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돼지국밥의 근본을 찾아서

부산식과 밀양식, 서울 돼지곰탕이 뒤섞이며 '국밥 예송논쟁'까지 벌어지는 지금, 돼지국밥과 순댓국밥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프로필 by 박세회 2026.11.04

국밥이란 단어와 마주할 때면 한 장면이 아련히 떠오른다. 군 시절 처음 나온 외출에서 무작정 들어간 어느 국밥집, 뚝배기 위로 고기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아마 먹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 같다. 굶주린 이등병에게는 거의 종교적 체험이었으니 말이다. 강원도는 돼지국밥을 좀 다르게 먹는구나 했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그 국밥의 이름은 순댓국밥이었고, 그토록 열심히 씹었던 환상적인 식감의 고기는 살코기가 아닌 머릿고기였다.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며 자란 내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이후 나는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기독교로 몰래 개종한 이처럼 살았다. 겉으론 ‘부산이니까 돼지국밥 아이가’라고 외치면서, 속으론 머릿고기 가득한 순댓국밥의 세례를 기다리는 은밀한 신앙을 품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부산 사람이 어떻게 돼지국밥과 순댓국밥을 저울질하느냐, 배신자라며 열을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에 빠지는 건 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자면, 추억 속 돼지국밥은 늘 비루했다. 무심할 만큼 싱거운 국물에 새우젓이나 양념장으로 간을 맞춰야 겨우 먹을 만했고, 얇게 썬 고기 몇 점이 퍽퍽하게 떠 있었다. 건더기가 부실하니 밥이 말아져 나왔다. 국물은 집마다 뽀얗기도 하고 맑기도 했지만, 왜 다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대학가에서 한 그릇에 2500원, 3000원 하던 시절이다. 국밥은 청춘의 허기와 숙취를 달래는 용도였지, 맛을 논하며 먹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그랬던 돼지국밥이 지금 한식에서 가장 역동적인 장르가 됐다. 올가을 부산시는 시민 1만여 명의 추천을 받아 추린 스무 곳으로 ‘부산 돼지국밥 대전’을 열었다. 서울에선 ‘돼지곰탕’ 간판을 내건 집 앞에 줄이 늘어서고, 문을 열자마자 미쉐린 가이드의 간택을 받는 곳도 나왔다. 서울에서 유행한 말끔한 스타일이 역수입되면서, 요즘 새로 생긴 부산 국밥집들이 지나치게 깔끔해졌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급기야 국물 색이 이게 맞네 아니네 하는 ‘국밥 예송논쟁’까지 벌어진다. 뽀얀 국물과 맑은 국물, 투박한 뚝배기와 정갈한 유기그릇이 한 장르 안에 뒤섞인 지금,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그래서 돼지국밥이란 대체 뭔가.

정의부터 해 보자. 그런데 의외로 명확한 기준이 없다. 저마다 지역별 공식을 내세우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관광공사조차 부산 돼지국밥을 두고 “맑은 국물의 국밥과 진한 국물의 국밥으로 나뉜다”고 적는 데 그친다. 육수로 기준을 세우기엔 서로 너무 섞여 있다. 뼈를 고면 뽀얗고, 머리와 내장을 삶으면 반쯤 비치는 국물이 되며, 살코기만 우리면 맑다. 문제는 국밥집마다 위스키 원액을 블렌딩하듯 이 육수들을 섞어 쓴다는 점이다. 부산 안에서만 봐도 사골, 살코기, 머릿고기 베이스가 공존한다. 밀양식이건 부산식이건 국물의 맑고 진함은 결국 만드는 사람 마음이다.

