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멈춘 두 달을 보내며
」
2월 말부터 이런 문자 메시지가 계속해서 날아온다. 내가 마지막으로 관람한 공연은 2월 19일에 있었던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의 리사이틀. 오늘이 4월 14일이니까 거의 두 달 가까이 어떤 공연도 보지 못한 셈이다. 코로나19 때문에 클래식부터 대중음악까지 공연이 줄줄이 취소 행렬이다. 기획사들은 버티기 어려워 직원에게 무급 휴가를 줘가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지경. 팍팍한 주머니 사정은 아티스트도 매한가지다.
“이달 레슨비를 조금 일찍 받을 수 없을까요?”
장구를 배우는 지인이 레슨 선생에게 이런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은 국악계에서 명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으로 시류나 금전에 영합하지 않고 꿋꿋이 자기 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는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때그때 공연 매출과 레슨 수입으로 한 달을 살아내는 사람. 그러다 공연 매출이 뚝 끊겨 레슨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자 제자에게 이런 아쉬운 소리를 한 것이다. 오죽 절박하면 레슨비 20만원을 놓고 그런 부탁을 하겠느냐며 지인은 탄식했다.
이렇다 보니 다달이 집으로 배송되는 서울시향 월간지 〈SPO〉를 보면 묘한 감정이 든다. 〈SPO〉는 그달에 진행되는 정기 공연의 가이드북을 겸하는 형태로 만든다. 그런데 최근 4월호의 내용을 보면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정기 공연이 취소됐다는 걸 알면서도 여느 때처럼 가이드북을 만든 것이다.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공연을 관람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착잡한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그래도 우린 월급이라도 나오니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답은 그 둘이 적당히 섞인 어느 지점이 아닐까 싶다.
두 달 가까이 공연과 담을 쌓고 산 건 정확히 10년 만이다. 2011년에 예술의전당 객원 기자로 선임되며 프레스 카드를 받았는데 그건 모든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R석 45만원에 달하는 베를린 필의 내한 공연까지 몽땅! 당시 나는 갓 등단한 소설가로 일주일에 1~2일만 학생을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은 글쓰기와 책 읽기에 할애했다. 시간이 넉넉했던 덕분에 줄기차게 예술의전당에 가서 공연을 보곤 했는데 그러다 중독되기에 이르렀다.
프레스 카드를 반납한 이후에도 매년 적게는 50회, 많게는 100회 이상 공연을 관람했다. 연말연시가 되면 ‘새해엔 공연 관람을 줄여야지!’라고 다짐하지만 금세 어그러진다. 결심이 머쓱하게 서울시향 시즌권을 비롯해 이런저런 공연을 예매하기 일쑤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콘서트 고어(concert goer)로 살아온 셈이다.
공연이 없는 두 달은 마치 하나의 실험 같았다. 음악을 즐기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인, 심지어 그중에서도 유난히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라이브’가 소거된 특이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음악에서 라이브가 차지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아티스트와 곡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으로, 그 정수는 영상이나 음원에 절대 담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 축이다. 라이브만이 진짜 음악이라는 입장까진 아니지만 라이브에서만 만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데엔 동의한다. 그 어떤 첨단 장비로도 현장의 소리와 기류를 온전히 담을 수 없고, 아티스트가 풍기는 바이브와 관객과의 교감은 오직 그곳에만 있다. 나 역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오디오 시스템을 구축하고 CD도 제법 수집했지만 거기서 해소되지 않는 근원적인 갈망이 있기에 공연장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일상에서 공연을 가져갔다. 환불되는 금액을 보며 ‘와, 돈 굳었다!’라며 낄낄 웃지만 실제론 허전한 마음이 더 크다. 음악을 현장에서 즐기지 못하는 일상은 너무 오래간만이어서 낯설다. 한데 비단 나만 이런 게 아닌가 보다. 온라인 콘서트 정보를 여기저기 잽싸게 나르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라도 공연에 대한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때를 틈타 그동안 온라인 플랫폼을 다져온 강자들이 한발 더 치고 나간다는 점이다. 베를린 필, 뉴욕 메트 오페라단 등은 그간의 공연을 빼어난 화질과 음질로 서비스하는 플랫폼을 갖고 있는데, 이걸 코로나19로 시름에 잠긴 세계인을 응원한다며 임시로 무료 개방했다. 보물 창고가 열리자 애호가는 물론 음악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가 계정을 만들어 즐기는 형국이다. 이미 최고 반열인 그들이 한 단계 더 올라서는 구도.
클래식 명가 도이치 그라모폰이 개최한 온라인 콘서트도 화제였다. 루돌프 부흐빈더, 마리아 주앙 피르스, 예브게니 키신 등 스타 피아니스트 아홉 명이 각자의 집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20~30분간 촬영해 보내왔다. 참여자의 면면도 화려했지만 개인 영상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화질, 음질은 아쉬워도 평소 보기 힘든 내밀한 모습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20만 명이 시청했다고 하니 전례 없는 팬 서비스인 동시에 강력한 마케팅이다.
국내 오케스트라들도 정기 공연을 취소한 데 대한 미안함과 코로나19에 맞서는 마음을 담아 관객 없이 공연을 치르는 영상을 몇 차례 생중계했다.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퀄리티 면에서 외국 명문 악단의 정식 온라인 플랫폼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지금 시국에 함께 음악을 나눈다는 것 자체에 박수를 보냈다.
코로나19는 공연 이면에 숨어 있던 이런저런 것을 표면에 끄집어냈다. 먼저 세계 정상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이 새 시대에 맞춰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으며 현재 그 격차를 어느 수준까지 벌렸는지를 입증했다. 클래식은 같은 곡을 다양한 연주자의 기량과 해석으로 즐기는 장르이다 보니 확실한 경쟁력이 없으면 금세 도태된다. 장소와 정원의 제약이 없는 온라인 콘서트는 이를 더욱 극명히 보여준다. 검증된 강자가 문을 열어주자 다들 거기로 몰려갔다.
아울러 내가 공연을 순수한 음악적 목적으로 즐기지 않았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됐다. 연주자와 곡의 진가를 직접 느끼겠답시고 돈과 시간을 들여 공연장을 찾아 이리저리 평가하는 데 열을 올렸으나, 사실 그건 둘째가는 목적이었다. 음악의 정수는 꼭 현장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며 감상 환경이 좋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장엔 현장만의, 녹음엔 녹음만의 세계와 기준이 존재하기에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며 보완하면 된다.
꼭 공연장이어야만 하는 건 차라리 ‘내가 여기서 함께했다’는 특유의 유대감이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흘러 공연을 추억할 때 가장 뚜렷하고 진하게 각인되어 있는 건 이 지점이었다. 클래식, 록, 재즈, 아이돌 할 것 없이 늘 그랬다. 세세한 비평은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지지만 그런 유대감은 반대로 더 짙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가장 그리운 건 서울시향의 정기 공연이다. 10년 넘도록 시즌권을 끊어서 죽 봐왔는데 연주가 최고여서가 아니다. 내가 사는 도시를 대표하는 악단과 함께 호흡하며 응원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코로나19가 내게서 잠시 앗아간 건 음악의 정수가 아니라 이런 유대감이다.
Who’s the writer?
홍형진은 2010년 〈문학사상〉 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소설가이자 현재 경기아트센터 전문가 자문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