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는 왜 미국 깡촌으로 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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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로 알려진 록 리티츠의 리허설 공간.

2019년 BTS의 〈LOVE YOURSELF: SPEAK YOURSELF ‘THE FINAL’〉 콘서트의 한 장면.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페렌첵의 이야기
BTS는 국제적인 거물이고, BTS가 이룬 이 모든 성취가 게리 페렌첵을 약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올해로 54세인 페렌첵은 펜실베이니아주 리티츠의 어느 옥수수밭 끝자락에 있는 자갈밭에 더블 슬라이드-아웃 캠핑카(양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형태의 캠핑카)를 세워두고 며칠 밤을 묵었다. 캠핑카 인근에는 그가 평소 몰고 다니는 1995년식 스바루 레거시와 로킹 허브가 달린 1992년식 지오 트래커(그는 이 차를 팔 궁리를 하고 있다)가 주차되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스튜디오로, 무광 검은색 금속판에 덮인 4831㎡(약 1460평) 면적의 상자형 건물이다. 건물 높이는 30m이며 네 곳의 하역장과 세미트레일러 한 대가 통과할 수 있는 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천장에 따라 격자꼴로 설치된 강철 빔은 도합 45만kg에 달하는 쇠사슬, 모터, 범퍼, 트러스, 조명, 스피커, 스크린을 지탱할 수 있다. 스튜디오는 세계 최대의 리허설 공간이며 세계 최고의 그룹들이 이곳을 사용한다. 몇 주 후면 BTS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들은 여름 투어의 연습을 위해 거의 한 달 동안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스튜디오는 ‘록 리티츠’라는 좀 더 큰 기업의 일부다. 록 리티츠는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호텔, 대규모 라이브 콘서트, 제품 출시, 테마파크, 크루즈 여객선, e-스포츠 등에 특화된 여러 회사가 들어선 39만㎡ 면적의 복합 시설이다. 라이브를 비롯해 거대한 행사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도 랭커스터 카운티에 속한 마을 리티츠는 수십 년 동안 음향 회사와 무대 제작 회사의 본고장이었다. 하지만 2014년의 그 소유주들은 스튜디오를 개장하고 록 리티츠를 설립하며 음악 산업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고 있다. 음반 판매는 예전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지만 스트리밍이 순이익을 도와주며, 큰돈은 투어에서 번다. 록 리티츠를 구성하는 회사들의 목표는 대형 투어를 준비하는 유명 그룹을 위해 원스톱 작업실을 제공하는 일이다. 록 리티츠는 이곳에서 무대를 만들고, 조명과 음향을 설계해 완성하고, 아티스트들이 며칠이나 몇 주 혹은 몇 달간의 리허설을 마친 뒤 전 세계 투어에 나서도록 돕는다.
BTS는 장비가 실린 30개의 컨테이너를 먼저 보냈다. 그들은 한동안 페렌첵의 새 이웃이 될 것이다. 이번 제작은 록 리티츠가 유치한 가장 큰 공연 중 하나가 될 것이며 테일러 스위프트의 2018년 레퓨테이션 투어에 비길 만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콘서트 투어 말이다. 페렌첵은 처음 스튜디오를 봤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장기 적출 시설처럼 생겼군.’ 불길해 보였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검은색 상자라니.
2014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그는 음향 엔지니어로 25년 동안 일하다가 떠돌아다니는 삶을 그만두고 스튜디오의 제작 및 운영 매니저로 록 리티츠에 합류했다. 그는 스튜디오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관리한다. 그날그날의 현지 인력을 확보하고, 케이터링을 점검하고, 하역장에서 트럭 운전수의 질문에 답하고, 화장실 휴지를 교체한다. 한번은 비욘세가 2016년 포메이션 투어를 리허설하던 중 비타민 B-12 주사(고용량의 비타민 B 주사)를 투여해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가 일요일 밤이라서 처음에 페렌첵은 리티츠에 단 하나뿐인 구급차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간호대 학생이자 공연 제작진으로 부업을 하던 그의 조카가 주사 투여 자격을 보유했던 것이다.
