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CH

<시간 소설> (3) '스페이스타임머신워치' - 김중혁

네 명의 소설가에게 시간과 시계에 관한 아주 짧은 이야기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3.10.08
 
시계를 주운 곳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볼로냐를 지났을 때쯤 화장실에 들렀는데 세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 슬쩍 봐도 고가의 시계란 걸 알 수 있었다. 시계에 대한 소설을 쓴 적이 있고, 스위스의 시계 장인 인터뷰를 많이 봤기 때문에 어떤 시계가 값이 나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세 가지 선택 사항이 있었다. 첫째,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 온다. 둘째, 승무원에게 전해준다. 셋째, 하늘이 준 선물이라 믿고 내가 가져간다.
변명은 아니지만 당시의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당시 나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기차 여행에 대한 글을 쓰러 왔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며칠을 낭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나의 캐리어가 공항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로마의 다빈치 공항에서 항공사 직원들에게 캐리어가 사라졌다는 걸 설명하느라 체력의 절반을 소진했고, 저녁에 급하게 먹은 피자가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바람에 남은 절반의 체력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예약된 기차 일정 때문에 서둘러 밀라노로 향했고, 사흘이 지나도록 캐리어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밀라노를 한 바퀴 둘러보고 피렌체로 가는 기차에서 시계를 발견한 것이다. 세 가지 선택에는 각각의 문제가 있었다. 있던 자리에 놓아두려고 했지만, 시계에 문제가 있었다. 시계는 잘못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착용하던 시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승무원에게 전해주는 것 역시 꺼림칙했다. 이미 로마 공항에서 직원과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승무원이 시계 주인을 찾아내리라는 믿음이 없었다.
시계를 꿀꺽 삼키기로 마음먹었다. 캐리어와 맞바꾼 시계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 추측이 맞았다. 내 캐리어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보험금을 몇 푼 받긴 했지만 그 속에는 내가 아끼던 잠옷이 있었고, 내 발에 꼭 맞게 길들여 놓은 실내화가 있었고, 이탈리아의 멋쟁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옷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계는 나의 추가보험금이라 생각했다.
시계는 쇼파드의 L.U.C.타임 트래블러 원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쇼파드의 시계 한가운데 있는 로고만 없었다. 다이얼의 배치와 크기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시계 테두리에 있는 타임존이 거의 똑같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도시의 이름들. 덴버, 뉴욕, 베이징, 카이로, 런던, 다카…. 차이가 있다면 쇼파드에 없는 도시 이름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서울. ‘이건 분명히 하늘에서 나를 위해 던져준 선물이 틀림없어. 이탈리아의 기차에서 한국 사람이 주울 걸 어떻게 알고 이런 시계를 줬겠어.’
처음에는 시계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시계는 아무리 다이얼을 감아도 움직이지 않았다. 보통 ‘시계에 밥을 준다’고 표현하는데, 그 말대로라면 나는 프렌치 정찬에 버금갈 정도로 정성을 다해 시계에 밥을 주었다. 섬세하게 돌리고, 천천히 돌리고, 손을 깨끗이 닦고 돌렸다. 시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이얼을 뽑아서 돌려도 보고 누른 채로 돌려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시계 아래쪽에 작은 표시가 있는 것을 보았다. ‘J’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바늘도 겨우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V 잡지사의 편집장 구지운은 시계 전문가로 소문이 나 있었고, 내가 쓰고 있던 이탈리아 스위스 기차 여행글의 담당자이기도 하다. 고가의 시계를 기차에서 주웠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자문을 구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인터넷에서 온갖 매뉴얼을 다 뒤져보았지만 쇼파드를 닮은 시계에 ‘J’라는 이니셜이 박혀 있는 시계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저도 이런 건 처음 보네요. 어디서 구한 거예요?”
“아는 사람이 선물로 준 거예요.”
“와, 누구예요? 그냥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이런 걸 선물로 줘요? 저도 그 사람 소개 좀 해줘요.”
“소개요?”
“아, 작가님, 농담이에요. 농담. 왜 이렇게 긴장하셨어요? 마감 때문에 그래요?”
“마감…, 맞아 마감이 있죠. 곧 끝낼게요.”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작가님은. 한 번도 마감 늦은 적 없잖아요. 근데 이 시계 이상한 데가 있네요. 쇼파드랑 디자인은 비슷한데, 타임존에 서울이 있는 걸 보면 쇼파드는 분명 아니고, 독립 제작자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특징이 없고. 한국에서 만든 짝퉁일까요?”
“이탈리아 사람한테 선물로 받았다니까요.”
“흠, 이상하네. 시간을 일부러 8시 20분에 맞춘 거예요?”
“네? 8시 20분?”
“그거 아시죠? 1950년대는 시계 광고 사진이 8시 20분이었다는 거. 요즘은 전부 10시 10분이잖아요.”
“몰랐어요.”
“엇, 몰랐어요? 타이맥스는 10시 9분 36초, 롤렉스는 10시 10분 31초, 태그호이어는 10시 10분 37초, 애플워치는 10시 9분 30초.”
“그걸 어떻게 알아요? 대단하시네, 편집장님.”
“대단하긴요. 시계 기초 상식이죠. 만져봐도 돼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구지운은 시계에 손을 뻗었다. 말릴 새도 없었다. 그는 다이얼을 뽑더니 시계의 시간을 맞춰보려고 애썼지만, 시침과 분침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다 해봤다. 구지운은 뭔가 더 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 표정이 어두운 걸 알고는 시계에서 손을 뗐다.
“J라는 이니셜이 있는 모델이라…, 처음 들어봐요. 뭔가의 약자일까요? 아니면 맞춤 시계로 제작된 건가? 그렇다면 사람의 이니셜인가?”
“편집장님이 모르는 시계라면 마이너 독립 제작자가 만든 게 분명하겠네요.”
“여기 작은 홈이 있는 거 보셨죠? 어쩌면 리셋 버튼인지도 몰라요. 핀으로 한번 찔러볼까요?”
“그 생각은 못 했네요. 명품 시계 수리하는 데 가져가서 한번 해볼게요.”
 
