 게 스핀이고 스핀에는 카멜스핀, 싯스핀, 플라잉 싯스핀 등 수많은 스핀이 있지만, 스케이트장에서 여자 친구와 손잡고 빙빙 도는 것은 스핀이 아니다. 드리프트를 시작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파워 오버 드리프트, 관성 드리프트, 핸드 브레이크 엔트리 등 종류가 많다. 핵심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운전대, 클러치, 악셀, 브레이크를 적절히 사용해 의도적으로 차를 미끄러트리고 평소 사용하던 운전대의 방향과 반대로 운전대를 유지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조작하는 행위가 드리프트다. 드리프트는 폭주족처럼 마구잡이로 차를 다루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여러 악기 소리를 들으며 강약과 템포를 조절하는 것처럼, 뛰어난 드리프터는 운전석에서 느껴지는 내연기관의 다양한 자극을 분석한 후 일사불란하게 각 장치를 제어한다.
 
잘 봤고요. 제 점수는요? 
“드리프트는 피겨스케이팅과 닮았습니다. 대한 드리프트 협회(KDA)의 이사직과 코리아 드리프트 그랑프리(KDGP)의 해설을 맡고 있는 소준호 말이다. 심사위원이 점수를 매긴다는 것도 그렇다.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지 다투는 레이싱이 스피드스케이팅이라면, 아이스링크처럼 탁 트인 평평한 아스팔트 경기장 위에서 춤을 추듯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드리프트는 피겨스케이팅에 가깝다. 그런데 피겨스케이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의구심이 하나 있다. 피겨 대회에서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편파 판정이 행여 드리프트 대회에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1%의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는 없죠. 어쨌든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국내 무대를 제패하고 드리프트 본고장인 일본 무대에서도 우승 경험이 있는 베테랑 드리프터 조선구의 말이다. 이어서 그는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놓았어요. 요즘은 드론 촬영을 이용해 보기도 하죠”라고 덧붙였다. 나라와 대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한 드리프트 협회가 주관하는 ‘코리아 드리프트 그랑프리(KDGP)’의 채점 기준을 살펴보면 클리핑 포인트(이하 CP) 60점, 기술 점수 35점, 스타일 25점으로 총 120점 만점이다.
CP는 모터스포츠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최적의 주행라인을 구현하기 위해 설정하는 가상의 점이다. 예를 들어 드라이버가 레이스카로 서킷의 코너를 공략할 때 “헤어핀 코너에서 CP를 너무 늦게 찍었다”라고 말했다면 원래 목표했던 것과 다른 주행라인을 그렸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서킷 초보자’는 이 CP를 익히는 데에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드리프트의 세계에선 CP의 개념이 다르다. ‘찍고 지나간다’는 면에선 같지만 그 목표는 최적의 주행라인이 아닌 포인트 획득이기 때문이다. 클래스에 따라 다른데, KDGP의 프로 클래스의 경우 총 5개의 CP를 지정해놓고 CP를 드리프트로 통과하면 점수를 얻는다. 또한 ‘아웃 CP’와 ‘인 CP’를 구분해놓았는데 아웃 CP는 차의 뒷부분으로 CP를 찍고 인 CP는 앞부분으로 CP를 찍어야 한다. CP는 주최 측이 설정하기 나름이어서 그날의 CP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지가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기술 점수는 드리프트, 라인, 각도로 나뉜다. 드리프트가 끊기지 않고 일정한 라인을 그리는지 평가하는 것이다. 이때 각도는 클수록 좋다. 각도가 크다는 건 차가 꽃게처럼 옆으로 움직인다는 뜻으로 운전자뿐만 아니라 관람객에게도 큰 재미와 볼거리를 선사하는 요소다. 특히 라인은 CP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번 라인이 무너지면 연쇄작용으로 드리프트와 CP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스타일 점수의 세부항목은 속도, 임팩트, 연기량이다. 랩타임을 측정하는 건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드리프트를 할수록 점수가 높다. 김연아 선수가 다른 선수보다 빠른 속도를 바탕으로 탁월한 점프 높이와 빠른 회전속도를 뽐낼 수 있었던 것처럼 드리프트도 속도를 빠르게 가져가면 차에 걸리는 관성이 커져 더 화려한 드리프트를 뽐낼 수 있다. 종합하자면, 드리프터는 빠른 속도로 드리프트가 끊기지 않게 달리며 정해진 CP를 전부 밟기 위해 최적의 라인을 그림과 동시에 더 많은 연기와 각도를 뽐내야 우승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다.
여기까지가 솔로 주행의 영역이다. 진정한 드리프트의 묘미는 2대가 나란히 달리는 ‘체이스’에 있다. 남녀가 팀을 이루어 협동하는 팀 스케이팅과 달리 체이스는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경쟁 관계다. 체이스를 벌일 때 앞서 달리는 차를 선행, 뒤따라 달리는 차를 후행이라고 한다. 각 차는 선행과 후행을 한 번씩 번갈아 달려 승부를 가리는데 일종의 공격과 수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프로 세계에서 승부는 대개 선행이 아닌 후행에서 갈린다. 선행은 솔로 주행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수만 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획득할 수 있지만 후행은 앞차의 페이스에 맞춰 달려야 하므로 주행이 더 까다롭다. 후행은 선행에 차를 가깝게 붙여 달릴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최정상급 드리프터는 선행과 후행 사이의 간격이 손 한 뼘만큼 가깝고 때로는 차량의 옆면에 뒷차량의 앞타이어 자국이 나기도 한다. 미끄러지고 있는 2톤짜리 쇳덩이에 닿을 듯 말 듯 자신의 차를 가져다 붙이는 건 강심장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상위 클래스로 갈수록 타이어 연기량이 많아져 후행 입장에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선행을 믿고 어렴풋한 실루엣을 쫓아 전력으로 달릴 뿐이죠.” 소준호의 말이다.
 
