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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소설> (2) '십오 분의 기울기' - 공현진
네 명의 소설가에게 시간과 시계에 관한 아주 짧은 이야기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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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역 어떠세요?”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 상대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중이었다. 뭐, 합정. 나쁘지 않았다. 평범하고 무난했다. 소개팅 장소로 흔한 장소였고, 흔하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도 적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예상 가능한 선택지였다. 시간만 정하면 되겠네. 나는 빨리 약속을 잡고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실제로 만나기도 전에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나도 다 해봤다. 영혼의 소울을 만난 것처럼 좋아하는 영화부터 음악, 음식, 취미까지 아주 잘 통하는 사람과 문자를 주고받느라 온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있어도 봤고, 만나기 전까지 밤마다 전화를 걸어온 남자에게 설레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당연한 진리. 소개팅은 만나서 시작이라는 것. 만나기 전의 대화는 길 필요도, 아니 적당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장소와 시간만 정하면 됐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심플 이즈 더 베스트. 남자도 그걸 아는 사람 같았다. 소개팅 불문율을 벗어나지 않는 약속 장소는 나를 긴장시키지 않았다. 나는 다소 심드렁한 태도로 약속 장소에 대한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어진 문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럼 7시 15분에 만나죠.”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다니. 나는 이런 식으로 약속 시간을 정하는 한 남자를 알고 있었다.
대학 교양 수업에서였다. 졸업을 하기 위해선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영어 회화 수업이었다. 영어 무지렁이인 나는 졸업 학기 직전까지 그 수업을 피해 다녔다. 마지막 학기가 되어서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비장함과 체념을 함께 품은 채 강의실에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서로 다른 학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나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팀플을 해야 하다니. 비통한 마음으로 팀플에 대해 설명하는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이름순으로 조가 짜였고, 교수님은 잠깐 조원들끼리 이야기할 시간을 주었다.
조원은 다섯 명이었다.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단발머리와 빨간색 긴 머리는 같은 학과 친구 사이로 1학년이었고(무슨 학과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블랙 가죽 재킷은 유학생, 나머지 하나 청남방은 경영학과 3학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국문과고요. 4학년이에요.” 나까지 소개를 마치자 바로 다음 조모임 약속을 정하게 됐다.
“저희 그럼 언제 만날까요. 다들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청남방이 “잠시만요” 하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트북을 펼쳤다. 그가 펼친 노트북 화면에서 엑셀 창이 보였다. 청남방은 엑셀을 한참 살펴보더니 말했다.
“저는 목요일 세 시 십오 분 괜찮습니다. 아니면… 금요일은… 네 시 사십오 분.”
청남방은 목요일은 3시 15분부터 4시 15분까지 시간이 된다고 했고, 금요일은 4시 45분에 볼 수 있다고 했다. “죄송한데 제가 이때밖에 안 돼요.” 그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예 노트북 화면을 우리 쪽으로 돌려 엑셀 창을 보여주었다. 그는 엑셀에서 비어 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엑셀 칸은 15분 단위로 시간이 쪼개져 일주일의 시간표가 짜여 있었다.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시간 관리를 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단연코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시간은 그런 식으로 갈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엄청난 계획형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위에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없었다. 15분 단위로 엑셀에 시간표를 정리해 시간 관리를 하는 인간이라니.
다른 시간을 산다는 것은 곧 다른 세계를 산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때의 나는 나와 다른 세계의 인간에게 이유 없이 적대감을 가졌다.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당시 그는 나와 내 주위 친구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친한 친구들에게 나는 말했다. “4시 45분에 만나자니, 빌 게이츠도 그런 식으로는 약속 안 잡겠다.” 한 친구가 대답했다. “음. 빌 게이츠는 그렇게 잡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시간의 단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흥청망청 시간을 흘려보내며 망해가는 우리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니까, 그의 첫인상은 호감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보다 보니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모임을 할 때마다 그는 한 손에 꼭 책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은 보았는데 그가 들고 나타난 책은 볼 때마다 바뀌었으며 모두 만만치 않아 보이는 책들이었다. 두께 면에서나 심상치 않은 제목에서나. 중요한 건 그 책들이 각각 연관성이 너무나 없어 보이는 책들이었다는 점이다. 하루는 우주의 이해라는 제목의 두꺼운 양장본을 들고 왔다. 교양 수업을 듣나 보지. 그럴 수 있다. 하루는 골프의 역사를 들고 나타났다가, 다음 번엔 C언어 프로그래밍 첫걸음, 또 다른 날은 러시아어 배우기였다. 단순하게 교양을 많이 듣는 수준을 넘어서는 범위였고, 종횡무진 널뛰는 학문의 범위에 나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다음에는 그가 무슨 책을 들고 나타날지 궁금했다. 경계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독서였다. 일반 상식 책과 자기계발서를 들고 나타났을 때는 실망했다가도 딜타이 교육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나타났을 때는 대체 정체가 뭔가 싶었다. 천재 아니면 바보일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급기야 그가 법전을 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확신했다. 바보일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바보일 것이다. 나는 그가 몹시 궁금해졌다.