건장하고 술통 같은 체격에 짙은 회색 턱수염과 청회색 눈동자를 지닌 페렌첵은 항상 반바지(대부분 카고 포켓이 달린) 차림이다. 캠핑카는 늦은 밤에만 사용한다. 그의 집은 캠핑카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포츠타운에 있다. 뒤편에 차 3대를 세울 수 있는 차고가 딸린 단층 주택이지만, 출퇴근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 캠핑카가 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잘 해나가고 있다. 게다가 페렌첵은 한 무리의 영리하고 재능 넘치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슈퍼스타를 위한 꿈을 만들어가는 괴상한 오아시스인 록 리티츠를 좋아한다. 몇 년 전엔 토킹 헤즈의 전 멤버 데이비드 번이 아메리칸 유토피아 앨범의 투어 리허설을 하러 이곳에 온 적이 있다. 랭커스터 기차역으로 그를 데리러 가는 일은 페렌첵의 몫이었다. 수백 년 넘게 묵은 농장들 사이를 지나갈 때 번은 풍경을 훑어보며 거의 말이 없었다. 그는 보닛을 쓰고 맨발로 스쿠터에 타고 있던 아미시 여성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마주 손을 흔들었다. 랭커스터는 아미시 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가장 큰 카운티 중 하나다.

펜실베이니아주 리티츠 인근의 회사들은 역대 최고 수입을 올린 20개 투어 중 17개 투어의 제작에 도움을 주었다. 사진에 있는 건 콘서트 출입증이다.

트로이 클레어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1966년에 시작한 실험적인 음향 회사인 클레어 글로벌을 이끌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간혹 특정 도시나 마을이 한 산업이나 제품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곤 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빌의 슬러거, 캐롤라이나의 바비큐 소스, 실리콘밸리의 IT 산업 등이 그렇다. 일부는 정체불명의 시장 원리가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하트퍼드는 어떻게 해서 ‘세계 보험의 수도’가 되었을까? 그걸 누가 알겠나? 하지만 이야기는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코 시장 원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잘나갈 때도 인구가 9400명에 면적은 고작 6㎡에 불과한 펜실베이니아주의 리티츠가, 투어를 하는 슈퍼스타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장소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야기는 바로 사람에 관한 것이다.
기술의 세계에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시간이 갈수록 하드웨어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 기둥형 스피커의 무게는 개당 2700kg이나 나갔다. 요즘에는 1100kg이다. 오디오 장비를 넣는 데 필요한 적재 공간은 트럭 두 대에서 한 대로, 다시 4분의 3으로, 그리고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 투어 비용이 절약될 뿐만 아니라 공연에 가져갈 물건을 더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뜻이다. 예전의 아티스트는 오직 조명 기술자와 음향 기술자만 필요했지만, 요즘에는 영상 기술자, 자동화 기술자 혹은 레이저 전문가, 심지어 드론 오퍼레이터까지 있다. 유명 아티스트의 캐시 플로에서 투어는 팬이 CD를 산 돈을 벌어들이기 전 시절보다 훨씬 더 큰 역할(약 80%)을 차지한다. 냅스터가 출시된 해인 1999년에 미국 내 음반 매출은 총 223억 달러(약 28조4400억원)였다. 2019년 그 수치는 111억 달러(약 13조5500억원)까지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티켓 가격은 1996년의 25.81달러(약 3만원)에서 작년의 96.71달러(약 12만원)로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공연의 스펙터클 규모도 커졌다. 팬은 그저 앨범 매출의 손실을 채워주려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팬들은 공연을 보기 위해 드론 오퍼레이터에게도 돈을 지불하는 셈이다. 모든 공연은 완벽해야 한다. 아티스트와 크루는 연습을 해야 한다. 록 리티츠 이전에 아티스트들은 현지에 있는 허물어져가는 하키 경기장 따위를 리허설장으로 사용하곤 했다. 제작실은 어디냐고? 좀 큰 집의 화장실만 한 라커 룸이 고작이었다. 공연이 더욱 웅장해지고, 더 많은 리허설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화장실만 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려니 불평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록 리티츠의 스튜디오가 생기면서 아티스트들은 이 모든 불만을 해결할 수 있었다. 2018년에 호텔 록 리티츠가 개장하면서 주차장 건너편에 숙소도 생겼다. 이건 금상첨화일 뿐이다. 스튜디오 사용료 덕분에 사업이 짭짤하다. 보통 전체 경비가 대략 하루에 7500달러(약 915만원)다. 호텔에서의 1박으로만 1만 달러를 쓰는 투어 매니저에게는 눈썹 한 올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작은 금액이다. 개장 첫해에 스튜디오 사용률은 약 30%였다. 작년에는 약 85%가 예약됐다.

