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예술 작품 속 시계 이야기

17세기부터 현대까지. 8개의 예술 작품을 통해 알아본 시대별 시계의 변천과 의미.

프로필 by 박호준 2023.10.04


Willem Claesz Heda (1629)

Still Life with a Roemer and Watch 

 PHOTO MAURITSHUIS

PHOTO MAURITSHUIS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선 정물화가 유행했다. 국제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은 네덜란드의 신흥 중간 계급이 정물화를 선호하면서 시작된 유행이었다. 당시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던 은쟁반, 투명하고 얇은 유리잔, 시계 등을 그림으로라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그림에 담겨 있다. 작가인 빌럼 헤다는 단순히 진귀한 물건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는 수준을 넘어 식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나이프나 지저분한 음식 찌꺼기 등을 이용해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했다. 이러한 정물화를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부른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헛되다는 뜻이다. 왼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작은 회중시계는 한눈에 보아도 비싼 물건처럼 보인다. 금빛으로 빛나는 몸체와 시계 덮개 옆면에 정교하게 새겨 넣은 장식 덕이다. 눈썰미가 좋다면 시계 옆 작은 열쇠를 발견했을 텐데 이건 무언가를 잠그고 여는 일반적인 열쇠가 아니라 시계의 태엽을 감기 위한 도구다. 당시의 시계는 지금 기준으로 ‘타이머’에 더 가까워, 태엽을 끝까지 감으면 1시간가량 분침이 작동하는 식이었다. 마을 중앙에서 울리는 시계탑 종소리를 기준으로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으면 다음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의 시간을 회중시계로 확인하는 셈이다. 휴대할 수 있는 회중시계가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덕에 시계는 경쟁적으로 점점 작아지고 정교해져 갔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흐름은 훗날 손목시계가 등장하는 것까지 이어진다.
 

 
Jacques-Louis David (1812)

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PHOTO NATIONAL GALLERY OF ART

PHOTO NATIONAL GALLERY OF ART

자크루이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생전에 이미 높은 인기를 누린 그는 ‘마라의 죽음’이나 ‘소크라테스의 죽음’같이 정치색이 짙은 그림을 여럿 그렸으며 당시 절대권력을 자랑하던 나폴레옹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생베르나르 고개의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그 예다. 다비드는 초상화 안에 숨은그림찾기처럼 여러 도상적 표현을 담아놓았다.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면, 풀려 있는 소매 단추와 헝클어진 머리는 그가 ‘나폴레옹 법전’을 작성하면서 서재에서 밤을 새웠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다. 나폴레옹 뒤 벽시계가 4시 13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또 의자 위 서류에 ‘코드’라고 써 넣은 것 역시 자신이 만든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을 가리키는 것으로 업적을 드러내어 자랑하려는 의도가 담긴 표현이다. 시계는 어떨까? 그림 속 시계는 같은 시기 만들어진 다른 고급 괘종시계가 조각과 금으로 장식된 것과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이다. 참고로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초는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더라도 시계를 집에 보유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시계가 보편화되어 가던 시기다. 기록에 따르면 1780년대에 파리에는 이미 400명이 넘는 시계 장인이 있었으며 런던과 제네바에선 연간 7만~8만 점의 시계가 생산됐다.
 

 
Diego Rivera (1914)

The Alarm Clock 

PHOTO GOOGLE ART PROJECT

PHOTO GOOGLE ART PROJECT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도 잘 아려진 디에고 리베라가 20대 시절 파리에 머물며 그린 그림이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와 교류하며 입체주의적인 그림에 매진했다.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이 무채색을 주로 사용한 것과 달리 디에고 리베라는 채도가 높은 컬러를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사진 속 ‘알람시계’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1921년 멕시코로 돌아간 후 1929년 프리다 칼로와 결혼하면서 그는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대형 벽화 위주의 작품 활동을 펼치게 된다. 시계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스페이드 핸즈’가 눈에 들어온다. 스페이드 문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으로 손목시계가 보급되기 전부터 회중시계에 쓰인 디자인이다. 요즘엔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계에 주로 적용된다. 그리고 다이얼의 12시와 6시 방향에 2개의 카운터가 있다. 당시엔 지금처럼 초침, 분침, 시침이 함께 돌아가지 않고 초침을 따로 분리해 표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또 몸의 움직임으로 셀프와인딩을 하는 손목시계와 달리 탁상시계는 주기적으로 태엽을 감아줘야 했는데 이러한 장치도 시계 윗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2개의 카운터는 각각 초침과 파워 리저브였을 가능성이 높다. 
 

 
Unknown (early 20th century)

Books and Scholars’ Possessions 

PHOTO METROPOLITAN

PHOTO METROPOLITAN

서양에서 만들어진 기계식 시계가 동양에 알려진 건 언제일까? 기록에 따르면 16세기 후반 프랑스 선교사가 교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시계를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마드리드에서 제작된 시계를 선교사에게서 선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선 1723년, 문신종(問辰鐘)이 등장하는데 청나라에서 넘어온 시계를 당시 임금이었던 경종의 명에 따라 복제해 만들었다. 단,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책가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같은 무렵이다. 1776년 즉위한 정조는 ‘책벌레’로도 유명했는데 그림도 책가도를 좋아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궁중회화와 사대부 위주로 인기를 얻던 책가도는 19세기 이후엔 민화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궁중에서 책가도가 그려졌을 땐 책이 잔뜩 꽂힌 책꽂이에 문방사우를 곁들인 수준이었지만, 민간으로 전파되며 기복 신앙을 담거나 값비싼 물건을 잔뜩 집어넣는 형태로 변했다. 그림 속 시계는 7번과 10번 폭에 위치한다. 7번 폭에 그려진 탁상형 팔각형 괘종시계의 다이얼을 보면 4시와 7시에 2개의 홈이 있다. 이는 시계를 움직이는 태엽과 시보장치를 움직이는 태엽을 각각 감기 위한 장치다. 시계 성능에 따라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시계를 비추어 볼 때 태엽을 감는 주기는 약 일주일 정도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 10번 폭에 있는 시계는 옥 또는 도자기로 보이는 소재를 사용해 시계를 감쌌고 그 위에 꽃 그림까지 더해 장식미를 뽐내는 것이 특징이다.
 

