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천생 도시인이 떠난 4년간의 시골 여행

시골에서 네 살을 더 먹었다

BYESQUIRE2020.01.13
 
 
 

시골에서 네 살을 더 먹었다 

 
 
 
1월호를 위한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뜬금없이 몇 년 전, 그러니까 패션 에디터였던 시절의 시무식이 떠오른다. 우수한 실적을 낸 직원과 팀에게 표창장을 주고 팀장이 상을 받으러 나가면 팀원들이 ‘우우’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대표가 근엄한 소리로 올해의 목표를 공표하는 것까지는 이전의 시무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따로 있었으니,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이사인지 상무인지 아무튼 새로 부임한 높은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괴상한 낙하산 인사에 관하여, 그에 따라 앞으로 자신이 어떤 정치적 액션을 취하면 좋을지에 관하여, 더 나아가 이 회사의 미래에 관하여 고민했겠지만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패션 에디터들은 좀 다른 고민에 빠졌다. 평소라면 비뚜름하게 짝다리로 서서 이거 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며 세상 바쁜 척을 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신년의 새로운 우정을 다졌을 우리지만, 그날만큼은 다 같이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다. 저 코트는 이번 시즌 셀린느가 확실한데, 스커트를 모르겠네? 보테가 베네타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 저런 패턴은 없었는데, 좀 지난 에르메스인가? 열띤 토론 끝에 신임 이사인지 상무인지의 스타일에 관한 평을 마치고 그 룩을 완성하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쯤의 돈이 필요한지 그 총액이 산출되었을 즈음 비로소 시무식이 끝났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흠, 여태까지 가장 흥미로운 시무식이군!”
시무식이 없는 새해를 맞이한 게 올해로 다섯 번째다. 신상품은 마치 파도처럼 쉬지 않고 밀려오고, 헌 상품은 거품이 되어 멀어지던 세계, 지난 시즌 컬렉션과 이번 시즌 컬렉션이 어떻게 다른지 그 미세한 변화를 진지하게 논하던, 실체 없는 부러움과 열등감과 자부심으로 가득하던 가격 미정의 세계를 떠나 시골에 와서 지낸 지 햇수로 5년이다. 서울에는 오늘 미세먼지가 창궐했다는데, 서울에서 300km 떨어진 이곳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에는 봄 같은 볕이 한창이다. 마당에는 몇몇 봄꽃이 철모르고 피어났다. 헷갈릴 만한 날씨다. 마침 볕이 좋으니 오늘은 남은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한 중요한 숙제를 할 참이다.
더 로우의 블랙 코트와 스텔라 맥카트니의 헤링본 재킷, 구찌 백이나 처치스 첼시 부츠 같은 것, 그리고 남편의 준야 와타나베 재킷과 프라다 샌들 같은 것을 모두 꺼내 마당에 늘어놓는다. 도시에서 큰맘 먹고 샀던 많은 것들이 이곳 시골의 옷장과 신발장 깊숙한 곳에 방치되었다가 이런 날 드물게 마당으로 나와 콧바람 쐬는 신세가 되었다. 점심시간 이후에 잠깐 제공되는 제소자들의 운동 시간처럼 그들의 외출은 짧다. 자유 시간이 끝나면 그들은 한 묶음이 되어 다시 방치될 것이다.
지난 4년은 파타고니아와 리바이스와 하바이아나스의 날들이었다. 편하고 질긴 옷을 입고서 춥게 살았다. 여행객들에게 아래채 방을 내주고 숙박료를 받고, 배밭에서 꽃과 열매를 따고 일당을 받기도 하고, 원고료가 입금된 날엔 소고기를 사 먹었다. 고장 난 집을 엄청 미워하다가 고친 뒤 다시 사랑하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멀어지고, 크게 상처받고 돌아와 웅크리고 누워 서로를 핥아주며 회복하고. 뭐 그런 시시한 날들이었다. 한 달은 긴데 일 년은 짧았다. 하루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서울에서 오는 안부 메시지에 나는 잘 지내 너도 별일 없지 우리 얼른 만나자 하고 답했지만, 나는 잘 못 지내는 날도 많았고 상대는 별일이 있었으니 내가 생각났을 거였고 우리는 얼른 만나지 못할 것이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살던 시절의 그 가슴 뛰는 현장을 추억하며 허기를 느끼면서도 도시에서 두 손 꽉 쥐고 전력 질주하고 있는 친구들을 연민하는 이중적인 맘을 품고서, 아닌 척했다. 해 뜨면 눈을 뜨고 해가 지면 일하기를 멈추고 비가 오면 집 안에 머무는 삶. 어떤 날엔 드디어 땅에 뿌리를 내리는구나 싶은 기분에 안도하다가, 또 어떤 날엔 망망한 바다에 조각배 타고 떠다니는 것 같은 아득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시시한 이야기를 모아 수십 개의 칼럼과 한 권의  책을 썼고, 지금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끊임없이 시골 생활에 대해 썼다. 요청이 많기도 했고 내가 원하기도 했다. 