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탁 시스템의 승리 조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프라이탁은 재활용 브랜드가 아니다. | 프라이탁,재활용

화물 트럭 덮개용 방수 천, 자전거 부속인 링 형태의 고무 튜브, 자동차 안전벨트. 업사이클링 브랜드로 잘 알려진 프라이탁 가방의 재료다. 브랜드를 창립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프라이탁은 스위스 취리히 인근 지역에서 여전히 버려진 방수 천을 재활용해 가방을 만든다. 프라이탁 가방의 원형인 메신저백과 손바닥만 한 카드 지갑, 여성용 핸드백은 물론 비교적 최근에 내놓은 바퀴 달린 여행용 캐리어까지 모두 동일한 소재로 만든다. 20년간 오직 하나의 소재로 하나의 가방을 생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프라이탁의 모든 가방에는 각기 다른 인장이 새겨져 있다. 5년 이상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달리며 생긴 화물 트럭 덮개 방수 천의 흠집, 그 방수 천을 절묘하게 잘라내며 생긴 무늬가 그것이다. 프라이탁 가방은 크기, 부피, 용도가 조금씩 달라도 군인이나 경찰의 유니폼처럼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띈다. 심지어 소재 특유의 고약한 냄새까지도 프라이탁 팬들에겐 브랜드 감성의 일부로 여겨진다. 창립자 다니엘 프라이탁과 마르쿠스 프라이탁 형제는 이 가방 하나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업사이클링이라는 정신과 쿨한 스타일을 결합해 전무후무한 카테고리의 브랜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프라이탁의 진짜 가치는 업사이클링을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로 일구었다는 점이다. 버려진 물건을 재활용하는 업사이클링은 일회성 구호나 캠페인으로만 그치곤 했다. 프라이탁은 매년 30만 개 이상의 가방을 생산하며 150여 명의 직원과 함께 700억원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프라이탁이 버려진 소재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회사였을까? 아니면 프라이탁의 아이디어가 가장 진실했을까? 모두 아니다. 아마 프라이탁이 태어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재활용 상품이 나왔을 것이다. 누군가의 창고에서, 아니면 그럴듯한 회사에서 개인 프로젝트로, 혹은 브랜드로.프라이탁이 남다른 건 콘셉트 때문이 아니다.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지구를 살린다는 정치적 구호나 재활용이라는 콘셉트와 프라이탁은 거리가 멀다. 오히려 프라이탁은 스스로의 활동이 콘셉트로 소비되는 걸 경계한다. 사람과 환경에 이로운 일을 도모하기 때문에 의외의 요소에 태만해지는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우리는 수없이 봤다. 프라이탁은 과격한 선동가가 아니라 영리한 브랜드가 되는 길을 택했다.“브랜드는 항상 자신만의 USP(Unique Selling Position)를 찾으려 노력합니다.” 프라이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다니엘 프라이탁은 재활용에 대한 프라이탁의 관점을 정리했다. “친환경적 접근법이 자신의 USP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전 그 부분에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봐요. 친환경이라는 개념은 절대 USP가 될 수 없습니다. 친환경은 기본 철학이 되어야 하며 프라이탁은 이런 철학 위에 세운 브랜드죠. 친환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친환경은 의무에 가까운 것이며, 저희는 항상 그 이상을 추구하려고 노력합니다.”프라이탁은 아이디어나 작가 정신으로만 근근이 연명하는 유사 브랜드가 아니다. 다니엘 프라이탁의 말대로 프라이탁은 사회·환경적 의식을 브랜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물건 스스로가, 물건을 파는 매장이, 그리고 그 물건을 기획하고 만드는 기업이 그 의식을 자연스럽게 담고 있길 바란다. 그러므로 프라이탁에게는 유기적인 시스템을 통해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있다.프라이탁의 제품 라인업은 프라이탁이 구현한 간결한 시스템 그 자체다. 보통 액세서리 브랜드는 매 시즌 새로운 디자인과 패턴을 선보이는 데 골몰한다. 반면 프라이탁은 재활용 소재의 태생적 제약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프라이탁 매장에선 같은 패턴의 동일한 가방을 찾기 어렵다. 어딘가에서 마음에 드는 패턴의 가방을 발견했다면 그건 프라이탁이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한 큰 퍼즐 중 한 조각을 찾아낸 것이다. 브랜드가 소재의 디자인과 패턴을 통제할 수 없으니, 오히려 통제할 수 없는 디자인과 패턴을 ‘우연성에 기댄 게임’처럼 만들어버리는 식이다. 이 우연성 덕분에 “프라이탁 제품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명제가 성립된다.프라이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우연 게임에 기꺼이 참여한다. 어떤 사용자들은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패턴을 찾기 위해 여행할 때마다 해당 도시의 프라이탁 매장을 방문한다고 고백한다. 