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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소설> (4) '회백질의 복도, 파킨슨의 속도' - 신종원
네 명의 소설가에게 시간과 시계에 관한 아주 짧은 이야기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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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장을 쓰는 동안 7.24초가 지나갔다. *
소설을 쓰면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주로 시간을 다룰 때 찾아온다. 나는 문장 한 줄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멈출 수 있고, 낱말 한 개로 침묵을 만들어낸다. 드물게 토씨 하나 비트는 일만으로 순행하던 시간의 흐름이 뒤바뀌기도 한다. 예컨대, 새벽에 새들이 찾아왔지만 지저귐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잠시 뒤,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토씨 하나만 바꾸면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이 된다. 예컨대,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설가의 손가락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 그리고 머지않아 흘러들 시간들 사이에 교각 내지는 보처럼 내리꽂히면서 끊임없이 시간에 간섭한다. 물론 우리 손은 일찍이 물갈퀴를 잃고 섬세하게 펼쳐진 다섯 개의 부속지로 나누어졌기에, 아무리 재빠르고 정교하게 자판을 두드려도 물길 같은 시간을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다. 결국 허락된 시간은 잠시뿐이다. 가지 말라고 하면 시간은 가지 않을 것이다. 잠시라도.
* 이 문단을 쓰는 동안 31분 26초가 지나갔다. *
새벽에 새들이 찾아왔지만 지저귐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잠시 뒤,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 이 문장들을 쓰는 동안 1분 9초가 지나갔다. *
나는 현재형 시제로 쓰는 편을 선호한다. 할머니는 파킨슨을 앓고 있다. 알츠하이머와 함께 노화된 두뇌의 대표적인 최후로 손꼽히는 이 퇴행성 신경 질환은 숙주의 흑색질 속 뉴런들을 파먹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증상은 가파르게 악화되어, 처음에는 겨우 손 떨림이나 쥐 놀음 수준에 머물렀던 병마는 급기야 밤중에 잠을 깨우고 배꼽이 접히도록 척추를 구부러뜨리더니, 나중에는 숫제 표정마저 빼앗아버리기에 이른다. 증상이 가장 심했던 한 달간, 그녀는 거실 전등을 종일 끄지 못하게 한다. (특히 밤에.) 그리고 내가 막냇삼촌의 방문을 닫고 자지 못하게 한다. 거의 매일 새벽 한두 시에, 그리고 네다섯 시에 한 번씩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른다. 보통은 종원아, 종원아 하고 시름시름 앓으며 부르지만, 깊게 잠들어 잠귀가 어두운 날이면 살려달라고 고함치는 소리를 듣는다. 헐레벌떡 일어나 안방에 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일단 그녀를 깨우는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좀처럼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납게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잠을 깨우고 나면 청심환을 먹여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고 차츰 평균 심박수를 되찾는다. 오한으로 벌벌 떠는 몸을 좀 덥혀주려고 이불을 들출 때마다 후끈한 열기가 안쪽에서 배어 나온다. 방금까지 지옥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다시 잠들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보통 십 분에서 이십 분 정도. 옆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녀는 후들후들 입술을 떨며 혼자 두지 말라고 중얼거린다. 그 말은 간곡하고 부드럽게 부탁하는 어조가 아니라 꾸짖고 고집부리는 어조로 연거푸 발음되어서, 슬프다기보다 무서운 감정을, 사랑에 앞서 동요를 느끼도록 부추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를 움츠린 채 그녀의 손을 붙잡고 어둠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린다. 동이 트고 안개가 걷히면, 간밤의 이슬로 갈증을 달랜 명금류 새들이 창가로 날아와 낟알의 침묵을 물고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좀처럼 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거실 불빛을 받아 비스듬히 반들거리는 안방 문틈 뒤 알루미늄 경첩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 조그만 쇳조각의 체결부를 구성하는 눈금들이 인공 전등이 아니라 아침 햇볕을 쬐어 한 칸씩 빨갛게 물들기만을. 그러는 동안에도 불 꺼진 방 안에는 혼란과 흥분을 삭이느라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이 든 여자는 아주 먼 과거의 한순간처럼 작은 실수에도 다치거나 긁힐까 봐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내 손을 잡지 않는다. 거꾸로 뚝뚝 부러뜨리거나 숫제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큼 위협적이고 무례한 악력으로 내 손을 끌어당기고는 잠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새벽에 새들이 찾아온다. 지저귐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뒤, 할머니는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는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물결처럼, 불길처럼.
* 이 문단을 쓰는 동안 1시간 25분 2초가 지나갔다. *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시간은 가지 않을 것이다.