 
Mary Engel (2021)
REGGIE 
PHOTO MARCIA WOOD GALLERY

PHOTO MARCIA WOOD GALLERY

시계로 잔뜩 덮인 그녀의 조각을 본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나?’라는 질문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메리의 설명은 다르다. “아버지의 시계, 할머니의 단추, 딸의 주사위 등 평범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일상 도구를 이용해 작품을 만듭니다. 때론 컬렉터가 아끼는 시계를 받아 작품에 넣기도 하죠.” 물론 예외도 있다. 2016년에 만든 몇몇 작품은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의 잔혹한 현실을 꼬집기 위해 총알로 조각 표면을 가득 채웠다. 와이어로 뼈대를 세운 후 천을 둘러 형태를 구성하는 작업 방식 덕에 조각 내부는 텅 비어 있다. 하나의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적게는 수백 개, 많게는 수천 개의 시계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중고시장과 고물상에 들러 재료를 모으는 게 취미이자 일이다. “(총알과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새 제품을 쓰진 않아요. 서로 다른 수많은 제품이 모여 또 다른 형태로 거듭나는 게 제 작품의 특별함이죠.” 그녀가 만든 모든 동물 조각은 암컷이다.
 

 
Ryan Gander (2021)

Our Long Dotted Line(or 37 years previous) 

PHOTO 스페이스K

PHOTO 스페이스K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같은데? 베젤도 돔 베젤 같아 보이고.” 평소 시계에 빠삭한 옆자리 에디터의 말이다. 오이스터 퍼페츄얼은 롤렉스 라인업 중 엔트리 라인에 속하는 모델로 다이얼 크기마다 가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약 700만~800만 원으로 비교적 저렴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근데 왜 데이트 저스트나 데이토나 같은 롤렉스의 대표적인 모델 대신 오이스터 퍼페츄얼 쓴 거야?"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라이언 갠더에게 있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 위치해 누구나 쉽게 관람할 수 있는 ‘우리의 긴 점선(또는 37년 전)’은 시간의 속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그의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 37년간 자동차 공장 엔지니어로 일한 작가의 아버지가 은퇴 기념으로 받은 시계와 집 근처에서 발견한 자갈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며 자신의 시간을 돈으로 교환한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를 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을 되돌려받았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라이언 갠더는 작품에 대해 “변화와 시간은 사실 같은 단어일 수 있다. 변화 없이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사물이 변하는 것을 통해서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박민준 (2022)
곰탈의 귀를 잡고 있는 광대 

PHOTO 갤러리현대

PHOTO 갤러리현대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한다. 박민준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내기 위해 <라포르 서커스>와 <두 개의 깃발>이라는 두 권의 소설을 썼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피는 것이 그의 주된 작업 방식이다. 그는 작품의 주제로 서커스를 선정한 까닭을 묻는 질문에 “서커스가 지닌 비주얼적 요소도 흥미롭지만 사람이 세상이라는 무대로 나와 일생을 살다가 천막 뒤로 퇴장한다는 의미가 크게 와닿았어요”라고 답했다. 서커스에 대한 그의 관심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전 유럽에 걸쳐 흥행한 즉흥 가면극 ‘콤메디아 델라르테’까지 이어졌고 지난해 열린 10번째 개인전 <X>에서 연작으로도 소개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뾰족한 테이블, 인덱스가 없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려운 커다란 회중시계, 비현실적으로 앙상한 광대의 몸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박민준은 이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인물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요.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인물과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로 그려낸 거죠.”
 

 
Daniel Arsham (2023)
Selenite Eroded Wrist Watch 3 
PHOTO GALERIE RON MANDOS AMSTERDAM

PHOTO GALERIE RON MANDOS AMSTERDAM

다니엘 아르샴은 농구공, 야구모자, 전화기 같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템에 ‘가상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이라는 자신만의 개념을 주입해 작품을 만든다. 그에게 가상 고고학이란, 현재의 물건을 먼 미래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으로 일상 용품을 예술 작품으로 바꾼다는 면에서 앤디 워홀과 닮았다. “저 역시 앤디처럼 일상에서 예술이 주는 메시지를 공유합니다” 2019년 앤디 워홀 뮤지엄과 다니엘 아르샴이 협업을 진행했을 때 한 말이다. 그는 일반인에 비해 20%밖에 색을 보지 못하는 색맹이지만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오랜 시간을 견디며 하얗게 색이 빠진 형태이기 때문이다. 디올, 포르쉐, 아디다스 등 수많은 브랜드의 제품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그가 지난해 5월 새로운 손목시계 시리즈를 선보였다. 비록 작품명에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작품 속 시계는 분명 까르띠에 클래쉬다. 자동차 사고로 망가진 시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클래쉬는 1967년 처음 등장한 후 까르띠에의 디자인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크래시는 독보적인 디자인 덕에 중고 거래 가격이 165만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간혹 발매되는 리미티드 에디션 역시 출시되기 무섭게 품절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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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박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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