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에이리언은 죽었어야 한다_김도훈

영화 평론가 김도훈이 말하는 <에이리언 : 로물루스>.

프로필 by 박세회 2024.10.05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에이리언 : 로물루스>를 꽤 재미있게 봤을지도 모른다.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 커버넌트>(2017)를 보고 실망했던 시리즈에 대한 팬심이 부활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조금 늦게 봤다. 오랜 팬들의 환호성을 소셜미디어로 보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할리우드가 어떻게든 재생하려 갖은 애를 썼던 SF영화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가 이제야 제대로 부활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지나친 기대는 슬픈 법이다.
아니다. 나는 <에이리언 : 로물루스>가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맨 인 더 다크>(2016)의 페데 알바레스 감독은 좋은 호러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에서 손을 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는 아직도 지난해 <나폴레옹>이 내 심장에 안겨준 고통스러운 실망감으로부터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잘 못하는 장르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호러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나이 든 사람들은 무엇이 젊은 관객을 무섭게 만드는지 잘 모른다.
내가 <에이리언 : 로물루스>에 가진 불만은 J.J. 에이브럼스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가졌던 불만과 동일하다. 자, <에이리언> 시리즈를 되살리기 위해 제작진이 선택한 것은 오리지널로 돌아가는 것이다. 1979년 이후 모든 리들리 스콧 커리어의 바탕이 되었던 <에이리언>, 1986년 제임스 캐머런의 경력이 불타오르도록 기름을 부은 <에이리언 2>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거장이 된 데이비드 핀처의 <에이리언 3>(1992)와 장 피에르 주네의 <에이리언 4>(1997)는 시리즈에 때 이른 사망 선고를 내렸다.
그 두 작품의 문제는 어떻게든 전작의 성공을 이어나가기 위해 억지로 창조한 이야기였다. 3편은 2편에서 주인공 리플리와 고군분투하며 겨우 살아남은 소녀 뉴트와 힉스 상병을 죽이면서 시작한다. 전편에서 관객에게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들을 죽여버리고 기껏 내놓은 것이 우주 감옥을 무대로 한 바로크적 윤리극이라니. 아무리 데이비드 핀처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편은 리플리를 살리기 위해 유전공학을 들이민다. 자, 이쯤에서 당신은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리고 싶으면 대체 왜 죽였단 말인가. 20세기폭스는 이미 3편에서 리플리의 죽음으로 시리즈를 끝내놓고서는 혹여나 돈을 더 벌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그를 되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관객을 납득시킬 법한 이야기가 나올 리 만무하다. 할리우드의 돈에 대한 욕망은 질기고 질겨서 시리즈가 완전히 아작 나기 전까지는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리고 20세기폭스는 2004년과 2007년 ‘오로지 돈 때문에’ 만든 두 편의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시리즈로 완벽하게 이 시리즈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에이리언은 그때 이미 죽었다.
그걸 되살린 건 사실 1편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다. 그는 1편에서 잠깐 지나간 딱 한 장면으로부터 이 시리즈를 새롭게 부활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1편에서 조난 신호를 받은 노스트로모 승무원들이 외계인의 우주선으로 들어갔다가 죽은 외계인 우주비행사의 시체 ‘스페이스 자키’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사실 그 장면은 영화 속에서 나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장면이 들어감으로써 <에이리언>은 그저 인간과 외계 생물이 싸우는 호러영화 이상의 어떤 ‘결’과 ‘층’을 만들어낸다. 리들리 스콧은 스페이스 자키 장면을 관객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일종의 미스터리로 남겨뒀다. 관객은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영화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된다. 대체 그 거대한 시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존재일까? 에이리언은 그들이 키우던 생체병기일까? 아니면 그들도 에이리언의 침략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사실 20세기폭스는 1편에 들어간 이 스페이스 자키 장면을 싫어했다. 별 의미도 없는데 지나치게 돈이 든다는 이유였다. 1979년은 CG가 없던 시절이다. 그 한 장면을 위해 거대한 세트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리들리 스콧은 제작사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 장면을 넣었다. 영화의 코스믹 호러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선택은 옳았다. 그 장면 하나로 에이리언은 영화를 본 사람들을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팬’이 되도록 만들었다.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는 우주적 서사의 미스터리를 팬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채우게 된 것이다. 사실 많은 위대한 영화가 그러하다. 이를테면 <에이리언>과 함께 SF영화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칭송받는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를 생각해보시라. 영화는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리플리컨트(인간이 제조한 안드로이드)일지 모른다는 함의를 여기저기 흩뿌려 놓고 어떤 것도 확실히 설명하지 않는다. 팬들은 수많은 인터넷 포럼에서 영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블레이드 러너>는 적극적인 팬베이스를 지닌 영원불멸의 걸작이 됐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말라. 팬들이 알아서 상상하게 내버려두라. 컬트 영화의 기본적인 법칙이다.
