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와이너리에서부터 인쇄소, 공항, 설탕공장까지 호텔로 변신한 다양한 건물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용도에 품을 내줬던, 지금은 나의 아늑한 호텔들.

BYESQUIRE2020.01.24
 
 

원스 어폰 어 타임 

 
Dexamenes Seaside Hotel Peloponnese, Greeces ㅣ Before : 와이너리
펠로폰네소스는 역사적 전쟁으로 유명한 땅이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사이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야말로 기원전 시대의 세계대전이라 할 만한 사건이었고, 이 지역을 포함한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딱 한 시기, 1880년대에 이 땅이 다른 요소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건포도였다. 1879년 프랑스를 강타했던 필록세라(포도나무뿌리진디) 덕분에 그리스의 건포도가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선박들이 펠로폰네소스 항구를 오갔고, 철도를 비롯한 사회 인프라가 건포도 재배 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비극은 프랑스가 새로운 포도를 심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단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 1890년 그리스는 ‘건포도 위기(raison crisis)’를 맞이했다. 그리스 정부는 갖은 정책을 동원해 전국의 건포도 농가를 지키고자 했다. 와이너리를 육성하는 것도 그 방편 중 하나였다.
덱사메네스 호텔의 정체는 1920년대 펠로폰네소스 서부 코우로우타 해변(Kourouta Beach)에 지은 와이너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와이너리로 지었다가 폐허로 오래도록 방치되었던 공간. 건축 사무소 K-스튜디오는 시간의 흔적을 오롯이 남기고 새로운 재료 사용을 최소화해 재건축을 진행했다. 명민한 판단이었다. 한때 풍요가 휩쓸고 간 폐허만큼 휴식을 은유하는 공간은 드물 테니까. 물론 TV, 냉장고, 와이파이, 룸서비스까지 편의 시설도 꼼꼼히 갖췄다.
dexamenes.com Instagram dexamenes
 

 
Stamba Hotel Tbilisi, Georgia l Before : 인쇄소
각 호텔의 소개 형식을 맞추려는 의도였으나, 스탬바 호텔의 원래 정체를 ‘인쇄소’라고만 달아놓는 건 역시 마땅치 않은 일이다. 좀 더 장황한 수식이 필요하다. 스탬바 호텔의 전신은 소비에트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도시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위치한 1930년대 건축물. 구소련 시절 조지아의 첫 사회주의 신문을 만들던 인쇄소다.
이 호텔에서 주목할 점은 시대의 유산을 활용한 방식이다. 콘크리트 벽, 파사드, 창고형 창문 등 본래의 브루탈리즘 건축양식이 드러난 요소는 그대로 활용했으며, 건물 중심부는 5층까지 터서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 공간의 나무를 지탱하는 데에 인쇄소에서 출력물을 널어 말리던 기둥을 활용했다. 과거를 보존하며, 새로운 건축적 경험을 접목하고, 그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고민했다는 뜻. 백미는 유리 바닥으로 조성한 루프톱 수영장이다. 수영장을 통과한 햇볕은 로비와 그 속의 식물을 따사롭게 비춘다. 벽돌 벽면부터 황동 욕조, 장인이 만든 타일, 서가에 촘촘히 꽂힌 서적 등 세심한 손길은 객실까지 이어진다.
stambahotel.com Instagram stamba.hotel
 

 
TWA HOTEL/David Mitchell

TWA HOTEL/David Mitchell

TWA HOTEL/David Mitchell

TWA HOTEL/David Mitchell

TWA Hotel New York, USA l Before : 공항 게이트

TWA는 ‘트랜스 월드 항공(Trans World Airlines)’의 약자. 193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팬암과 쌍두마차를 이뤘던 미국의 민간 항공사 이름이다. 이 회사는 2001년 아메리칸 항공에 합병되며 사라졌으나 이들이 사용한 뉴욕 JFK 공항의 TWA 플라이트 센터가 남았다. 신식 항공기와 사이즈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폐쇄되긴 했지만. 2015년 이 공간을 장기간 임차하기로 한 건 호텔 전문 업체인 MCR과 뉴욕 하이라인 호텔 프로젝트로 이름을 떨친 모스 개발이었다. 이들은 게이트를 재단장해 에어포트 호텔을 만들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방음이었다. 모스 개발은 7장의 유리판을 겹쳐 두께 11.5cm의 특수 창을 만들었다. 활주로를 조망할 수 있게 하면서도 소음과 진동은 최소화하기 위해서. 탑승객 대기실은 호텔 로비와 이벤트 센터가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512개의 객실, 6개 레스토랑, 8개 바가 조성되었다. 인테리어 콘셉트는 ‘미드센추리 모던’. 터미널이 처음 생겨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원 건축가 에로 사리넨이 디자인한 놀(Knoll)사의 가구를 적극 활용했다. 가장 주목할 시설 중 하나는 풀 바다. 활주로를 오가는 비행기를 보며 인피니티 풀에서 유유자적 헤엄을 칠 수 있다.
twahotel.com Instagram twahotel
 

