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Part 1. 뉴 네임, 영 보이스

패션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 젊은 패기로 거대 패션 하우스 사이에서 조금씩 선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브랜드들이 있다. 패션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생소한, 하지만 앞으로 더 자주 듣게 될, 그래서 지금 기억해두고 싶은 이름 스무 개를 골랐다.

프로필 by ESQUIRE 2023.11.11
 

HARRI

▶ 2023 브릿 어워즈에서 샘 스미스가 입고 나온 옷은 가히 충격이라고 할 만했다. 어깨와 다리의 과장된 실루엣, 풍선처럼 극대화된 볼륨감. 바로 해리의 블랙 라텍스 슈트였다. 이 옷은 요란하고 화려한 의상으로 넘쳐나는 시상식에서도 단연 돋보였고 SNS상에서 빠르게 퍼지며 화제가 되었다. 새로운 럭셔리 맨즈웨어 레이블을 표방하는 해리는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을 졸업한 인도 출신의 디자이너 해리크리슈난(Harikrishnan)이 2021년 설립한 브랜드다. 조각과 공예, 물질성과 장인정신을 패션이라는 매개로 통합하는데, 여기에 디자이너 특유의 실험정신과 유머가 결합되면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코스튬처럼 보이는 이 옷들이 단지 콘셉트 피스가 아니라 실제로 판매된다는 점. 독특한 실루엣의 제품은 대부분 메이드투오더로 제작하지만, 좀 더 커머셜한 제품들도 있다.
 

LUIS DE JAVIER

▶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가레스 퓨에서 경력을 쌓은 루이스 데 하비에르는 2020년 런던 패션위크를 통해 데뷔했다. 어깨를 한껏 과장한 코르셋 재킷,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볼륨감 있는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고 런웨이에 선 남자 모델들, 그리고 피날레에서 족히 20cm는 될 법한 플랫폼 힐을 신고 인사하는 디자이너. 섹시하고 파격적인 루이스 데 하비에르의 컬렉션은 공개와 동시에 뜨겁게 주목받았다. 이후 한동안은 비욘세, 카디 비 등 여성 래퍼들의 커스텀 피스 제작에 집중했으나 작년 셀프리지와의 협업으로 다시 저력을 증명했고, 올해 초엔 뉴욕 컬렉션으로 자신의 색깔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냈다. 라텍스의 슬릭한 라인과 과감한 실루엣, 치밀하게 계산된 스타일링까지. 퀴어와 레이빙 문화에 근간을 둔 루이스 데 하비에르는 언더그라운드 신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물여섯, 이 젊은 디자이너의 옷에는 스페인의 뜨거운 열정과 런던의 위트, 뉴욕의 밤 문화가 뒤섞여 있다. 그의 옷 앞에서 성별이나 국가, 나이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MERYLL ROGGE

▶ 신선하면서도 낭만적인 옷을 만드는 메릴 로게는 법학 학위를 보유한 패션 디자이너다. 부모님의 반대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패션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 앤트워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패션 디자인을 익힌 그녀는 2008년부터 마크 제이콥스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드리스 반 노튼의 여성 컬렉션 수석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고향인 벨기에 겐트로 돌아와 자신의 레이블을 만들었다. 해체적인 테일러링, 자유자재로 조합한 패턴, 경쾌하고 다채로운 컬러, 성별을 가리지 않는 디테일과 스타일링…. 메릴 로게는 그간 소중하게 품어온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쳐 보이며 브랜드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 결과 2022년엔 LVMH 프라이즈 준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조금 돌아왔지만 결국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패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굳은 심지가, 어떤 것으로도 얽맬 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이 메릴 로게의 옷에서 느껴진다.
 

SETCHU

▶ 셋추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여성복을 전공하고 새빌 로와 지방시에서 경력을 쌓은 사토시 구와타(Satoshi Kuwata)가 2020년 설립했다. 브랜드 이름은 일본식과 서양식의 절충을 뜻하는 ‘와요셋추(和洋折衷)’에서 따온 것인데 1층은 일본식 찻집,  2층은 서양식으로 지은 세이비엔(Seibien)을 보고 다른 문화를 한데 조화롭게 아우르는 옷을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셋추의 옷에는 교토, 파리, 밀라노, 뉴욕 등 여러 도시의 정서가 모두 담겨 있다. 또 섬세한 패턴 메이킹과 안정적인 실루엣, 품격 있는 소재, 끈이나 단추로 해체되거나 재조립할 수 있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이를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올해 LVMH 프라이즈에서 만장일치로 우승을 거머쥔 이후, 이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더 늘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뉴 페이스 브랜드로 주목받고 있는 중.
 

SCRY

▶ 2020년 쯔슝웨이(Zixiong Wei)가 설립한 스크라이의 모토는 ‘미래를 위한 한 걸음’. 짐작할 수 있듯 미래지향적 디자인을 추구하는 슈즈 브랜드다. 아니, 어쩌면 미래지향이라는 수식으론 부족할지도 모른다.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진짜 이런 신발을 신는 사람이 있어?’ 할 법한 이미지가 넘쳐나기 때문에. 스크라이는 우주, 심해 생물, 미지의 문명 등에서 영감을 받은 셰이프와 디테일이 특징이다. 신발은 3D 프린터 출력으로 제작하는데, 대표작인 AIGEN-1은 AI 제작 워크플로 프로세스로 스케치부터 생산까지 모두 자동화되어 있다. 스크라이는 이미 실물로 구현된 피지컬 라인과 가상으로 만든 버추얼 라인으로 나뉜다. 버추얼 라인은 쉽게 말해 프로토타입으로, 9999.99달러를 지불하면 커스터마이징을 해주는 시스템. 반면 피지컬 라인은 바로 제작이 가능하며 일반적인 신발처럼 자신의 발 사이즈에 맞춰 선택할 수 있다. 산쿠안즈, 엘리엇 에밀, 안나키키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고 있을 만큼 패션 신은 이 브랜드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GERRIT JACOB

▶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졸업 후 마틴 로즈, 발렌시아가, 이지, 구찌에서 경력을 쌓은 게릿 제이콥은 202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는 유년 시절을 보낸 독일 함부르크와 베를린의 스트리트 문화를 하이패션과 결합시키고 에어브러싱 일러스트를 시그너처로 내세웠다. 품이 넉넉한 가죽 재킷이나 데님 셋업 위에 에어브러시 드로잉으로 바탕을 만들고 디지털 프린팅과 실크스크린으로 세부를 보완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하이패션’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스트리트’적인 작업. 서로 다른 언어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폭발적인 이미지는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이다. 게릿 제이콥은 빠르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불과 론칭 1년 만에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에센스와 연달아 협업했고, 두아 리파, 로살리아, 에이셉 라키 등 수많은 셀럽의 커스텀 피스를 제작했다. 패션위크나 인큐베이팅 시스템에 속한 적 없는 디자이너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Credit

  • EDITOR 윤웅희/김유진/성하영/이다은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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