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우리의 소비행태에 붙이는 그 많은 이름표에 부쳐
이용규 기자가 보는 지금 젊은 세대 소비 행태의 핵심은 '품위유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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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한 소비가 만드는 이 비루한 에피소드를 두고 누구 탓을 할 것도 없다. 다만 기억을 더듬어 20대 초반의 데이트를 돌이켜보게 된다. 2017년 무렵, 우리가 주말 데이트를 마칠 곳으로 생각할 수 있던 옵션은 그저 서울 번화가 뒷골목의 모텔스컴바인이었다. 신촌 모텔의 어메니티와 가운은 조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크닉 바구니에 들어 있었다. 에어컨 파워냉방에도 눅눅하기만 하던 객실에선 가끔 완강기에 머리를 부딪혔다. 논현동 모텔에서 깨어나 냉장고를 열면 어제 먹기로 했다 까먹은 맥주 캔들이 꽝꽝 얼어 있었다. 편의점 맥주가 4캔에 1만원 하던 시절, 나는 고스란히 그만큼을 모텔에 기부하고는 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호텔에 갈 돈이 없었던 게 아니라, 호텔에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단 말이다. 에이, 호텔을 어떻게 가? 우리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디자인 호텔이란 개념이 등장하면서다. 모텔보다 4만원쯤 비싸지만, 훨씬 근사하고 서로에게 어딘가 ‘면이 서는’ 그런 무드. 어디서 들어본 듯한 브랜드가 어메니티로 나오는 객실, 모자를 쓰고 슬리퍼를 발에 끼운 채 터덜터덜 들어가도 괜찮은 조식 식당에서 먹는 스크램블드 에그.
회상이 거기까지 미치니 생각이 분명해진다. <매트릭스> 속의 빨간 약을 먹은 것이 아닐까. 그런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퉁퉁 부은 민낯의 그녀 앞에서 싸구려 면도날에 베인 얼굴로 순댓국을 떠먹는 다음 날 아침이 그렇게 ‘짜치게’(연극계나 광고계에서 ‘세련되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던 이 말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다) 느껴질 수가 없더라는 말이다. 그냥 모텔에서 잤더라면 하지 않았을 지출 4만원, 5만원도 기껍기만 했다. 그것은 일종의 ‘품위유지비’였다. 짜치기 싫으니까. 어차피 주말에 서로 껴안고 있어야 한다면 기분 좋고 싶으니까. 전 연인과는 디자인 호텔을 다녔던 사람이 나와는 기껏 모텔에 간다는 느낌을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짜치지 않기 위하여.’ 우리 세대의 보편적 추구미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말도 없다. 비단 호텔뿐이랴? 스물대여섯을 넘어서면 잔스포츠 백팩, 또는 올리브영에 전시된 브랜드의 향수에서 졸업하려 하고, 최소한 좋은 날엔 와인 바에서 내추럴 와인을 마셔야 할 것 같고, 인스타그램 돋보기에서 부추기는 패션 유행에 기어코 철마다 부응하게 된다. 먼 곳에서 동경하고 가끔 누리는 것에 감사하던 품위가, 어느덧 우리가 마땅히 유지해야 할 것만 같은 무언가가 되었다. 돈이 없다는 것은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경제적 격차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오히려 더 커졌을 것이고, 현재의 청년 계층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라이프스타일에 비해 너무 가난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비즈니스 캐주얼 대신 티셔츠와 에어팟을 장착할 용기를 지녔지만, 무릎 나온 기지 바지를 입거나 ‘저 친구는 월수금을 같은 옷을 입네’ 따위의 시선을 감내하는 건 죽기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남들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 우리 세대에 한해서는 엥겔지수와는 다른 지수 하나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체 지출 중 식료품에 들이는 지출’보다는 ‘짜치지 않기 위한 품위유지비 비중’을 분석해보면 어떨까? 본래 삶이 남루할수록 그 품위란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그런 이들을 두고 “돌아갈 집이라곤 비가 새는 작은 골방뿐이라 해도, 새 옷 차림으로 길모퉁이에 서서 클라크 게이블이나 그레타 가르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것”이라며 “실직한 아버지라도 티타임 동안에는 잠시나마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대안은 절망의 고통을 이어나가는, 신만이 아는 무엇일 터다.”
스스로 절망의 고통에 빠져 있다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이 물가상승의 끝이 어디일지는 파월… 아니 신만이 아실 것이다. 투자는커녕 호텔 예약을 위해 주식을 손절해야 할 정도의 시대. 우리는 노바이(No Buy: 소비를 줄이는 움직임) 챌린지란 대안을 선택했다. 당신도 청년 세대인데 그런 챌린지는 안 한다고? 좋은 지적이다. 그 자체가 이 챌린지의 핵심이다. 이것은 ‘안 보이는 도전’이라야 한다. 다른 사람이 몰라야 의미가 있고 어쩌면 당신조차 모를 수도 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세대별 통신비 지출 금액을 살펴보면, 20대와 30대의 지출 금액은 2019년 대비 2023년에 각각 29.2%, 32.9% 감소했다고 한다. 내가 통신3사 대신 자급제 알뜰폰을 쓰는 걸 남들이 알게 뭐란 말인가? 내가 편의점 이벤트를 닥닥 뒤져 삼각김밥 1+1 행사를 하는 매장을 알아내는 걸 남들이 어떻게 알겠나? 내가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대신 회사 탕비실의 카누 스틱 커피를 2개씩 타 마신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일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줄이고 줄이고 줄이다 보면,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도무지 줄일 수 없는 품위유지비를 남겨놓고서. 그래서 이런 모습은 SNS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익명으로 운영되는 오픈 카톡의 ‘거지방’에서야 비로소 그 실제를 엿볼 수 있다. 짜치는 일은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디자인 호텔과 호캉스 따위의 맛을 본 우리가 신촌과 논현의 모텔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마 힘들 것이다. 물가는 언제까지 오를 것인가, 네이버 주가는 좀 반등할 것인가, 우리 세대가 ‘짜침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장 내게 확실한 건 있다. 회삿돈으로 산 그 비싼 카누를 지금도 두 개씩 타 마시는 게 엄청 만족스럽다는 것. 그리고 늦은 시간 사무실에서 몰래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엄청 짜릿하다는 것. 그놈의 품위유지비 탓에 월급날 직전 가처분소득을 이리저리 굴리느라 골치 아픈 동안에도, 혼자만의 시트콤을 찍고 있다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어쩌랴, 인생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뿐이다. 물가도 금리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무지출에서 풍기는 짠내를 가능하면 유쾌하게 만들 수밖에. 아 참, 마침 이번에 김난도 교수가 이런 우리 세대의 행태에 대해 또 하나의 조어를 만들었다. ‘짜친다’보다 더 세련되고, ‘품위유지비’보다 훨씬 새로운 단어를. 어… 근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나네. 괜찮다. 어차피 내년에 하나 더 만드실 거 아닌가?
이용규는 <주간조선> 기자로, 물질과 숫자 너머 마음의 문제를 취재한다. 르포르타주 <뚝배기를 닦아 뿌링클을 사다>를 썼다.
Credit
- EDITOR 오성윤
- WRITER 이용규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CELEB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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