프라이탁 애호가인 어느 유명 작가는 이미 7개의 프라이탁 가방을 가지고 있지만,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라인을 다 구매하고 싶다는 애착을 드러낸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이 우연성을 극대화한 서비스도 한동안 운영했다. 사용자의 취향대로 덮개 천의 면을 선택해 만들 수 있는 가방으로, 프라이탁 홈페이지에 접속해 5개로 조각난 평면도에 직접 패턴을 맞추도록 했다.이러한 시스템의 승리는 제한된 환경에서의 승리이기도 하다. 다니엘 프라이탁은 조건이나 환경의 제약이 훌륭한 시스템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한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과 현재 하는 일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제약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매우 좋다고 생각해요. 제약이 있음을 알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명확해지고 이를 계속 따라가면 되니까요. 때로는 스스로에게 이런 제한을 두어 운신의 폭을 좁히면 이제껏 없던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프라이탁이 트럭 덮개 천 말고 전혀 다른 성격의 재활용 소재에 기웃거렸다면, 혹은 트럭 덮개 천을 직접 디자인하려 애썼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재활용이라는 단어에 기댄 브랜드거나 재활용이란 껍데기를 쓴 브랜드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산업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봐도 기념비적인 성취나 창의적인 발상은 자원의 풍족함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결핍이나 제약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에게 되레 확실한 기회다. 제약은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게 한다. 상황에 집중하면 ‘더 나은 것’을 선택하게 된다. 더 나은 것 하나를 고르면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뾰족해진다. 편집장인 타일러 브륄레 역시 “돈이 아주 많으면 모든 것을 시도해볼 수 있지만, 저희는 무엇을 진행하느냐에 대해 아주 신중하게 접근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프라이탁이 트럭 덮개 천 말고 전혀 다른 성격의 재활용 소재에 기웃거렸다면, 혹은 트럭 덮개 천을 직접 디자인하려 애썼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재활용이라는 단어에 기댄 브랜드가 되거나 재활용이란 껍데기를 쓴 브랜드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프라이탁은 제품 소재라는 피동적인 제약의 상태를 넘어 자발적인 제약을 만들기도 한다. 스스로 스포츠의 규칙처럼 제한적인 상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제약이란 생산, 창작, 행정, 유통 등 모든 분야의 유기적 통합이다. 자원과 아이디어를 쪼개 쓰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방식이다. 이러면 각 부서의 동상이몽을 막을 수 있으며 이는 곧 경영이 방만해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스템 덕분에 프라이탁은 생산 현장의 아이디어를 창작으로 이어갈 수 있다. 행정의 효율을 위해 떠올린 방법이 유통 단계에서 응용되기도 한다.프라이탁이 2015년 출시한 의류 라인업인 ‘F-ABRIC’은 대표적인 프라이탁풍 통합의 결과물이다. ‘F-ABRIC’은 원단 제작부터 프라이탁이 직접 개입해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 역시 직원들의 작업복을 기획하다가 상품화한 프로젝트다. 프라이탁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진열용 선반 역시 제작 공장과 사무실에서도 쓰고 있다. 프라이탁 공장 벽면의 색인 에메랄드 그린을 제품 식별표의 색으로 쓰기도 한다.프라이탁이 브랜드를 운영하는 방식은 이처럼 유기적이고 경계 없는 통합에 가깝다. 브랜드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목표가 제조, 마케팅, 판매 등 모든 영역에 균일하게 적용된다. 프라이탁 직원은 모두 가방 제작에 쓰는 덮개 천을 직접 자른다. 가방을 팔아보기도 한다. 심지어 기획자나 디자이너가 회계 부서에서 일하기도 한다.“우리에게 필요할까? 정말 우리가 만족할 만한 걸까?” 다니엘 프라이탁은 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고백한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브랜드란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품의 가치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며, 브랜드를 만드는 전 과정에서 일관적인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자체가 곧 누군가의 스타일이 되는 것. 프라이탁에게 브랜드란 곧 기업이 만들고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접근법이자 해결책이다. 프라이탁이 ‘재활용’이 아닌 ‘순환(cycle)’을 브랜드의 모토를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