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TECH

혼란에 빠진 자동차 브랜드의 고전 계급도

빠른 차가 비싼 차가 아니고, 역사가 길다고 명품도 아니고, 비싸다고 좋은 차도 아닌 시대가 왔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6.09.30

자동차 브랜드만큼 계급이 확실한 영역이 있을까? 딱히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어떤 피라미드를 머리 속에 탑재하고 있다. 대중적인 현대차와 기아의 머리 위에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의 프리미엄 브랜드가 가부좌 틀고 있고, 구름 위에서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페라리 등 럭셔리 브랜드가 이들을 굽어보는 구도.

이 분포를 이차함수 그래프로 그려보면 기준과 패턴이 좀 더 명확해진다. 가격이 비싸거나 속도가 빠를수록, 역사가 길수록 브랜드의 계급이 높다. 나아가 이들 조건은 서로에게 양(+)의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이런 가정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역사가 긴 만큼 기술력을 축적해 더 강하고 빠른 차를 만들 수 있는 브랜드는 자신들의 차에 그만큼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다.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자동차 브랜드의 서열은 소비자들의 인식에 오랜 세월 동안 단단히 뿌리 내려왔다.

주요 자동차 브랜드들은 섣불리 이 경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물론 몇몇 브랜드가 도전한 적이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1997년 A-클래스로 소형차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메르세데스-벤츠가 대표적이다. 출시 직후 한 스웨덴 매체가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급차선 변경을 시험하던 중 차가 뒤집혀버렸다. 망신살이 뻗쳤다. 결국 벤츠는 판매 중단 후 대대적으로 개선에 들어가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한편, 폭스바겐은 자신의 텃밭에 틈입한 메르세데스-벤츠를 보며 이렇게 반문했다. ‘벤츠도 대중차 시장에 진출하는데, 우린 왜 프리미엄 시장으로 올라갈 생각을 안 했지?’ 폭스바겐은 독일 드레스덴에 투명 유리로 외벽을 치장하고 원목으로 바닥을 깔고 클래식 배경음악이 나오는 호화로운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크고 비싸고 빠른 ‘페이톤’과 ‘투아렉’을 만들어 고급차 브랜드로의 신분 상승을 노렸다. 그러나 다들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

자동차업계에서는 종종 섞어 쓰고 하지만, 마케팅에서 ‘프리미엄’과 ‘럭셔리’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개념이다. 프리미엄 자동차는 1960년대 태동했다. 당시 시장을 양분한 럭셔리와 대중 브랜드의 틈을 파고들었다. 1970년대 석유파동 속에서 기술적 우위를 증명하며 자리 잡았다. 대중 브랜드보다 높은 가격과 품질, 디자인, 기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차별성에 대한 가격을 추가로 매긴다.

독일의 자동차산업 분석가 필립 G. 로젠가르텐과 다임러 크라이슬러 출신 크리스토프 B. 슈퇴르머는 공저 <프리미엄 파워>를 통해 한층 구체적으로 정의 내렸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기술적 혁신으로 거머쥔 실질적 지위다. 자국 내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세계에서도 통하는 위상을 확보한 경우다. 소비자의 암묵적 동의가 필수다.

반면 럭셔리는 물려받은 유산의 후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상징적 지위다. 강력하고 일방적인 마케팅으로 오래전에 이미 구축된 이미지다. 1919년 영국에서 창업한 벤틀리가 좋은 예다. 고성능 경주차와 주문 제작 차로 명성 떨쳤다. 하지만 1931년 맞수 롤스로이스가 인수했다. 대공황 여파였다. 1998년 벤틀리를 사들인 폭스바겐은 초기 10여 년의 후광을 강조해 럭셔리 브랜드로 안착시켰다.

특성이 달라 가능한 지름길이었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더 좋은 자동차를 추구한다면, 럭셔리 브랜드는 그 너머의 가치를 아우른다. 희소성, 장인정신, 상징성, 역사와 문화적 의미, 소유가 주는 사회적 가치가 중요하다. 프리미엄은 ‘더 좋은 자동차’, 럭셔리는 ‘소유하는 경험과 의미’를 판다. 그래서 럭셔리 자동차의 가격은 성능이나 원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의 만능 엔터테이너 니시노 아키히로는 저서 <꿈과 돈>에서 프리미엄과 럭셔리의 차이를 이렇게 밝혔다. “프리미엄은 경쟁이 있는 가운데 최상위 체험이고, 럭셔리는 경쟁이 없는 체험이지요.” 그는 프리미엄은 고급, 럭셔리는 꿈으로 해석한다. ‘부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공통점도 소개하면서도, ‘꿈은 인지도에서 보급도를 뺀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즉 너무 많이 보급된 럭셔리는 럭셔리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자동차 분야에서 위에 늘어놓은 전통적 개념, 단단한 하이얼아키가 흔들리고 있다. 크게는 자동차가 ‘기계’에서 ‘움직이는 컴퓨터’로 거듭나면서 좋은 차의 기준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강력한 엔진을 만들고, 변속기를 정교하게 다듬고, 그에 맞게 서스펜션과 섀시를 조율하는 데 오랜 시간과 기술 축적이 필요했다. 배기량과 실린더 수, 터보 기술, 최고 출력과 가속 성능이 해당 제조사의 기술력을 상징했다.

이미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브랜드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포르쉐가 좋은 예다. 라인업의 정점에 있는 911 터보의 성능 진화를 보자. 최고 출력이 1975년에 260마력에서 시작해, 1978년 300마력, 1989년 330마력, 1993년 385마력, 1995년 408마력, 1999년 420마력, 2009년 500마력, 2012년 520마력을 거쳐 2025년엔 640마력으로 늘었다.