로저 워터스의 ‘더 월’의 일부로, 장식품으로 재사용되었다.
클레어 형제의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산층 부흥기에 10대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용돈의 대부분을 LP와 45회전 음반을 사는 데 썼다. 음반 레이블들은 새로운 수입원의 흐름을 포착하고 소속 뮤지션들을 순회공연에 내보냈다. 뮤지션들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목도한 기술적 진보에 익숙해졌고, 더는 동네 음반 가게에 매달린 조그만 스피커를 통해 자신의 히트곡을 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투어를 위한 음향 회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돈이 돌며 음악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클레어 형제는 고향에서 소규모 공연 일을 계속했다. 1966년 그들은 인근의 프랭클린&마셜 칼리지에서 열린 디온 워윅 공연에서 음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의 유명 남성 싱어 그룹인 포 시즌스의 리드 싱어 프랭키 발리와 연이 닿아 포 시즌스의 음향 작업을 맡았다. 발리는 로이와 진에게 콜럼버스, 톨레도, 신시내티에서 3일 연속으로 이어진 공연을 맡겼다. 형제는 40달러를 벌었다. 다른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는 음향 회사가 최초로 순회공연에 참가한 사례였다.
리티츠는 모라비아 교회가 1756년에 건설한 계획 공동체로 시작했으며 워윅 타운십이 이곳을 도넛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후 100년 동안 옛 개신교 분파인 모라비아 교도만이 이곳에 거주할 수 있었다. 1855년에 비모라비아 교도에게 개방되면서는 여러 세대를 내려온 근면하고 청렴한 문화를 전파했다.
로이와 진은 그들이 성장한 곳과 매우 닮았다. 근면한 일꾼으로 놀기 좋아하는 히피 성향이 적고, 기회를 찾으려 노력하며, 쉽게 돈을 벌려 들지 않았다. 큰돈을 벌고 싶다면 리티츠를 떠나라고 프랭키 발리가 조언하자 그들은 프랭키 발리와 결별했다. 포 시즌스가 확실히 한물갔을 때 형제는 록 밴드에게 자신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1968년 그들은 필라델피아의 대형 스타디움 ‘스펙트럼’에서 이를 실행에 옮겼다. 바로 크림의 고별 투어 공연이었다. 클레어 형제는 그때까지 아레나 공연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진공관 앰프로는 그 공간을 소리로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디애나주의 목회자였다가 엔지니어가 된 클레런스 무어가 만든 최초의 대중적인 트랜지스터 앰프인 ‘크라운 DC 300’에서 그들은 원하던 소리를 찾았다. 클레어 형제가 음향을 맡은 크림의 무대는 어땠느냐고? 클레어 형제는 공연장을 뒤흔들어버렸다.

마이클 테이트는 리티츠로 이주해 라이브 공연 업계의 가장 위대한 무대 제작 회사인 테이트 타워스를 설립했다.
스네이블리의 이야기
S4 제작은 스네이블리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S4는 자작나무 합판으로 만든 상자에 담긴 4방향 스피커로 우퍼, 미드레인지, 트위터를 조합해 공연에 필요한 소리의 모든 영역을 커버한다. 캐비닛 하나의 무게가 약 190kg이었다. 클레어 형제는 가로대 하나에 16개의 S4를 장착해 청중 위에 설치했는데, 이는 당시로는 완전히 새로운 음향 설계 방식이었다. 바닥에 쌓아 올린 스피커는 보통 바닥을 따라 음향의 파도를 전달한다. 그와는 달리 공중에 뜬 스피커는 높은 곳에서 청중을 감싼다. 공연장에 있는 모든 좌석에서 훨씬 향상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롤링스톤스의 리드 싱어이자 로큰롤의 상징 격인 믹 재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여러 대의 S4가 내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로드 스튜어트가 페이시즈와 함께 한 마지막 공연 중 하나였는데, 믹 재거는 롤링스톤스도 S4를 써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S4의 개발로 ‘클레어 브라더스 오디오’는 단순한 음향 회사에서 거대한 음향 시스템을 통해 소리를 강화하는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S4는 이 회사가 단 몇 시간 내에 엄청난 스피커를 쌓아 올리고 해체할 수 있는 회사로 거듭났던 순간을 기념하는 존재다. S4는 이동성을 고려해 설계했다. S4 2개를 붙인 폭은 세미트레일러 밑면에 딱 맞게 들어간다. 90도로 돌리면 유럽식 트럭의 적재 면에 4개가 딱 맞게 들어간다. 비용과 적재에 드는 시간이 모두 줄어들었다.