자, 나는 이제 시작될 문단에서 리들리 스콧을 다시 한번 비판할 참이다. 아니다. 나는 리들리 스콧을 사랑한다. 다만 누구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만큼 머리와 가슴이 사랑으로 가득한 인간은 아니다. 리들리 스콧이 지난 10년간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프로메테우스>(2012)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2017)다. 문제는 리들리 스콧이 <에이리언>의 스페이스 자키 장면으로 팬들에게 남겼던 미스터리의 답을 명확하게 내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는 스페이스 자키가 실은 인류를 창조한 ‘프로메테우스’였다고 주장한다. 그 순간 우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에이리언> 1편을 보며 느꼈던,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어 더 무시무시한 코스믹 호러의 미스터리는 증발했다. 휘발됐다. 지금 현재 1980년대 리들리 스콧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드니 빌뇌브가 만든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도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데커드의 존재를 인간으로 확정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블레이드 러너>의 모호한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이젠 누구도 <블레이드 러너>를 보며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인지 아닌지 자신만의 해석을 내릴 이유와 여유가 없다. 그것이 그 영화에 대한 오랜 팬들의 가장 열광적이고 열정적인 매력 지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세기폭스가 <에이리언 : 로물루스>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일단 무시하고 오리지널인 <에이리언>과 <에이리언 2> 사이의 타임라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건 나름의 좋은 선택이었다. 아니다. 좋은 선택이라는 표현은 좀 잘못됐다. 그건 좋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오리지널 2편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흥행 성적을 올린 작품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한다. <에이리언 : 로물루스>는 내가 ‘레트로 리메이크’라 이름 붙인 어떤 경향에 귀속되는 영화다. <에이리언> 1편이 개봉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다. 당시 영화가 선보인 미래 테크놀로지는 순전히 1979년의 산물이었다. 컬러 없이 초록색 커서로 가득한 둥근 모니터와 여객기를 연상케 하는 수많은 버튼이 있었던 우주선 내부의 광경을 떠올려보라. 지금은 2020년대다. 현재 운용 중인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우주선에도 버튼은 거의 없고 인공지능이 알아서 관리하는 거대한 모니터 한두 개가 있을 뿐이다. <에이리언 : 로물루스>는 지금 시대의 발전으로부터 상상할 수 있을 법한 테크놀로지의 상상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에이리언> 1편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다. 옛날 삼보 컴퓨터 모니터로 우주를 여행하던 세계를 답습한다.
물론 나 같은 늙은이는 그게 좀 즐겁기도 하다. 어린 시절 보던 SF영화 속 테크놀로지를 2024년의 CG로 재현한 영화를 보는 레트로적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이건 2024년적인 즐거움인가? 오히려 1980년대 시티팝을 다시 발견하고 즐기는 중년 아재의 기쁨, 혹은 인디밴드가 이벤트성으로 내놓은 카세트테이프를 창고에서 겨우 찾아낸 옛날 워크맨으로 듣는 즐거움 같은 것이 아닐까? 한 번의 이벤트로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건 지속 가능한 이벤트가 아니다. J.J. 에이브럼스가 <스타워즈> 시퀄을 다시 내놓았을 때 나는 열광했다. 고전 <스타워즈>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시절 가젯을 그대로 되살린 오리지널의 분위기가 반가웠기 때문이다. 조지 루카스는 반가워하지 않았다. 이미 프리퀄 시리즈에서 오리지널과 완전히 다른 테크놀로지를 선보인 바 있는 그는 새 시리즈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게 없네요. 더 나아간 비주얼이나 테크놀로지도 없고요. 그냥 그들은 레트로 영화를 하고 싶었나 보죠” 그래서 결과는? 에이브럼스가 지휘한 속편들은 팬들도 싫어하고 새로운 관객들도 열광하지 않는 복고 잔치로 남았다.
지금 할리우드는 레트로 취미에 빠져 있다. <혹성탈출> <터미네이터> <에이리언> <프레데터> <고스트버스터즈> 등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할리우드가 순진한 상상력으로 내놓았던 고전에 최근의 CG 기술을 입히면서도 영화 속 세계관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둔 채 되살려낸다. 성공한 영화는 몇 없다. 레트로 취미로 새로운 세대까지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할리우드는 X세대의 고전 <구니스>(1985) 속편을 만든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아직 확정된 소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하다. 할리우드는 기어이 1985년의 악동들을 불러내고야 말 것이다. 물론이다. 나는 극장으로 갈 것이다. 마치 오래전 사랑했던 밴드가 재결성하며 내놓은 엘피를 사듯이 말이다. 나는 그 엘피를 장식장에 진열한 뒤 새 앨범을 스포티파이로 들을 것이다. 레트로는 감상의 취미가 아닌 수집의 취미로 족하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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