* 이 문장을 쓰는 동안 26.5초가 지나갔다. *
할머니 집에 머물렀던 마지막 주 수요일, 그녀는 나에게 몇 가지 패물을 넘겨준다. 목걸이, 팔찌, 반지 같은 것들. 안쪽에서 부딪히며 서로 흠집 내지 않도록 비단 보자기 속에서 저마다 폴리에틸렌 박지를 입고 있는 이 장신구들은 모두 순금으로 주조되었고, 넘겨받을 때 실제로 금속의 묵직한 무게가 느껴져 양쪽 손목이 아래로 꺾인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십수 년간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을 이 보물들은 주둥이가 묶인 직물 밑에서 세월만큼이나 무거운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건네는 할머니의 손은 불후의 발견으로 양껏 고양된 고고학자나 박물학자의 손처럼 달달 떨려서, 어쩌면 나의 조심성 없는 손동작 때문에 그 많은 비밀이 재빨리 사라져버릴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든다. 1876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미케네 왕릉에 매장되었던 황금 가면을 들어 올렸을 때, 그것을 쓰고 있던 왕의 얼굴 살점이 가면의 금속에서 떨어져 나와 순식간에 먼지로 부서져 내렸던 것처럼. 다행히 15년은 어떤 비밀이 먼지로 돌아가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 시간인지, 그 모든 금붙이는 조부모의 손을 떠나 내 손으로 옮겨 오며 나름의 미진한 역사를 누설하기 시작한다. 패물 가운데는 할머니 본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남긴 것도 있고, 그들의 다른 가족이 남긴 것도 있다. 장신구 하나하나에 빠짐없이 사연이 깃들어 있어, 할머니는 그것들이 정오의 햇빛 아래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혀를 차며 시간을 되돌린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두드릴 때 튀어나오는 소리는 좀 더 빠른 간격으로 가속된 초침처럼 조급하게 똑딱거리며,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정지해 있던 사물과 공간, 사람을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도 있다. 노환으로 경련을 멈추지 못하는 손가락들이 마침내 어떤 금붙이를 끄집어냈을 때,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아주 작은 난쟁이 요정들의 끌과 망치로 연마된 선물 같은 그것이 한때 내 소유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돌반지 : 엄마가 여기저기 빚을 내고 다녔기에 할머니가 몰래 보관해 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기 때나 한번 껴보았을 그 반지를 손끝에 올려놓는다. 가만히 무게를 가늠해보는 시간. 부끄러움, 슬픔, 경이로움, 그리움과 같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동시에 섞여 들며 목구멍을 틀어막는 하나의 거대한 침강물처럼 감각된다. 그 반지 구멍 안으로 둘레가 아주 작은 손가락 하나를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직 아기였던 시절의 사진을 수백 장 넘게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경험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작았고, 나는 이렇게 자랐다. 아기와 내가 이 가느다란 구멍으로 이어져 있다. 돌아갈 수 없겠지만. 할머니가 반지를 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감각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반지를 포함해 잊어버린 기억들의 외장 디스크나 다름없는 이 보물들을 손수 내맡기는 것은 곧바로 어떤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초침은 움직인다. 잠시 되돌렸던 시간은 우리가 입을 다물자마자 즉시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다. 똑딱똑딱. 표정 없는 노년의 여자가 혀 차는 일을 그만둔다.
* 이 문단을 쓰는 동안 1시간 11분 18초가 지나갔다. *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몇 주 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인 자정 이후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섬망에 휩싸인 채 어두운 터널 같은 자기 머릿속의 복도를 헤매는 할머니를 상상하며, 재빨리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물으면 건너편 여자도 여보세요? 묻는다. 할머니? 물으면 건너편 여자는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왜 네 할머니야, 고함친다. 나이 든 여자는 단지 전화가 걸려와서 도로 걸었을 뿐, 당신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일이 이후에도 반복된다. 자주 만나지 않는 나의 가족들과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에게 비난받을 각오로 쓴다. 나는 늦은 밤과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고 꾸짖는 한밤중 전화 속 목소리에 맞서, 수십 년의 시간을 더듬어 설명하는 일이 언제부턴가 너무나도 무섭기 때문이다. 지치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 이따금 날카로운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너무나도 구역질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내 옆에 있어주지 않았던가? 그녀가 나보다 강했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 그녀의 희생과 나의 희생이 다르지 않을 텐데. 그녀는 어떻게 이 모든 희생을 감내할 수 있었던 걸까. 이것이야말로 사랑이다. 그 사랑을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이런 대가조차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밤낮으로 절망감을 준다. 사랑에서 나는 그녀보다 한참이나 그릇이 작고, 바로 그런 까닭에 그녀가 죽는 순간에도 배려를 받는 쪽은 여전히 내 쪽일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남자가 혀를 차며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린다. 똑딱똑딱. 나는 현재형 시제로 쓰는 편을 선호한다.
* 이 문단을 쓰는 동안 53분 41초가 지나갔다. *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시간은 가지 않을 것이다.
* 이 문장을 쓰는 동안 9.06초가 지나갔다. *
그녀가 가지 말라고 하면 나는 가지 않을 것인가?
* 이 문장을 쓰는 동안 7.30초가 지나갔다. *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그녀는 가지 않을까?
* 이 문장을 쓰는 동안 8.96초가 지나갔다. *
이런 문장들로나마 붙잡아둘 수 있다면.
잠시라도.
* 이 문장을 쓰는 동안 17.63초가 지나간다. *
Who’s the writer?
신종원은 ‘전자 시대의 아리아’로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전자 시대의 아리아>, <습지 장례법> 등이 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신종원
- ILLUSTRATOR KASIQ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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