일을 시작한 지 2주째에 스네이블리는 82시간을 근무했다. 전에는 그렇게 일한 적이 없었고, 그 이후로는 계속 그렇게 일했다. 그와 동료들은 일에 쏟는 열정만큼 파티에도 열중했다. 언젠가 그는 ‘아이크&티나 터너(Ike & Tina Turner)’의 공연에서 음향을 담당하기 위해 뒤에 트레일러가 달린 스테이션 웨건을 타고 탬파로 향했다. 메릴랜드주 경계에 도달할 즈음 스네이블리의 차에 탄 사람들은 이미 6캔들이 맥주 한 세트와 마리화나 궐련 몇 대를 해치웠다. 주 경계는 리티츠에서 고작 50km밖에 되지 않았다.
[ 테이트의 이야기 ]
1974년에 예스와 투어를 하는 동안 클레어 형제는 마이클 테이트를 만났다. 뻣뻣하고 다루기 힘든 호주 사람 테이트는 당시 예스의 매니저였는데 밴드의 조명 담당을 자청했다. 그는 장비를 구입하지 않고 직접 만들었다. 커피 캔에 넣은 12볼트 안개등, 강철관, 그리고 잉여 군수품 상점에서 구한 저항기로 자신만의 첫 조명 장치를 만들었다.
클레어 형제는 만나자마자 그가 마음에 들었다. 테이트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청중뿐만 아니라 뮤지션의 심리도 말이죠.” 그의 말이다. 한번은 그가 엘튼 존의 무대를 준비하면서 엘튼 존의 귀 높이에 드럼 키트를 수직으로 배치하겠다는 내용의 기획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엘튼 존을 미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테이트가 한 말이다. “모든 것을 밴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해요. 밴드의 흥이 올라야 청중의 흥도 오르는 법이거든요.”
결국 클레어 형제는 테이트가 런던에서 바다 건너 리티츠로 넘어오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978년 이곳에서 테이트는 로큰롤 최초의 회전식 무대를 고안했다. 그는 이를 예스에게 ‘윈-윈’ 전략으로 제안했다. 청중은 뭔가 친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밴드는 더 많은 좌석을 팔아치울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테이트가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고, 그래서 그는 리티츠의 초등학교 체육관을 임시 작업장으로 삼았다. 클레어 형제 역시 현지 학교 공간을 빌렸다. 아티스트들은 투어에 나서기 전에 장비를 시험하기 위해 리티츠에 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에 수업이 없을 때만 장비 테스트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피터 프램튼이 만하임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연습할 때는 수백 명의 10대들이 리허설장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런 일에 질려버린 테이트는 클레어 형제와 함께 리티츠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박스 형태의 공장을 사버렸다. 공장에서 가장 큰 건물 내부를 싹 비운 뒤 천장 근처에 4톤짜리 I자 빔을 설치하고 히코리 나무로 된 바닥재를 컨트롤 룸 벽재로 재사용했다. 15만 달러 상당의 장비로 거대한 박스 안을 채웠다. 리허설 공간은 면적이 370㎡(약 112평), 높이는 11m에 달했다. 록 리티츠의 시험판이 완성된 셈이다.
그들은 첫 번째 고객인 빌리 조엘의 도착에 맞춰 준비를 끝냈다. 테이트는 공장의 다른 건물에 새로 설립한 조명 회사를 위한 작업장을 만들었다. 그 회사 이름은 ‘테이트 타워스’(현재의 테이트)라 지었다. 수납 상자에 접어 넣었다가 다시 펼칠 수 있도록 텔레스코픽 가스압 실린더를 활용해 자신이 만든 조명탑에 자기 성을 붙였다.