흔히 뽀얀 국물은 진하고 맑은 국물은 연하다고 여기지만 이것도 오해다. 국물 색은 재료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재료와 불의 세기가 함께 정한다. 뼈와 껍질의 콜라겐은 오래 끓이면 젤라틴으로 풀려 나온다. 센 불에서 국물이 격하게 끓으면 이 젤라틴이 잘게 쪼개진 기름 방울을 감싸 물속에 붙잡아 둔다. 우유가 하얀 것과 같은 유화 원리다. 약한 불에서 은근히 고면 기름은 위로 떠오를 뿐 섞이지 않아 국물이 맑게 남는다. 결국 뽀얀 국물이란 젤라틴을 내주는 재료를 센 불에 끓였을 때 비로소 나오는 결과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그 색이 나오지 않는다. 뽀얀 국물의 묵직함은 기름과 젤라틴이 주는 질감일 뿐, 감칠맛은 맑은 국물에도 고스란히 우러난다. 색깔로 돼지국밥의 정체성을 가리는 논쟁은 애초에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가 국물 색에 집착하는 건 아마 설렁탕과 곰탕 탓일 것이다. 사전적 설명으론 설렁탕은 소뼈를 우려 뽀얗고, 곰탕은 양지나 사태를 고아 맑다. 하지만 둘을 섞은 사골곰탕이라는 장르도 존재한다. 색이 아니라 주요 재료가 둘을 갈랐다는 뜻이다. 돼지의 국밥도 마찬가지다. 가르는 기준은 국물이 아니라 주요 재료가 무엇이냐다. 돼지국밥의 주인공은 고기다. 앞다릿살 같은 살코기를 삶아 썰어 얹는다. 순댓국밥의 주인공은 돼지 부산물이다. 머릿고기와 내장, 순대가 그릇을 채운다. 소의 국밥이 뼈와 고기로 갈렸다면, 돼지의 국밥은 고기와 부산물로 갈린 셈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순댓국밥이라 부르는 음식은 사실 돼지머리국밥 혹은 돼지부속국밥이라 불러야 맞다. 그런데도 이름엔 순대가 들어간다. 음식 이름은 대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쪽을 따라간다. 흔한 돼지머리와 내장은 기본값이었고, 창자를 씻고 소를 채워 삶아야 하는 순대가 간판이 됐다. 그 순대의 자리마저 이제는 값싼 당면순대가 꿰찼다. 순댓국밥을 시키면서 “순대는 빼 주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러니가 오늘날의 풍경이다. 부산은 아예 이 경계를 지웠다. 돼지국밥, 순댓국밥, 내장국밥, 섞어국밥이 나란히 적힌 부산 국밥집의 메뉴판은 부위별 옵션표에 가깝다. 고민될 땐 “섞어 주이소” 한마디면 된다.

이 혼돈에 누군가는 규칙을 부여하고 싶었나 보다. 흔히 통용되는 구분을 따르면 부산식은 뽀얀 국물이 주류를 이루고, 부추를 넣어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밀양식의 원조 노포는 아예 소뼈 사골로 육수를 내 말갛게 끓이고, 비계 없는 돼지고기 살코기를 얇게 썰어 올린다. 돼지국밥인데 국물은 소에서 나오는 셈이다. 주요 재료로 가른다는 원칙마저 끝까지 밀어붙이기 어렵다는 걸 원조가 증명하는 셈이다. 대구로 올라가면 머릿살과 내장을 넉넉히 얹고 된장과 고추 양념을 고명처럼 올리며, 부추 대신 썬 파를 낸다.

경상도를 벗어나면 무게중심이 순댓국밥으로 옮겨 간다. 전주 남부시장의 피순대처럼 순대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제주는 아예 계보가 다르다. 돼지 삶은 국물에 메밀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끓인다. 여기에 모자반을 넣으면 몸국이 되고, 앞다리와 갈비 사이에 붙은 접짝뼈를 고면 접짝뼈국이 된다. 그러니 원칙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구분이다. 실재의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국밥은 대부분 혼종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등장한 말끔한 돼지국밥은 새로운 장르일까. 다리살만으로 우린 맑은 국물, 얇게 저민 살코기, 다진 쪽파, 그리고 토렴. 하나씩 뜯어보면 낯선 요소는 거의 없다. 맑은 국물에 비계 없는 살코기를 올린다는 조합 자체는 밀양에서 1930년대부터 끓여 왔고 돼지곰탕이라 불렀다. 돼지국밥이 아니라 돼지 ‘곰탕’이라 부르는 건 고기를 고아 맑게 내는 설렁탕과 곰탕의 구분법을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 서울의 돼지국밥 역시 새 장르라기보다는 있던 음식의 재변주에 가깝다. 새로운 게 있다면 국밥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허기를 채우던 만만한 음식이 국물의 온도와 고기의 질, 그릇의 질감과 플레이팅 모양새까지 따지는 미식의 대상이 됐다.

