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조용필과 더 후 그리고 캣츠아의의 덕심을 찾아서

올드락 팬들로 가득 찬 공연장에서 음악평론가는 무엇을 느꼈을까?

프로필 by 박세회 2025.10.30

가왕(歌王)은 가왕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올해 추석 연휴의 한가운데, 온 가족을 불러 모은 것은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방문한 내가 아니라 28년 만에 KBS로 돌아온 조용필의 특집 콘서트였다. 어머니는 1980년대 시민회관 시절 1열에 앉아 있던 소녀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누가 ‘허공’을 제일 잘 부르는지 대결하여 ‘진짜 허공’을 가렸다던 중학생 시절을 회상하셨다. 이모는 지금도 조용필을 ‘오빠’라 부르신다. 가족 모두가 형형색색 응원봉으로 물결치는 고척 스카이돔의 진풍경에 저마다 감탄하며 커다란 TV 화면 속 가왕의 명곡을 따라 불렀다.

흥미로운 사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표를 거머쥔 팬들의 연령대였다. 베이비붐 세대부터 21세기에 태어났을 법한 아이들까지 그곳에서 응원봉을 흔들고 있었다. 과연 국민가수란 이런 것인가. 최근 10년간 조용필 콘서트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만큼 관객층이 다양하지는 않았다. 내 또래처럼 보이는 30대 초 친구들은 KBS가 사전 홍보한 문구처럼 ‘효도 티케팅’에 성공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간 걸까. 아니면 ‘바운스’를 즐겼던 12년 전, 가왕의 하해와 같은 디스코그래피에 입문하며 덕질을 시작한 걸까?

일찍이 가왕을 모셨던 선배 평론가들께서는 75세의 나이에도 빌보드 차트를 챙기며 최신 대중가요만을 고집한다는 거장의 혁신 의지에 대해 귀띔해주신 바 있다. 1980년대 가장 세련된 신스 팝이었던 ‘단발머리’를 선보였던 조용필의 음악 감각은 지난해 외국 작곡가들이 대거 참여한 음반 스무 번째 정규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전혀 노쇠하지 않았다. 2015년 데뷔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장에서 조용필은 가요계 세대 통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젊은이들이 나를 기억하려면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느냐. 찾고 찾다가 ‘바운스’와 ‘헬로’라는 곡이 나왔습니다. 그 곡으로 젊은 친구들이 저를 알게 되고 ‘저 사람이 이런 음악도 하는구나!’ 생각하겠죠. 그럼 저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50년, 60년 더 기억될 수 있잖아요.”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함께한 수많은 이들에게 서로 다른 각각의 ‘찰나’를 선사한 사람. 그것이 조용필의 위대함이리라.

조용필의 콘서트를 보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올해 75세 되셨는데도 목소리가… 대단하다.” 문득 나는 지난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볼에서의 공연이 떠올랐다.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밴드 ‘더 후’(The Who)의 미국 고별 투어였다. 세계에서 가장 과격한 밴드로 명성을 떨치며 태평양을 건넜던 로큰롤의 전설들 중 원 멤버는 이제 로저 돌트리와 피트 타운센드 두 명만 남았다. 이들은 음악 경력의 마침표를 찍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미국에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올해로 로저는 81세, 피트는 80세다. 두 노익장의 활약은 대단했다. 22곡 2시간 40분에 달하는 공연 시간 동안 로저의 목소리가 드넓은 야외무대를 쩌렁쩌렁 울렸고, 피트는 쉴 새 없이 팔로 풍차를 돌렸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관객들이었다. LA 산꼭대기까지 팬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에 30대 초반 아시아인은 나 하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비트족과 모드족으로 기성에 저항하며 젊음을 만끽했던 베이비부머 세대의 백인들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위대한 로큰롤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R.S.V.P.를 날린 이들 중에 새로운 세대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제국에서 장엄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동족을 찾아 나섰다. 1990년대를 지배한 분노의 아이콘 나인 인치 네일스에게로 말이다. 아직도 그는 훌륭한 전자음악가이자 가장 성공한 영화음악 작곡가 아니던가. 그런데 늦은 밤 현장 모습은 더 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조금의 인종적 다양성이 보였다는 점 정도가 다행이었달까. 1990년대 얼터너티브에 열광하던 X세대 백인들이 그 모습 그대로 나이가 들어 아레나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한때는 맵시 있었을 가죽 재킷 아래로 펑퍼짐한 뱃살이 튀어나오고, 사춘기의 상처를 덮기 위해 눈 밑에 짙게 칠했던 스모키 화장 아래에는 주름이 깊게 팼다.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내 사랑스러운 친구여.’ 무대의 끝을 알리는 ‘Hurt’가 흘러나올 때 나는 나인 인치 네일스의 1994년의 원곡이 아닌 2002년, 죽음을 앞두고 조니 캐시가 리메이크해 불렀던 스완 송을 떠올렸다. 아무리 혁신적인 사운드가 쏟아지더라도 그들만의 성벽은 견고했다. 신규 유입 따위는 없었다.