그러나 자동화 조명은 성장하는 산업이었다. 테이트 타워스의 1년 치 예산보다 많은 돈을 R&D에 쓰는 회사들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한편 예스의 회전 무대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갔고 주문이 밀려들었다. 테이트는 돈이 흐르는 방향을 좇아 무대 제작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늘 순조롭지는 않았다. 1982년 올리비아 뉴튼존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동안 어떤 목수가 테이블 톱으로 그의 중요한 부위를 잘라버릴 뻔한 일도 있었다.

아토믹사의 용접공. 아토믹은 록 리티츠에 입주한 30개가 넘는 회사 중 하나다.
펠저의 이야기
밖에서 들어보니 안에서만큼 좋게 들리지 않았다. 펠저는 내장을 뒤흔들 정도로 깊게 출렁이며 퍼져나가는 소리 때문에 듣기가 힘들었다. 그는 메스꺼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펠저는 스튜디오의 설계 기사이며 그 건설을 감독했다. 당시는 그들이 공사를 끝낸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셔의 노래 ‘러브 인 디스 클럽’이 나오기 시작했고 스튜디오는 거대한 서브우퍼(초저음역을 담당하는 보조 스피커)로 바뀌어 있었다. ‘이거 곤란한데.’ 펠저는 생각했다.
펠저는 단순한 도급업자가 아니다. 그는 가족이다. 펠저의 사촌인 스킵은 로이 클레어와 결혼했다. 워윅 고등학교에 재학 중에 펠저는 예스의 ‘로디’ 노릇을 하며 투어를 따라다녔다. 1978년에 펠저는 7개월에 걸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다크니스 온 디 에지 오브 타운’ 투어에서 로디로 일하느라 대학교를 1년 쉬었다. 스프링스틴은 완벽을 요구했다. 새 공연장에서 사운드 체크를 하면서 ‘E 스트리트 밴드’(스프링스틴의 밴드, 조용필과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과의 관계와 비슷하다)가 무대에서 계속 노래를 이어가는 동안 그는 좌석 사이를 걸으며 불협화음이 들리는지 확인했다. 스프링스틴에게 합류한 것은 클레어 형제의 최측근인 브루스 잭슨과 사촌인 네드였다. 스프링스틴은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잭슨에게 수정을 요청했고 펠저는 메모했다. 그들은 네드를 ‘네들리’라고 불렀다. “가서 저 스피커를 기울여줘, 네들리!” “무대 조명에 천을 더 걸어줘, 네들리!”
펠저는 투어를 계속한다면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연인인 데비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리티츠에 정착해 건설업을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지나온 길은 로큰롤과 별로 많이 겹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그는 현지 건설 회사의 고위직을 끝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대형 프로젝트는 리티츠 바로 북쪽의 워윅에 위치한 클레어사의 신규 사옥이었다. 그곳의 주소인 ‘엘렌 애버뉴 1’은 로이와 진의 어머니 이름에서 따왔다.
2011년경 워윅 타운의 관리인은 클레어사와 테이트 타워에 연락해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엘렌 애버뉴에 인접한 39헥타르의 농장이 사용 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워윅 타운이 그 땅의 용도를 농업에서 공업으로 변경한다면 그들이 매입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당시 두 회사 간의 유대 관계는 약화되고 있었다. 두 회사 모두 2세대 경영진 밑에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진의 아들인 트로이 클레어는 현재 클레어 글로벌이 담당하는 사업의 국제적 확장을 맡았다. 마이클 테이트의 두 후계자인 애덤 데이비스와 제임스 윙키 페어로스가 이끄는 테이트 타워는 로큰롤 바깥 세계에서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두 회사 모두 땅이 필요했다. 하지만 둘 다 그 정도로 큰 땅을 원하지는 않았다.
트로이 클레어, 데이비스, 테이트, 그리고 페어로스는 록 리티츠라는 새로운 유한책임 회사 명의로 계약금을 분담했고 그제야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리허설 공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최소한 엄청난 마케팅 도구가 될 터였다.