 
The Standard, London London, UK l Before : 시청 별관

런던 킹스크로스의 캠던 시청(Camden Town Hall) 별관 건물에 들어선 호텔. 미국의 부티크 호텔 브랜드 더 스탠더드의 첫 해외 지사다. 더 스탠더드 런던의 다층적 매력은 이런 ‘출생의 비밀’에 연원한다. 전형적인 듯 독창적이고 엄숙한 듯 재기 넘치는 디자인. 흡사 반 고흐가 그린 우키요에 모작처럼, 나름의 재해석이 원본보다 더 오묘한 분위기를 낸다고 할까.
가장 큰 특징은 파사드다. 더 스탠더드는 캠던 시청의 상징인 모서리가 둥글고 아래위로 길쭉한 유리창 패턴을 유지하고자 했다. 대신 파사드의 패널과 유리의 방음 성능을 보강했다. 디자인의 방점은 외벽을 오르내리는 빨간 엘리베이터다. 이 엘리베이터는 곧장 10층의 스페인 레스토랑 데시모(Decimo)로 향하는데, 세인트판크라스 역을 중심으로 한 근사한 시티 뷰를 만날 수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든, 레스토랑의 360도 창에서든.
standardhotels.com/london Instagram thestandardlondon
 

 
Shinola Hotel Detroit, USA l Before : 백화점

미국 디트로이트 타운 우드워드 애버뉴의 103년 된 백화점 건물을 활용한 호텔이다. 그러나 ‘무엇을’ 고쳤는가에만 주목한다면 이 호텔의 반쪽밖에 보지 못한다. 누가, 왜 이런 호텔을 만들었는지도 살펴야 한다. 시놀라는 1877년 구두약 제조사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공식 보급품 기업으로 채택되며 명성을 쌓은 브랜드다. 그 명맥은 1960년대에 끊겼으나 특유의 정신은 이어져 2011년 그 이름을 계승한 새 브랜드가 생겨났다. 시놀라의 본거지 디트로이트에. 당시만 해도 디트로이트는 도시 자체가 파산에 이를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시놀라는 이전 자동차 공장에 터를 잡고 실업자 신세였던 장인들을 고용해 완고하고도 수준 높은 ‘메이드 인 USA’ 시계를 만들었다. 이 시계는 다양한 신화를 남겼다. 출시 이틀 만에 완판됐다거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14개를 구입했다거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영국 총리에게 선물했다거나. 시놀라는 곧 자전거, 오디오, 가죽 액세서리까지 제품군을 확장했다.
시놀라 호텔도 이런 행보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추락하는 도시에 들어와 잊고 있던 자긍심을 일깨워준 브랜드는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을 매입해 풍요로웠던 시대의 미감을 다시 구현했고, 오직 영광스러운 브랜드의 제품으로 채워 넣었다. 객실 벽면부터 감자칩에 이르기까지 전부 ‘메이드 인 USA’로 말이다. 호텔 객실 사진을 이토록 백화점 카탈로그처럼 찍어놓은 데에는 그런 사정이 숨어 있다.
shinolahotel.com Instagram shinolahotel
 

 
Exmo. Hotel Porto, Portugal l Before : 은행

엑스모 호텔은 본래 은행이었다. 아니, ‘본래’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그 전에는 오피스 빌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전에는 보험사였고, 그 전에는 창고였다. 아마 처음에는 누군가의 집으로 지었을 것이다. 두 개의 나란한 건축물은 긴 시간 다양한 변화를 거치며 어느새 하나의 건물로 합쳐졌고, 아마 14세기 후반이나 15세기쯤 지은 것 같다고, 건축 시기도 어렴풋이 추측만 할 따름이다.
재건축의 최대 목표는 건물에 깃든 무수한 계층의 역사성을 가급적 손상시키지 않으며, 동시에 그것을 4성급 호텔의 맥락에 옮기는 것이었다. 플로레 건축 사무소는 건물 내에서 콘크리트 석판을 활용해 유지·보수한 20세기의 흔적을 발견했고 그걸 확장하는 형태로 작업하기로 했다. 파사드의 주요 석조 벽돌 구조와 중세 약어가 새겨진 비문 등 장식 요소는 그대로 유지했다. 물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객실의 석조 벽면이나 19세기에 지은 아치형 통로도 엑스모 호텔의 큰 특징 중 하나다.
exmohotel.com Instagram exmohote
 

 
Alila Yangshuo Guilin, China l Before : 설탕 공장
용도를 변경한 호텔의 묘미는 그 시설의 내부에만 있지 않다. 해당 건물의 입지적 맥락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이 호텔은 중국 계림의, 상식을 따르자면 절대 호텔이 들어설 리 없는 외딴 골짜기에 지어졌다. 지역의 사탕수수와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설탕 공장이라면 또 모를까. 알릴라 양숴는 베이징 기반의 건축 사무소 벡터 아키텍츠가 방치되어 있던 설탕 공장을 재단장해 만든 호텔이다. 이들은 낡은 색조와 벽돌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에 이질감 없이 어우러질 현대적 재료와 시공 방법을 최대한 접목했고, 그 개성적인 결과물은 가히 ‘중국식 인더스트리얼 미학’이라 할 만하다. 내부는 전통 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오직 중국인 예술가들의 작업으로만 채워졌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알릴라 양숴의 가장 큰 매력은 추호도 개발되지 않은 주변 환경이다. 계림은 20위안 화폐 뒷면에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정평이 난 곳. 호텔은 카르트 지형의 웅장한 산과 유유히 흐르는 리강(Li River)에 둘러싸여 있다. 환경을 좀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호텔에서 간단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는 한다. 암벽 등반, 자전거 투어, 크루즈 투어 같은 것. 다만 이때 ‘크루즈’란 늙은 사공이 기다란 장대로 운전하는 대나무 뗏목을 뜻한다는 사실이, 이 호텔이 선사해줄 경험에 대한 일종의 단서가 되겠다.
alilahotels.com/cn/yangshuo Instagram yangsh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