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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만난 악인들에 대처하는 법
사회에서 만난 악인들에 대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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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고민했다. 선과 악이 상대적인 개념이라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악인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윤리적 고민에 휩싸여 청탁을 거절할까 했으나 받아들인 이유가 있다. 이 글을 청탁한 에디터는 오래전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이자 후배다. 그가 나에게 ‘악인들을 대하는 법’에 대한 글을 부탁했다면, 적어도 나는 이 글을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지경의 악인까지는 아니라는 의미다. 내 인생을 돌아봐도 나는 아주 소소한 악인이었던 순간은 있으나 주목할 만한 악행을 저지른 일은 없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소셜미디어에서 상당히 재주가 좋은 싸움꾼이었다.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일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거야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역시 자신도 모르게 매일 저지르고 있는 일일 테니 서로 용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사실 이 글을 쓰는 데 한 가지 더 큰 결격 사유가 있기는 하다. 나는 비교적 평범하고 평탄한 인생을 걸어온 터라 압도적인 악인을 만난 적은 없다. 인생을 걸고 복수하고 싶은 악인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인생을 걸고 복수하고 싶은 악인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박찬욱 영화가 아니다. 우리는 오대수가 아니다. 금자 씨도 아니다. 다만 홍상수 영화일 수는 있다. 마이크로하게 어그레시브한 인물로 가득한 부조리한 흑백의 홍상수 영화 말이다. 그 세계 속에서 악인이 악인이 되는 이유는 욕망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술자리에 합석한 여자를 어떻게든 넘어뜨려 보겠다고 기를 쓰고 소주를 부어대는 하찮은 남성적 욕망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미투 운동’ 시대 이후 그런 악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요즘 홍상수 영화에는 그런 악인들이 나오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최근 홍상수 영화를 보지 않은 탓에 모르는 것이다. 이건 영화 칼럼은 아니니 홍상수 영화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어떤 욕망이 현실의 악인을 만드는가. 내가 보기에 평범한 사람을 가장 비뚤어진 악인으로 만드는 욕망은 인정 욕구다. 인정 욕구라는 단어를 쓰자마자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악인들이 몇 있다. 여러분에게도 아마 있을 것이다. 인정 욕구란 무서운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희미한 추측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은 어둠의 구렁텅이로 스스로의 마음을 집어넣는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당신을 존경한다며 따라다니던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을 것이다. 대화를 할 때마다 공통점을 찾아내려 노력했을 것이다. 당신이 해낸 일을 칭찬하며 다소 낯간지러운 문자를 보내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그 거침없는 호의에 호응하거나, 혹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리하거나. 당신은 알고 있다. 거침없는 호의는 조금만 삐끗하면 순식간에 적의로 바뀐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람은 당신의 후배일 수도 있고, 심지어 직장 상사일 수도 있다. 인정 욕구는 항상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서 위로도 흐른다. 모든 영역에서 이미 존중받을 만한 성공을 이루어낸 당신의 상사도 당신에게 인정받기를 바랄 수 있다. 아니, 실은 대부분의 상사가 말은 하지 않지만 직원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중 많은 상사는 인정 욕구의 함정에 넘어가 아부꾼들의 현란한 거미줄에 스스로를 옭아매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당신이 그런 상사와 같은 영역에서 좋은 기량을 발휘하면서도 입에 발린 소리는 도무지 못 하는 성격이라면? 행운을 빈다. 아니다. 무운을 빈다. 아니다. 뭐라도 빈다. 그들은 당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뭔가에 삐진 열 살짜리 꼬맹이처럼 당신을 공격할 것이다. 친구들이 가득 찬 복도에서 당신의 빤스를 내리는 짓을 저지를 것이다.
거침없는 호의가 적의로 바뀌는 순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가 당신을 아는 만큼 당신은 그를 모르기 때문이다. 호의는 지나치면 스토킹이다. 적의도 지나치면 스토킹이 된다. 당신은 호의로 가득한 스토킹을 참아내면서 그것이 적의의 스토킹으로 바뀌지 않도록 통제했어야 한다. 말이 쉽지, 그런 일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싫은 사람 계속 보고 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인간관계의 달인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여전히 30대라면 40대와 50대의 당신이 인간관계에서 더욱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40대와 40대 중간에 서 있는 내가 조언하자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심지어 노년이 되어도 지금 저지르는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다. 인생의 처참한 진실을 지나치게 빨리 알게 된 당신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왕 실망할 거라면 미리 실망하는 게 낫다.
그렇다면 적의를 갖고 당신에게 돌진하는 악인에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슬기로운 대처는 불가능하다. 맙소사. 내가 지금까지 ‘불가능하다’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썼는지 모르겠다. 어쩌겠는가.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이다. 당신은 전사가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악인과 정면으로 맞다이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맞다이는 멋있다. 멋있는 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기억하라. 그는 당신에게는 악인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인이 아닐 가능성도 크다. 모두에게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선한 당신이 악인을 이길 가능성을 점쳐본 후 높은 확률로 악인의 편에 설 것이다. 모두가 당신 편을 들어주는 일은 잘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은 방관자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맞다이로 그의 명을 끊어놓을 수는 있다. 대신 당신도 수혈이 필요할 정도로 피를 흘려야만 한다. 그 정도 피는 흘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의 용기와 호기를 지지하겠다. 나는 그러지 못한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대신 내가 선택한 건 차단이다.
인간관계가 무슨 페이스북이냐고? 차단 버튼을 누르면 갑자기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완벽하게 증발하는 거냐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시라. 당신이 페이스북에서 차단한 인물이 자신의 타임라인이나 남의 댓글 창에서 여전히 당신에게 적의를 표현하더라도 당신은 더는 알 방법이 없다. 모르면 장땡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당신에게 차단당한 당신의 친애하는 악인은 끊임없이 당신을 괴롭힐 아주 미묘한 방법들을 밤이고 낮이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에 대한 적의를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오래전에 인생에서 차단한 악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누가 나를 몰래 욕해도 그게 누군지 꼭 알아내야겠어.”
아마 그는 지금도 내가 그를 어디선가에서 비난하고 살아간다는 생각에 가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에 대해 정말이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그가 여전히 매일, 혹은 매주 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꽤 만족스럽다. 맙소사.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악인에게는 나야말로 진정한 악인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 결국 나는 이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어쩌겠는가. 이미 청탁받은 원고는 물릴 수가 없다. 혹여나 이 글에 등장하는 악인이 당신이라고 생각된다면 그냥 잠자코 계시길 부탁드린다.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펀치를 한 대씩 주고받았으니 이제 됐다고 생각하고 더는 삐지지 말자. 이 말이 누군가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문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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