2014년 3월 그들은 스튜디오 공사를 시작했다. 펠저는 직원들을 열심히 다그쳤고 건설은 단 6개월 만에 끝났다. 그는 건물의 방음에 소요될 비용을 산출했고 다들 너무 비싸다는 데 동의했다. 어쨌든 스튜디오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있으니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로 방음 시설을 하지 않은 탓에 대가를 치러야 했다.
건물이 완성된 지 한 달이 지나 어셔가 스튜디오에서 리허설을 할 때 펠저가 언덕 위에서 그 소리를 들어본 이유다. 50건이 넘는 소음 민원을 받은 보안관이 시설을 폐쇄시켰다. 어셔와 그의 크루들은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교에 있는 필드 하우스로 이동했다.
U2가 6주 내에 록 리티츠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스튜디오는 사용 불가였다. 워윅 타운은 한 자문 업체에 소음 감소에 대한 컨설팅을 의뢰했다. 록 리티츠는 세 곳에 연락했다. 파이버글라스 흡음재와 경량 금속으로 만든 스튜디오의 벽면은 높은 주파수의 소리를 흡수하는 반면 저음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어셔가 노래를 부르면 저음의 파동이 주변의 땅에 전방위로 깔렸다. 이미 건물 공사가 끝난 후에 이를 감소시킬 유일한 방법은 중량을 추가하는 것이다.
다양한 해결책이 논의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건물 위에 또 하나의 건물을 세움. 비용은 1000만 달러. 납은 뛰어난 방음재지만 너무 비싸고 잠재적으로 안전하지 않다. 물도 훌륭한 방음재지만 물 침대를 벽에 붙일 수 있을까? 모래주머니는… 구질구질한 느낌이다. 이어서 펠저는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원고(〈크리스천 스타일의 훌륭한 섹스〉라는 책)를 멈추고 생각했다. 숏크리트는 어떨까? 숏크리트는 수영장을 만들 때 쓰는 분무식 콘크리트로 쇄석만큼이나 저렴했다.
펠저는 그가 다니는 교회인 ‘그리스도가 변화시킨 삶’의 동료 교인에게 연락했다. 예전에 아미시였고 현재 숏크리트 전문가인 그는 스튜디오 벽면에 철근을 설치하고 분무를 시작했다. 숏크리트는 벽에 잘 붙었다. 이후 열흘에 걸쳐 180만kg의 숏크리트를 스튜디오 내부 벽에 타설했다.

스튜디오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록 리티츠가 보유한 39헥타르의 부지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용도를 변경해야 했다. 이곳은 삼면이 농업 보호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베일러의 이야기
네드 펠저는 스튜디오를 짓기 위해 베일러를 데려왔고 록 리티츠가 확장을 거듭할 때마다 그를 불렀다. 베일러는 차를 타고 캠퍼스를 지나가며(아미시 교도는 문명의 이기를 금한다.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기도 하며, 과거에는 전기를 쓰지 않기 위해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기도 했다. 운전은 금물이지만 차를 얻어 타는 것은 괜찮다) 건물 외관이나 교통량의 증가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튜디오를 덮을 약 3000장의 금속판도 관심 밖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 또 다른 건물이 있군.’
지금은 이른 봄이고, 베일러와 24명의 직원들은 록 리티츠의 신규 확장을 비롯한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앞서 5년에 걸쳐 3동의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들은 다음 5동의 건물을 단 18개월 내에 지을 것이다. 펠저는 그냥 계약서만 보냈다. “신규 스튜디오와 포드 1A는 460만 달러, 포드 5는 230만 달러.” 클레어 글로벌의 새로운 본사 건물은 그 두 건물 사이 어딘가에 들어설 것이다.
베일러는 자신이 어릴 적에 플레인 공동체의 10%가 건축 일을 했다고 추측한다. 요즘은 70%가 넘는다. 1960년대에 공무원들은 플레인 종파가 만든 우유를 냉장하지 않으면 판매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공동체 지도자들은 구성원들이 일을 접게 만들 참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우유의 냉장을 허락했다. 요즘에는 아미시 전기기술자도 있다. “세월이 가면서 기술이 뭔가를 변화시키죠.” 베일러의 말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지침을 내리긴 하지만 각자의 양심을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베일러는 맥주 총판을 위한 건물은 만들지 않겠지만 록 리티츠는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