당구 300 고수가 점수를 찔끔찔금 빼듯 출력을 살짝 높이고 속칭 ‘제로백’ 시간을 조금씩만 단축해도 소비자들은 기꺼이 열광하고 반겼다. 성능을 대표하는 숫자는 개선 자체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소비자들이 차 안의 화면 디자인, 소프트웨어의 편의성, 운전자 보조 기능, 배터리 성능, 자율주행의 가능성까지 따지기 시작했다. 자동차 브랜드의 서열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 과목이 바뀌었다.

과거 시험이 “엔진을 얼마나 잘 만드는가?”였다면 지금은 “기계·소프트웨어·배터리를 얼마나 잘 묶는가?”에 가깝다. 물론 기존 업체의 강점은 여전히 막강하다. 생산기술, 품질관리, 판매망, 브랜드 신뢰도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경쟁력이 필요하다.

기존 고급차의 상징적 가치를 희석시킨 변화의 시작점은 앞서 말했듯 전동화다. 전기모터는 엔진보다 단순한 얼개로 더 강력한 토크를 즉시 만들어낸다. 배터리와 전기모터, 냉각 시스템의 성능만 뒷받침된다면 과거 슈퍼카의 영역으로 간주하던 가속 성능과 최고 속도를 대중적 가격대의 장치로 구현할 수 있다. 자동차의 전통적 서열을 단숨에 무너뜨릴 ‘티핑 포인트’인 셈이다.

6분22.091초. 지난해 4월 1일, 중국 샤오미의 SU7 울트라 프로토타입(시제작차)이 독일의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기록한 랩타임이다. 2019년 이 레이싱장에서의 기록을 공식처럼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세 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역대 1~2위는 포르쉐 919 하이브리드 에보와 폭스바겐 ID.R로 모두 레이스카다. 반면 SU7 울트라는 누구나 당장 살 수 있는 양산차다.

양산차 최고 속도 기록 또한 중국 자동차 브랜드가 거머쥐었다. 지난해 9월, 중국 BYD 산하의 고급 브랜드 ‘양왕’의 스포츠카 U9 익스트림이 독일 ATP 파펜부르크 시험장에서 시속 496.22km를 기록했다. 스펙도 눈부시다. 최대 3만 rpm 이상의 초고속 전기모터 4개로 3000마력 이상을 낸다. 리튬 인산철 배터리를 품은 전기 시스템 전압은 무려 1200V다.

한편, 자동차 전통적 계급도의 변화는 바다 건너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국내 시장에서 현대차그룹은 압도적 지위를 누려왔다. 승용차부터 SUV, 전기차까지 차급별 라인업을 촘촘하게 갖춘 현대차와 기아, 제네시스가 국내 시장의 가격과 상품 경쟁을 주도해 왔다. 그런데 최근 이 오래된 질서에 균열의 조심이 보이고 있다.

월 1만 대 판매. 연간 170만 대 규모의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는 꽤 상징적인 숫자다. 으레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난 3월, 테슬라가 1만 대 클럽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전기차 보조금을 확정하면서 3월 한 달 동안 1만1130대를 출고했다. 심지어 중국산이다. 같은 기간 6785대로 수입차 2위를 차지한 BMW의 두 배 가까운 실적이었다.

수입차 브랜드가 월 판매 1만대를 넘어선 건 한국 자동차 역사상 처음이다. 반전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같은 달 중국 BYD도 1664대를 판매해 수입차 브랜드 4위에 올랐다. 더 주목할 점은 국내 시장에서 BYD의 성장 속도다. BYD코리아는 2026년 3월 누적 판매 1만75대를 기록했다. 국내에서 정식으로 고객 인도를 시작한 지 불과 11개월 만이다.

과거의 자동차 시장은 피라미드 형태였다. 가장 밑변을 대중차가 떠받치고, 점점 뾰족해지는 영역을 프리미엄과 럭셔리가 점유했다. 브랜드의 서열 또한 비슷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줄로 세우기 어렵다. 전기차 성능은 테슬라, 배터리는 BYD, 주행 감각은 독일차, 품질은 일본차, 감성은 이탈리아차 등 항목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플레이어가 다르다.

결국 자동차 브랜드의 서열은 ‘누가 제일 비싼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장 잘하는가’로 바뀌고 있다. 독일 자동차 회사에 특히 불편할 변화다. 아우디, BMW, 메르세데스-벤츠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의 가장 큰 자산은 역사다. 기술, 디자인, 모터스포츠를 통해 수십 년간 쌓은 자산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역사가 새로운 기술을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더 이상 빠르다고 무조건 비싼 차가 아니다. 역사가 길다고 무조건 명품도 아니다. 비싸다고 좋은 차도 아니다. 소비자는 로고보다 성능, 역사보다 기술, 국적보다 가치를 따진다. 물론 브랜드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럭셔리 시장에서는 역사가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브랜드인지만 설명해서는 부족하다. 우리 브랜드가 무엇을 더 잘하는지 증명해야 한다. 반세기 전 프리미엄 브랜드가 싹틔운 순간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격변과 혼돈의 2026년, 100년 된 회사와 10년 된 회사가 같은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경쟁도 여기서 시작한다. 기존 계급의 파괴는 이례적 사건이 아니다. 필연적 숙명이다.


김기범은 월간 <자동차생활>에서의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지난 25년간 자동차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현재 <로드테스트>의 발행인 겸 편집장으로 있다. ‘Car Design Award’(이탈리아), ‘The International Engine & Powertrain of the Year’(영국)의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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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기범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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