당신의 차도 드리프트를 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차를 컨트롤하며 내달리는 드리프트 경기를 보고 나면 당장이라도 차를 끌고 나가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참고로 일반도로에서의 드리프트는 불법이므로 서킷과 같이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만 즐겨야 한다. 꼭 수동변속기를 탑재한 차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론적으로 후륜구동이기만 하면 드리프트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대회에 출전할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차체가 뒤틀리는 걸 막기 위해 ‘롤 케이지 바’를 설치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극적인 드리프트 각도를 만들기 위해 조향 각도를 대폭 늘리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세히 파고들면 앞뒤 타이어 폭의 차이부터 엔진 과급 터빈의 종류, 배기량에 따른 인터쿨러 용량 등 따져야 할 것이 한가득이다.
“총 4대의 드리프트 머신을 가지고 있어요. 제네시스 쿠페는 2.0 모델과 3.8 모델을 각각 보유 중이죠.” 피치스 소속 드리프터 박시현의 말이다. 그녀는 국내 몇 안 되는 여성 드리프트 선수이자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00만이 넘는 드리프트계의 ‘인싸’다. 드리프터에게 차가 여러 대라는 건 승마선수가 말을 여러 마리 가진 것과 비슷하다. 선수 개인 능력 못지않게 차를 자신의 운전 스타일과 맞게 세팅하고 관리·유지하는 것도 넓게 보면 실력의 일부다. 오죽하면 20년 가까이 드리프트 밥을 먹어온 베테랑 조선구조차 “세팅이라는 건 그날의 노면 상태나 날씨에 따라 달라질 정도로 예민해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갈고 닦는 수밖에 없죠”라고 말할 정도다. 피겨스케이터가 신는 신발의 날의 길이와 연마 방식에 따라 선수의 퍼포먼스가 달라지는 것처럼 3만여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진 자동차가 얼마나 세팅에 예민할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품은 드리프트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면 대한 드리프트 협회에 연락해 도움을 구하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다. 드리프트 대회에 출전하는 팀들 중 몇몇은 일반인을 위한 드리프트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드리프트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박시현 선수는 “심레이싱과 같은 사실적인 레이싱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이용한 연습을 강력 추천해요. 생각보다 꽤 유용해요. 저도 그렇게 시작했어요”라고 답했다. 튜닝도 마찬가지다. 브레이크를 바꿨더니 서스펜션이 말썽이고, 변속기를 고쳤더니 엔진이 퍼지는 불상사를 막으려면 산전수전을 겪은 경험자의 조언을 듣는 것이 최선이다.

Credit

  • EDITOR 박호준
  • PHOTO 강준영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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