사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할리우드 다운타운에 있는 그래미 박물관에서 한 케이팝 그룹의 토크쇼를 겸한 공연이 있었다. 서구 대중음악의 만신전과 같은 현장으로 구름 같은 알파세대 팬들이 몰려들었다. 주인공은 ‘하이브 아메리카’ 소속의 6인조 걸그룹 ‘캣츠아이’였다. 서로 다른 인종과 피부색을 가진 여섯 멤버로 구성된 케이팝 걸그룹. 케이팝에 대한 서구 사회의 높은 관심과 BTS의 성공으로 자본을 축적한 하이브의 미국 시장 진출 의지가 맞물려 탄생한, 가장 세계적인 케이팝 그룹. 올해 시카고 롤라팔루자 페스티벌 현장에서는 오후 2시에 캣츠아이를 보기 위해 메인 무대 앞으로 6만 명의 관객이 모여들었다. 시드니 스위니의 악명 높은 백인 우월주의적 아메리칸 이글 광고 이후 캣츠아이가 GAP 캠페인에 등장한 건 신의 한 수였다. 한국에서 인권 침해와 사생활 침해, 노동권 보장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케이팝이지만, 트럼프의 미국에선 가장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게 케이팝이다. 내가 전설들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동안, Z와 알파 세대는 그래미 박물관으로 몰려가 새로운 우상의 탄생을 열렬히 환호했다. 인종과 국적의 경계를 허문, 가장 동시대적인 아이콘. 나는 소셜미디어 피드를 넘기며 그 뜨거움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티켓을 구하지 못했으니까.

조용필의 공연을 보며 내가 문득 더 의아해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베이비붐 세대부터 10대까지 고척돔을 채운 관객, 세대 통합의 신화는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오직 한국에서만 가능한 기적인가. 더 후는 절대로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한 에어로스미스의 조 페리와 스티븐 타일러, 블랙 크로우즈, 건스 앤 로지스의 슬래시의 공연장에는 조금 더 어린 그러나 관절이 가끔 쑤시는 록의 후계자들이 노구를 이끌고 공연장을 채울 것이다. 나인 인치 네일스도 마찬가지다. 자기혐오에 빠질 정도로 팔팔하던 젊음이 현실에 찌든 어른이 되었다 한들, 팬들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과거의 화장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다시 모일 것이다.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법’일 테니까.

그러니까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케이팝은 어떻게 늙어갈까? 케이팝의 역사와 함께한 1세대 그룹의 콘서트 현장에서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지난해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지오디의 공연 3회차가 전석 매진이었다고 하던가? 1990년대에, 그룹을 상징하는 색깔의 풍선을 흔들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팬들이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되어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2000년대 케이팝의 슈퍼 그룹들은 여전히 현역이거나 현역 그 이상의 이름값을 자랑한다. 고양종합운동장에서의 공연을 장식한 지드래곤과 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성대하게 마친 투애니원을 떠올려보라. ‘겹덕’ ‘잡덕’은 하더라도 ‘탈덕’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팝 문화에서 건너와 이제는 현지에 역수출되고 있는 케이팝 팬덤의 로열티는 겨우 30년의 세월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그날 그래미 박물관 공연에 간 팬들은 30년 후 캣츠아이의 공연장에 다시 모일까? 나는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탈덕은 없다. 캣츠아이는 나인 인치 네일스가 될 수 있고, 트와이스는 더 후가 될 수 있다. 지금은 10대지만 30년 후 리유니온 콘서트에서 목이 쉰 아저씨들이 ‘샤샤샤’를 부르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린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난 수십 년간 오랜 염원이었던 케이팝의 미국 진출과 현지화 정책이 마침내 유의미한 결실을 얻는 현장을 목도해서이기도 하다. 케이팝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내가 팝 시장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음악 관계자들에게 들은 대답은 다소 뜻밖이었다. 우리가 비판하고 때로는 저주하기까지 하는 케이팝의 여러 문제는 큰 이슈가 아니었다. 연습생 제도는 T&D(Training & Development)라는 세련된 이름을 달고 음악가들의 발전을 돕는 체계적인 코칭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치열한 훈련과 경쟁 역시 느슨한 주류 팝 시장의 작곡가들에게는 커다란 자극으로 작용했다. LA와 서울에 지사를 두고 있는 레이블 타이탄(TITAN)의 부사장 빅터 포티요(Victor Portillo)는 케이팝 특유의 송라이팅 시스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전통적인 프로듀서 중심의 톱다운 방식이 아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나누고 집단적인 비전을 만들어가는 수평적인 구조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유로운 현장에서 케이팝은 더욱 과감해졌다. 캣츠아이의 대표곡 ‘날리(Gnarly)’에는 거침없는 ‘F 워드’가 쏟아진다. 생각해보면 미국을 여행하며 질리도록 들었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현재 한국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새로운 케이팝이다. 미국에서 만드는 케이팝이 우리보다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케이팝은 팝 음악의 한 서브 장르 혹은 하나의 서브 스타일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것이다. 언젠가는 케이팝의 ‘K’가 한국을 뜻하는 게 아니라, 태권도 종목처럼 종주국의 지위만을 유지하는, 일종의 품질보증마크 ‘K마크’로 활용되는 시절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조용필의 공연 영상을 플레이리스트로 무한 반복하고 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부터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대’까지, 20대부터 80대까지 아우르는 가왕의 경험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과연 이걸 케이팝이 재현할 수 있을까.


김도헌은 음악 웹진 ‘IZM’의 에디터부터 편집장까지 맡았던 대중음악 평론가로, 음악 웹진 ‘제너레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대중음악상(KMA) 선정위원이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헌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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