돼지국밥이 뜬 이유는 간단하다. 파는 사람에게도, 먹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쁠수록 어쩌다 먹는 특별한 요리보다 매일 먹을 수 있는 친숙한 밥집이 장사가 잘된다. 큰 솥에 뼈와 고기를 고는 일은 시간이 걸릴 뿐 복잡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 소는 비싸다. 값싼 돼지뼈로 육수를 내고, 머리와 내장은 고명으로도 육수로도 쓸 수 있으니 원가 부담도 덜하다. 무엇보다 한 그릇 요리라 손님은 음식을 받은 지 20분이면 일어선다. 밥장사에서 회전은 곧 이윤이다. 국수 말고는 국밥만큼 빠르게 회전할 수 있는 장르가 드물다.

진입은 쉽지만 완성은 다른 문제다. 흥미로운 건 배운 요리사들이 이 장르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해외 주방과 파인다이닝을 거친 젊은 요리사들에게 돼지국밥은 도전해볼 만한 새로운 캔버스다. 뼈와 살코기 비율로 국물 농도를 설계하고, 부위마다 삶는 시간을 달리해 국밥 맛의 구조를 새롭게 세우고 있다. 셰프의 국밥집은 현실과의 타협일 수도 있지만, 가장 익숙한 맛으로 실력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먹는 이들에게도 국밥은 여전히 가성비 좋은 음식이다. 점심 한 끼가 만 원을 훌쩍 넘는 시대다. 셰프의 국밥이 조금 비싸졌다 해도 파스타 한 접시보다는 싸고, 예약도 격식도 필요 없다. 낯선 레스토랑에선 메뉴판 앞에서 긴장하지만 국밥집에선 숟가락부터 든다. 늘 같은 국밥이 지겨우면 다른 집에 가면 그만이다. 좋아하는 것을 파고드는 것은 문화다. 빵순이는 빵지 순례를 하고, 국밥 마니아들은 국밥 순례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돼지국밥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일부 국밥 순수주의자들은 순수성이 바래간다고 걱정한다. 돼지곰탕은 돼지국밥이 아니라며 피켓이라도 들고 국회 앞에 나설 기세다. 하지만 음식은 원래 변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뽀얀 국물의 돈코쓰 라멘은 1947년 일본 규슈의 한 포장마차에서 주인의 어머니가 맑게 내던 돼지뼈 국물을 센 불에 너무 오래 끓이는 바람에 우연히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음식은 박제가 불가능하기에 순수주의는 늘 그 의미를 잃는다. 부야베스에 진심인 마르세유의 식당들은 1980년 ‘부야베스 헌장’을 만들어 들어가는 생선 종류까지 못 박았지만, 법적 효력 없는 신사협정에 그쳤다. 마르세유 안에서조차 같은 맛의 부야베스를 내는 집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집도 같은 맛을 낼 수 없다. 즉 돼지국밥은 이래야 한다고들 하지만, 저마다 추억과 입맛에 따라 서로 다른 국밥을 하나의 정의로 품어낼 순 없다. 국밥에 이데아는 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향을 바란다. 저마다 개성과 고집을 간직한 국밥집이 더 많아지기를. 국물과 고명에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한 끼 먹는 국밥이 재미있고 즐겁고 이야기를 나눌 만큼 흥미로운 음식이 되기를 바란다. 평양 냉면처럼 모두가 불평만 하는 면스플레인의 장르가 아니라 라멘처럼 저마다의 서사를 즐길 수 있는 열린 장르가 되었으면 한다. 취향이 갈린다는 건 그 장르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2500원짜리 국밥 앞에서 맛을 따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고, 이름 모를 집의 고기 탑에 마음을 빼앗긴 날이 있었다. 늘 먹던 국밥도 먹을 때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먹고 나온 후의 마음은 늘 같다. 20년 전 이등병에게 고기를 탑처럼 쌓아 준 주인은 정체성이나 정통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허기진 사람에게 든든한 한 그릇을 내밀었을 뿐. 아무리 치장을 해도 국밥이란 음식은 그런 것이다.


경제지 기자에서 요리의 길로 들어선 장준우는 버티고개역 인근 남산타운에 있는 타파스 바 ‘어라우즈’를 운영하는 오너 셰프로 <한국일보> <서울신문> 등에서 푸드라이터로 활동하며 음식 너머에 있는 맥락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관련기사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장준우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