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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건 어쩌면 입맛인지도 모른다. 마트에 햅쌀이 쌓이고, 시장 좌판에 꽃게와 대하가 올라오고, 어디선가 송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가을이 왔다는 실감이 난다.
요즘처럼 사계절 내내 웬만한 음식은 구할 수 있는 시대에도 이상하게 제철 음식 앞에서는 마음이 조금 급해진다. 지금 아니면 가장 맛있는 순간을 놓칠 것 같아서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먹고 싶은 것보다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출근길,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높다. 아침 공기는 선선하고, 점심 먹고 나오면 햇살이 딱 기분 좋을 만큼만 따뜻하다. 바람도 적당하다. 1년 중 이런 날씨가 며칠이나 될까. 모니터 앞에 앉아 있기엔 아까운 날들이 그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매년 그렇듯, 정신 차려보면 패딩을 꺼내고 있을 거다. 가을은 늘 짧다.
가을 음식은 더 짧다. 대하, 꽃게, 송이, 햅쌀, 그리고 김장까지. 다 때가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누가 “꽃게철이다” 한마디 하면 그 주 토요일 새벽엔 차에 타 있었다. 먹고, 좀 걷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 여행인데, 내 가을 기억의 대부분이 거기 있다.
갓 버무린 김장김치와 수육, 따뜻한 쌀밥이 한 상에 놓인 풍경. 김장날이면 어머니가 직접 한 점씩 건네주던 보쌈의 기억을 담았다. / 이미지 출처: AI 일러스트
어머니는 지금도 햅쌀의 힘을 믿으신다. 새 쌀로 지은 밥을 먹어야 한 해를 버틴다고. 매년 가을이면 교회에서 햅쌀을 사 오시고, “올해 쌀이다” 하면서 제일 먼저 밥을 퍼주신다. 김장하는 날엔 꼭 수육을 삶으신다. 막 버무린 김장 속을 고기에 올려 입에 넣어주시던 그 맛은 아직 어떤 보쌈집도 못 따라온다. 햅쌀이 정말 몸에 좋은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밥 먹고 자라서 이렇게 멀쩡히 회사 다니고 있다는 거다.
서해의 노을과 포구, 큼직한 꽃게를 함께 담은 풍경. 제철 꽃게를 먹기 위해 가족과 안면도로 떠났던 가을 여행의 기억을 표현했다. / 이미지 출처: AI 일러스트
꽃게 먹겠다고 안면도 백사장항까지 간 적도 있다. 금어기 끝난 가을 서해엔 살 꽉 찬 수꽃게가 올라온다. 포구 식당에 둘러앉아 꽃게 딱지 하나씩 들고,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살을 발라 먹었다. 돌아오는 길엔 꽃지해변에서 할미·할아비바위 사이로 지는 해를 봤다. 그날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사진 속 부모님은 지금보다 한참 젊다.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대하와 영랑호를 걷는 가족의 모습을 함께 담은 장면. 처음 대하구이를 먹고 부모님과 호숫가를 걸었던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 이미지 출처: AI 일러스트
속초에서 처음 대하구이를 먹은 날은 꽤 충격이었다. 소금을 두껍게 깐 냄비에 생새우를 올리자 뚜껑 안에서 새우들이 파닥파닥 뛰었다. “와, 사람 진짜 잔인하다” 해놓고 제일 먼저 껍질 까고 있는 나를 보고 혼자 웃었다. 배 두드리며 영랑호를 한 바퀴 걸었다. 부모님은 몇 걸음 앞에서 걸으셨다. 그 뒷모습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다.
몇 해 전 <나 혼자 산다>에서 코드 쿤스트가 동생이랑 시골집에 내려가 아버지와 벌초하는 걸 봤다. 저녁 바비큐 자리에서 그는 명절도 아닌데 산소에 가본 건 처음이라며, 할머니 할아버지랑 대화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짧게 답했다. “나이 먹었다는 것.” 소파에서 괜히 리모컨을 내려놨다.
김이 피어오르는 햅쌀밥과 송이버섯을 함께 담은 가을 식탁. 한 해를 버티게 해준다는 어머니의 햅쌀밥과 제철 식재료의 기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이미지 출처: AI 일러스트
대하도 송이도 올해 놓치면 내년에 먹으면 된다. 그런데 부모님이랑 보내는 가을은 1년에 딱 한 번, 정해진 횟수만큼만 온다. 마흔이 되니 그 횟수를 세어보게 된다.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올해는 연차를 좀 써야겠다. 부모님 모시고 대하 먹으러 가서 냄비 속 새우 보며 또 잔인하다고 떠들고, 송이 몇 점 올린 햅쌀밥 나눠 먹고, 김장날엔 어머니 옆에서 보쌈 한 점 얻어먹어야지. 사진도 한 장 더 찍고. 부모님의 시간도, 이 가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언젠가는 이런 풍경들이 모두 오래된 사진 속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기억하게 될 것은 어느 식당의 꽃게가 더 맛있었는지, 대하 한 접시가 얼마였는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먼저 걷던 뒷모습과 어머니가 밥을 한 숟갈 더 퍼주던 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제철 음식은 내년에도 다시 돌아오지만 같은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맞는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의 가을은 조금 덜 미루고, 조금 더 자주 함께 먹고 걷고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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