나는 그와 어렵지 않게 가까워졌다. 우선 다른 팀플 조원들이 모두 사라졌다. 1학년 단발머리와 빨간 머리는 “죄송한데 저희는 다음에 들으려고요”라며 사라졌고, 가죽 재킷 유학생은 모임 첫날 우리에케 커피를 돌리고는 호쾌하게 사라졌다. 그는 매번 자신이 쓸 수 있는 시간을 정확하게 짚어서 알려주었고, 몇 번 지나다 보니 그 방식이 내게도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만남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
“그 책들을 다 읽으시는 거예요?”
헤어지기 3분 전, 나는 물었다. 내 물음에 그는 그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전 시간을 늘리는 법을 알아요.”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사실 자신은 15분을 1시간으로 늘리는 방법을 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하며 나긋나긋했다. 대화하다 보니 나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사람들은 말하면서 강조하는 단어가 있거나 특유의 강세가 있다.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말은 흘러가는 공기 같고 부드러운 시간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외계인을 믿고 또 다른 지구를 신봉하는 나로서는 그의 말을 믿었다. 무슨 특수한 장치가 있는 걸까 상상했다.
“뭐죠. 그 시계가 특수한 시계인가요.”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은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웃었다. “아니요. 소중한 시계지만 이 시계가 그 비밀은 아니에요.”
나와 그는 대화를 좀 더 했고, 그는 자신이 정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와 헤어졌다.
나는 만날 때마다 그에게 물었다. “비밀이 대체 뭐죠.” 그러면 그는 비밀을 알려줄 듯 말을 꺼내다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3시 15분부터 4시 15분까지 우리가 만나 하기로 한 일들을 하지 않았다. “어떡해요?” 헤어질 때면 나는 그의 시간 관리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하며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다음에 또 보자고 했다. “이번 주말 3시 15분에 만날래요?”
개새끼. 후에 나와 나의 절친 정희는 그에 대해 그렇게 정의했다. 지난 남자 친구들에 대해 성토하면서였다. 정희는 그가 내게 거짓말만 늘어놓은 허풍쟁이라고 욕하며 술잔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개새끼라고 정의한 건 그래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그 비밀을 내게 알려주지 않고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제일 정신 나간 년이라며 정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4시에 그는 태엽을 감았다. 부드럽게. 나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반복되는 시간이 좋았다. “아무래도 그 시계에 뭐가 있는 거죠?” 그는 시계를 찬 팔목을 내게 내밀었다. 그가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아 우리는 시계를 같이 말없이 쳐다보았다. 초침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시계는 아버지에게서 그에게로 온 시계였다. 그는 아버지의 손목에서 멈추지 않았던 시간이 자신의 손목에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시간의 영원함이 때로 무섭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시간 따위보다 그저 내 자신이 무섭다고 대답해주었다. 그가 웃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것이 무섭지 않다고 했고,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무섭지 않았다. 딱 그런 시간만큼, 그 시간이 유지되는 만큼 우리는 만났다.
그와 있으면 다른 시간에 있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그가 좋았고, 또한 그 이유로 우리는 헤어졌다. 15분씩 외롭고, 15분씩 외롭지 않은 기분을 그로 인해 이해했다. 나는 때때로 그가 내게 알려주지 않은 시간의 비밀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들을 늘려도 보고, 줄여도 보면서. 내 멋대로 시간을 가르고 이어 붙여본다.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시간.
합정에서 보기로 한 상대에게 나는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때 봬요.
Who’s the writer?
공현진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녹'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공현진
- ILLUSTRATOR KAS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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