영영 주저앉은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살다 보면 그냥저냥 살아질 텐데, 어느 날 문득 여기는 대체 어딘가, 이토록 게으르게 사는 이 몸뚱이는 뭔가, 살이 좀 쪘나 재볼까 역시 좀 쪘군, 근데 나 정말 이렇게 나태하게 불안하게 걱정을 끼치며 염치없게, 아슬아슬한 잔고를 가지고 가볍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됐다 그냥 원고나 좀 쓰자 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끼니때가 돌아왔다. 규칙적으로 집밥을 지어 먹고 읽고 쓰는 생활이었지만 세세한 루틴을 만들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어떤 날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되었지만 당면한 문제를 조금씩 외면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나의 생활을 아름답게 꾸며서 썼고, 그러면 곧 태연해졌다. 내가 뱉은 글들이 나를 변호해주었다.
가끔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도 안 변했네 하며 놀란다. 나도 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4년 넘게 살았지만 변한 건 거의 없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이탈리아 브랜드의 유기농 화장품을 비싼 돈 주고 사서 바른다. 읽고 싶은 책을 다 사기엔 살림이 얄팍해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 노력하지만, 빌린 책의 책장에서 웬 코딱지를 발견한 뒤로는(진짜다!) 희망 도서로 신청한 신간만 빌린다. 녹차로 유명한 동네에 살지만 커피만 줄곧 마신다. 오일장에서 채소는 사지만 바닥에 늘어놓은 해산물은 안 산다. 귀촌 첫해에 텃밭 농사를 경험한 뒤로는 채소가 아니라 꽃만 심는다. 김치는 물론 효소나 장아찌 따위를 항아리에 담아 땅에 파묻을 것 같지만, 엄마나 시엄마나 옆집 할머니에게 김치를 얻어먹는다. 뒷산이 지리산인데 집 밖에 안 나가는 날이 더 많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한 날이 더 많다.
그러나 변한 부분도 없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세끼 밥을 직접 지어 먹는 사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사람, 마당의 열매를 거두어 멀리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사람, 자연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도시에서 막연히 꿈꾸던 자연은 고요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자연은 끊임없이 떠드는 것이었다. 한없이 넓은 아량으로 품어줄 것 같다가도 악악거리며 바람이며 폭우며 번개며 지진 같은 것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밤이면 집에 틀어박혀 산짐승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기도했다. 땅의 모든 것을 재배치시킬 것 같은 큰비가 밤새 내려도 아침이 오면 능청스럽게도 신기하게 해가 나왔다. 햇살을 맞으며 새들이 다시 짹짹거리는 통에 간밤의 기도는 쉽게 잊히곤 했다. 이악스럽게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을 가까이 느낄수록 인간들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나쁜지 실감하게 되었다. 지난 4년 사이에 더 나빠진 것들, 이를테면 새벽 배송이나 과대 포장이나 얼음 팩이나 플라스틱 같은 것들을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하던 과거의 내가 오늘 먹은 과일의 씨앗을 틔워 미래의 나무로 가꾸는 사람이 된 것(진짜다! 우리 집에 레몬 나무랑 아보카도 나무가 있다)은 순전히 이 집의 공로다. 이 작고 아름다운 집에서 나는 거짓말로 꾸미지 않고 궁상을 벗어나는 법에 대해, 가난해도 품위를 지키는 일에 관해 난생처음 생각했다. 지난 쇼핑의 카드값을 메우기 위한 돈이 아닌, 순수하게 먹고 살기 위한 오만원 팔만원 그런 것들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잠시 정지하고 생활이 재정비되는 경험을 하는 사이 나는 네 살을 더 먹었고, 이제 또 다른 선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직 한참 더 이 수다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지만 지면이 정해져 있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 달에 계속해야겠다. 별안간 또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군, 그 변덕 어디 가겠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시 생활은 요동칠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새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담담하다. 안토니오 마차도의 시구를 빌려, 어차피 ‘길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한 걸음씩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