나는 시계를 들고 서둘러 잡지사를 나왔다. 8시 20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이 시계는 만들어지고 나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형 시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침과 분침이 이렇게 꿈쩍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계 수리점이 아니라 집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휴대폰의 유심을 분리하는 핀으로 시계 아래쪽에 있는 홈을 눌러보았다. 놀라운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시계에서 엄청난 양의 빛이 퍼져 나왔고, 주변의 모든 것이 빛 속으로 숨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수개월 만에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나는 빛에 포위당했고, 눈을 뜰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새로운 곳에 도달해 있었다. 내 방 책상 앞이 아닌, 커다란 도서관의 책상 앞이었다. 시계는 여전히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앉아 있던 곳은 런던의 핌리코 도서관이었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이유는 도서관이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계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이렇다. 내가 기차에서 주운 시계는 공간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기계다. 나는 ‘스페이스타임머신워치(Spacetimemachinewatch)’라고 부른다. 시계 아래쪽에 있는 J 표시에 가고 싶은 도시의 타임존을 맞춘 다음, 핀으로 홈을 누르면 그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시간을 맞추면 공간 이동이 되는 셈이다. J는 아마 ‘jump’의 약자인 것 같다. 구체적인 장소는 정할 수 없다. 스페이스타임머신워치가 이끄는 대로 가야 한다. 대체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걸 보면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 같다. 타임존에 있는 24군데 도시에 모두 다녀와 봤고, 내가 좋아하는 시드니에는 10번쯤 다녀왔는데 갈 때마다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 하나는, ‘어째서 서울이 적혀 있었는가’다. 내가 그걸 발견할 것을 시계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지금 첫 공간 여행의 도착지였던 런던에 와 있다.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기차 화장실에다 시계를 놓아둘 생각이다. 이처럼 신기한 시계를 왜 가지려 하지 않는지 궁금할 것이다. 세계 여행을 마음껏 다닐 수 있고, 비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입국 수속도 필요 없는 특권을 왜 버리려고 하는지. 나는 지금까지 스페이스타임머신워치를 49번 쓰면서, 사용할 때마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걸 느꼈다. 공간을 이동하는 데 드는 시간을 단축해주지만, 에너지는 똑같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럴 거면, 아무리 이코노미 좌석이 비좁더라도 거기에서 시간을 보내며 뭔가 경험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녀를 다른 나라에 유학 보낸 사람이라면 이 시계를 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에게 선물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런 물건은 원래 멀리 두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 주었다가는 어떤 원망을 듣게 될지 모른다. 원래의 방식대로 시계를 돌려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다 시계를 놓아두고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위에 시계를 두었으니 눈에 잘 띌 것이다. 좌석에 앉아서 화장실에 들어가는 사람을 살폈다. 10분쯤 후에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남자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주변 복도를 살폈다. 시계 주인을 찾는 것인지, 아무도 없길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나는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 남자를 몰래 보았다. 남자는 불안해했다. 나도 저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시계가 뜻밖의 행운인지, 윤리적인 시험인지, 불행의 시작인지 알 길이 없어 막막한 얼굴이었다. 나는 남자의 미래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브라보’를 속삭여주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짐을 들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앞에 그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아직 기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계를 착용한 걸 보면 앞뒤 가리지 않는, 성급한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다가와서 ‘그거 혹시 세면대에서 주운 시계인가요?’라고 물어볼까 봐 나는 기차에서 내릴 때까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지 못했다. 남자는 다이얼을 돌리려 애쓰기도 하고 시계에 귀를 대보기도 했다. 그 순간, 시계와 눈이 마주쳤다. 시계의 타임존에서 서울을 찾을 수 없었다. 서울 대신 토론토가 적혀 있었다. 장난기가 갑자기 마음을 뚫고 입으로 튀어나왔다. 기차에서 내리려는 그에게 물었다.
 
“Are you from Canada?”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내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Who’s the writer?
김중혁은 2000년 <문학과사회> 중편소설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엇박자 D’로 김유정문학상을, ‘1F/B1’으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요요’로 이효석문학상을, ‘가짜 팔로 하는 포옹’으로 동인문학상을, ‘휴가 중인 시체’로 심훈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중혁
  • ILLUSTRATOR KASIQ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